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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는 사람 (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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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뇨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앓고 있습니다. 당뇨병 환자들 대부분은 자기가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을 잘 잊습니다. 그리고 당뇨병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뇨병은 심해지기 전까지, 어느 정도 심해져도 자각 증세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행동하고 생활하는데 별로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뇨는 자각 증세 없이 무섭게 속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다가 합병증이 오게 됩니다. 시력을 잃기도 하고, 손발을 자르기도 합니다. 당뇨병은 참 무서운 병입니다. 의사로부터 요즘 혈당 조절이 잘 안되고 있으니 약을 좀 더 늘려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로부터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참 우울합니다. 성경의 과원지기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주인이 잘라 버리겠다고 하였을 때 한해만 참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듯이 한 달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음식을 절제하고 매일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몸무게를 좀 줄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에 다시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서 약을 늘이기 보다는 힘들어도 몸무게를 줄여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저를 위하여 옳고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잘 지켜서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하고 사랑하는 손녀가 시집가서 아이 낳는 것을 보려면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동을 하여 체중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뇨병은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는 많지 않은 병입니다. 국민소득이 높은 선진국에 많은 병입니다. 우리나라도 소득이 높지 않고 가난했을 때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병입니다. 그러나 소득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도 당뇨병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난하여 잘 먹지 못할 때는 없었는데, 부요해지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욕심껏 먹으면서 이와 같은 병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적절하여야 하는데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모자라고 조금 잘못하면 지나치고.....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아니면 부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사람을 부르심을 부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은 가난한 자들에게만 있고 부한 자들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그렇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가난도 짐입니다. 가난은 참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쓰면서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썼었습니다. 많은 가난한 분들이 그 글을 읽고 쉽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분노까지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배부른 자의 어리석음 또는 약 올림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난을 불행이라고 이야기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냥 가난이 불행이라면 그냥 부함 자체가 행복이 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부자는 아니지만 조금 부자가 되 보니 알겠습니다. 부함이 좋기는 좋은데 생각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난이 불행이라면 그냥 돈만 벌어 부자가 되면 행복해 질 겁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얄팍한 생각이 바로 오늘 우리 자본주의 국가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난이 생각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지만 호기 있게 가난은 좀 불편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사는 것이 더 지혜롭고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은 불행이 아니라 불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저는 지금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가난은 참 수고스러운 것이고 부담스러운 것이고 무거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려고 애를 쓰듯 가난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함부로 가난을 미화하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부함도 수고스럽습니다. 무겁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부함을 통하여 누리고 얻는 좋음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고 더 성장시키기 위하여 감당해야 할 부담이 훨씬 더 큽니다. 부함은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지만, 가난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 즉시 부함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주인이 가난에서 부함으로 바뀐 것 뿐 우리는 여전히 자유 없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를 잃으면 평안을 잃습니다. 기쁨을 잃습니다. 지난 주간 호주를 다녀왔습니다. 호주 코스타(KOSTA : KOrean STudent in All nations :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로 해마다 10여 개 국에서 열리고 있는 집회)를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15년째 코스타를 섬기고 있습니다. 15년 전에는 젊은 강사였는데 지금은 거의 최고참 강사가 되었습니다. 코스타는 갈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청년들이 말씀 앞에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을 본다는 것처럼 감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이번에 호주를 다녀오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어느새 호주와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호주가 우리보다 앞서 있지만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호주에 가보면 먹고 자고 다니는데 한국보다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신문에 보도 되던 나라가 어느 새 성장하여 호주 정도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가난에서 해방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가난에서 해방되자마자 우리나라는 지금 부함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그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우리들을 경제적인 당뇨병 환자가 되게 하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그러다가 시력을 잃고 앞을 보지 못하며 손과 발이 썩어 들어가 그것을 절단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과 나라가 되는 것 같아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자유가 좋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자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자유인으로 창조하시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자유를 존중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로 들어오고 싶으셔도 함부로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로 들어오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만 좋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옳고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먼저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리기 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가 좋습니다. 저는 제게서 그 소중한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소중한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죄의 삯을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죄의 뿌리가 되는 욕심과 욕심으로부터 말미암는 집착이 우리에게서 소중한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자유는 사랑이고 화평입니다.


큰 아이가 자기 여자 친구에게 생일이라면 장미꽃을 사다 주었습니다. 포항에서 서울까지 와서 전해 주고 갔습니다. 그때가 시험기간이라 시간도 정신도 없었을 터인데 잊지 않고 밤에 기차를 타고 올라와 친구에게 장미를 전해 주고 내려갔었습니다. 그런 큰 아이가 정작 제 생일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습니다.

섭섭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괘씸했습니다. 그 일에 대하여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그와 같은 일이 잘 한 일은 물론 아니나 어떤 면에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 아이가 아버지 생일은 기억하여 꽃을 보내고 자기 여자 친구 생일은 잊어버리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섭섭한 마음에 하루 종일 그 문제를 생각하다가 저는 내 아이가 나보다 자기 여자 친구를 더 좋아하고 사랑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가 이제 내가 내 아들을 내 마음과 생각과 품에서 떠나보내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저는 그날 제 아이를 제 마음에서 떠나보냈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떠나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그날 저는 큰 아이 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아들도 다 떠나보냈습니다.

사랑하면 집착하게 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과의 관계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사랑함으로 자식에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 집착이 자식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집착하다가 아들이 자기 아내를, 딸이 자기 남편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그와 같은 질투와 시기와 집착으로부터 자식을 떠나보냈습니다.

자식을 떠나보내면서 그날 제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자식입니다. 그날 저는 저를 떠날 자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요즘 아파트에서 4대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큰 아들 내외가 분가하지 아니하고 시부모는 물론이고 시 할머니와 두 시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큰 아들 내외에게 방 한 칸 못 얻어 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큰 아들 내외가 많이 불편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큰 아이가 제 생일을 잊어 섭섭했던 날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대로 자식을 떠나 보냈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집착하지 아니하고, 욕심 부리지 아니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내 아들의 사랑을 혼자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자식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돈입니다. 저는 솔직히 돈이 좋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해도 받고 심지어는 욕도 먹지만 그대로 저는 돈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자식만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돈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마 여러분들도 거의 예외가 아닐 겁니다) 지나치게 돈과 물질에 집착하여 돈과 물질에 노예가 되어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지방과 살이 있습니다. 제가 만일 지금 체중이 50kg 밖에 나가지 않는다면 의사는 우선 많이 먹고 잘 쉬면서 체중을 늘리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무조건 체중을 늘리면 안 됩니다. 내게 적당한 체중이 있습니다. 지금 제 문제는 그 적당한 체중을 오버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비만성 당뇨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돈과 물질이 있습니다. 돈과 물질이 거기에 미달하면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돈만 많이 벌면 건강해지고 행복해 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하지 않고 먹기만 하여 비만이 되고, 그 비만 때문에 온갖 성인병을 갖게 되듯 잘 쓰지 못하고 벌기만 하면 경제적인 비만이 되어 이런 저런 경제적 성인병에 걸려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돈과 물질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수준의 돈과 물질보다 많은 돈과 물질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그것이 필요해서 라기 보다는 그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여 쓰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우리의 정신과 영을 병들게 합니다. 정신적인, 영적인 당뇨병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의 대부분은 심각한 영적 당뇨병 환자들입니다.

목사는 말하자면 영적 의사와 같습니다. 의사도 당뇨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의사는 의사입니다. 의사로서 당뇨병에 걸려 증세가 심각해 진 여러분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내리라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을 좀 빼시고 운동을 하십시오.>

가난의 노예가 되신 분들은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함의 노예가 되신 분들은 열심히 쓰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백성들에게 희년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년의 가장 중요한 컨셉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선포하라는 것이 희년의 가장 중요한 컨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희년의 자유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지 아십니까?

물론 가난하여 자기 땅 한 조박도 없는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을 위한 자유입니다. 희년을 통하여 저들은 가난의 노예로부터 자유 함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유는 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년의 자유는 부한 자들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희년을 실천함으로 저들은 부함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돈과 물질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난과 노예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보다 더 크고 귀한 자유를 얻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우려고 하는 열매나눔재단은 희년재단입니다. 열매나눔재단을 통하여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희년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독점하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포기가 제게 소중한 자유와 사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제 몸 무게의 최소한 10%를 포기해야만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좀 심각한 상태에 와 있습니다.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제 몸무게의 10%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희년의 실천을 위하여 재산의 얼마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저는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그것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감사한 것은 저희 가족은 모두가 다 거기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결국 그것을 실천할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내 아이들과 자손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확신합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다이어트도 쉽지 않습니다. 처음 당뇨병에 걸렸을 때 쇼크를 받아 10kg 정도 살을 빼 본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운동을 하여 살을 뺄 생각을 하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부터 생각됩니다. 그래도 해야만 합니다. 탈북자를 위하여, 가난한 자들의 자활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우선 여러분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하여, 참 자유를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물질과 재산의 다이어트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기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 기가 막인 질문에 목사님이 아주 근사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자유하는 사람이 되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케제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예수는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마땅히 자유인이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건강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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