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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매어 둘 수 없는 복음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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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잃고 비참한 포로 생활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다시는 그와 같은 서러운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을 강화했습니다. 민족주의 신앙을 강화하는 가운데 그들은 극히 배타적인 유대교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들은 만민의 하나님을 그들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을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장벽을 넘어 세계를 향해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 유대교를 열렬하게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그는 그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가장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믿고 그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진리를 독점하고 가두어 두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속에서도 복음을 어떤 틀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을 성도들이 읽지도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사제들이 성경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심히 약화시키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좀 심하게 말할 것 같으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벽에 걸린 액자 속에 영정 사진처럼 고이 모셔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보 진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념이라는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수 진영 사람들은 알량한 신학의 틀에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머리되신 주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 율법에 완전히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유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 세력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숱하게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아무리 짙은 것 같아도 빛을 아주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잠시 세상을 어둡게 할 수는 있지만... 어둔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밝아올 것 같으면 어두움은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찬란한 빛이 세상을 밝히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히브리 노예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풀려나 자유하게 되었습니까?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요셉이 어떻게 풀려나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사자 굴과 풀무 불에서 무사히 살아 나오지 않았습니까? 또 사도 바울도 여러 번 옥에 갇혔지만 누구도 그를 아주 묶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악한 세력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깊은 감옥에 잠시 가둘 수는 있지만 자유하게 하는 복음은 결코 묶어 둘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진이 일어나고 굳게 닫혔던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복음은 그 누구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향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이 친히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헤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복음이 노예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복음이 인종 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들을 철폐했습니다. 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노인과 어린이, 병든 자와 장애인 등 약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도록 복음이 역사했고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 복음의 능력을 싫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소위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세력은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역사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방해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되었고 지금도 누룩처럼 퍼져가고 있습니다. 결코 그 누구도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가두면 가둘수록 더 멀리 튑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잘 살아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붙잡혀서 로마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가이사랴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가이사 황제의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서 상소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꿈에도 그리던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로마에 도착한 그는 시위대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시위대란 황제와 궁성을 지키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이었습니다. 오늘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과 같은 직책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사슬이라는 것은 수갑과 같은 것으로서 짧은 쇠사슬로 죄수와 간수의 손을 함께 묶어 죄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함께 사슬에 묶여 지내는 바로 그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병사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 하루에 서너 차례씩 교대로 근무했습니다. 때문에 병사들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간증을 들어야 했고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최정예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병사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병사들이 되어 광대한 로마 제국이 하나님 나라로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이 복음의 전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괜히 해 본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난관과 역경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붙잡혀 간 것도 어떻게 보면 국가의 지원을 받아 공짜로 로마 선교 여행을 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유라굴로라는 광풍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고 그 결과 선장을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밀레도 섬 주민들까지 복음을 믿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또한 감옥 안에서 틈나는 대로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서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동참하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그를 생각하며 열심히 선교에 동참하여 주님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8절, 9절 말씀으로 간증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귀한 보배를 질그릇 같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그 큰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디모데후서 2장 9절 말씀으로 또 다시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오늘 교회는 교회 안팎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 안에 황금 우상이 이미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한 마귀 사탄은 세상 문화라는 매혹적인 가면을 쓰고 특히 젊은이들을 삼키려고 호시탐탐 교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역풍이 불 때 바람을 타고 더 힘차게 그리고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공기 저항이 없을 것 같으면 비행기도 결코 날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돛단배도 빨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 오히려 그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매어 둘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끝까지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보좌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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