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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사랑을 회복하는 교회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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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11월 한달동안은 개인의 회복과 관련하여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개인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가 있었을 것으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약 7회에 걸쳐서 교회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물론 성탄절이나 신년이 될 경우에는 우리가 절기와 관련된 메시지를 나누겠지만 그밖의 주일은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하여 소아시아 7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그 교회를 통한 교회를 점검하고 무엇을 회복하고 재활성해야 하는가를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목자들과 제자훈련 사역반원들과 함께 나눈 책 중에서 해리 L 리더 목사님이 쓴 ‘다시 불길로 타오르게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 해리  L 리더 목사님은 미국 교회의 문제를 3가지를 진단합니다.
첫째 미국 전체 교회의 약 95%가 출석교인 100명 미만이다.
둘째 미국 교회의 80-85%가 정체되어 있거나 쇠퇴하고 있다.
셋째 미국에서는 해마다 3500-4000개의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것을 제가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을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도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스스로 병들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개척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기존교회가 재활성화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새로운 성도를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성도들의 신앙을 회복하는 과제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의 재활성화, 교회의 회복의 과제는 지금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이미 초대교회당시부터 이런 회복의 과제가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소개되고 있고 특별히 오늘 본문의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많은 교회 중에서 일곱교회를 선택하여 서신을 보내는 것입니까?
당시에 소아시아에 교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곱교회로 제한하여 편지를 보내고 잇습니다.일곱교회는 단지 초대교회에 존재하는 교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에도 있었고 중세와 근대 현대에도 얼마든지 있는 유형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교회는 세대마다 다르면서도 같은 부분의 모습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을 보면서 저는 이 시대에도 이런 교회는 여전히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에베소 도시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어키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지중해 동부에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에베소가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도시들을 로마로 연결하는 육, 해로상의  교차로였습니다. 항구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얼마나 번창하고 화려 했던가를 짐작할만 합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신은 다산의 여신이었습니다. 이 여신상이 세워진 신전은 대리석으로 된 기둥이 120개나 될 정도였고 수천명의 남녀사제들이 신전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신전에 종사하는 여사제들은 매음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도피중인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고 왕들과 상인들에게는 은행역활도 했다고 합니다.

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운 것은 바울이  3년간이나 체류하면서 전도한 결과 에베소 여러지방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 교회를 사역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에베소장로들을 청하여 3년동안 눈물로 돌본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잘 감독할 것을 부탁하는 것을 봅니다. 범사에 바울이 본을 보이면서 개척한 에베소교회는 바울 이후에 디모데가 이 교회를 관할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그러나 교회가 세워진뒤에 40여년이 지나면서 차츰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에베소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오래되는 교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입니다. 어쩌면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역사가 있는 정통성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흔히들 나타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역사가 있는 정통성있는 교회의 가장 큰 장점은 분명한 교리위에 교회가 악한 사람이나 악한 요소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판단하기를 잘 하고 시시비비가 분명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런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악한 자를 허용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르고 문제에 집착하고 결국 교회가 지쳐버리고 맙니다.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에베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기 각 교회마다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존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한 주님의 모습이 다양성있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1절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합니다.
2가지의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계십니다.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사자들입니다. 즉 주의 종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사자들을 주님이 친히 붙잡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일곱금촛대는 일곱교회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이 친히 왕래하시면서 주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주의 사자들을 붙잡고 있고 주님이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면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주의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주님의 교회를 왕래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겠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주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주님은 세상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 교회가 불완전하고 부족하여도 우리 주님은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가장 크게 일하십니다.

2. 에베소교회가 회복한 교회의 장점입니다.

  1) 수고와 인내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2절 네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에베소교회는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하는 믿음이었습니다.우리가 특히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습이 인내라고 봅니다. 수고하면서 인내한다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런 좋은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2)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2절에 소개된 것처럼 에베소교회는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가려 냈습니다. 진리에도 충만했던 교회였기에 이단사상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이고 아주 분명한 기준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을 배척하였습니다.에베소교회가 배척한 니골라는 누구인가? 이들은 잘못되고 부도덕한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은혜와 복음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필요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종하게 하고 무절제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다행스럽게도 에베소교회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들을 배척하고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다시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율법의 이해입니다.
가끔 보면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교회의 니골당과 같이 우리가 배척해야 할 주장입니다. 율법은 구원을 얻는 도구로는 무용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나아갈 수 있는 지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중에서 우리는 십계명같은 도덕법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잘 지키면 성화의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좋은 장점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3)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는 교회입니다.
  3절에 보면 주님을 위하여 환난 중에서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로마의 군대가 예수의 이름을 저주하고 배반하면  그에게  영예와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폴리캅은 86년동안 주님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는데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느냐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굳굳하게 화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주님께 인정을 받아 아세아 일곱교회  중에서도  일등교회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정도만 보면 우리 사람들의 보기에는 대단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심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합니다.
1)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첫사랑을 버린 교회였습니다. 교리가 살아있고 수고와 인내도 있었던 교회인데 문제는 첫사랑을 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때에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가령 육신적인 부부의 경우 신랑이 신부를 맞이 하려는 가슴 설레이는 그 첫사랑 기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으로만 전달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이나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뜨거운 가슴만이 또 다른 가슴을 뜨거웁게 불태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그 가슴  설레이게 하던 기쁨을 가진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두손가 두발에 쇠못을 박히시고 창에 허리를 찔리고 흘리신 그 피가 나를 위하 것임을 알앗을때 얼마나 가슴이 찡하고 감사했습니까? 그래서 눈물흘리면서 주님만을 위하여 일평생 살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도 그 첫 사랑의 감격, 주님께 대한 그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첫사랑이 감사해서 불타는 정열 다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자지 못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먼길을  걸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후 제 인생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끊임없이  뜨거운 열정이 솟아 올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  사람마다  외쳐 전했습니다.

예수에게 미쳤다고 수군대던 것이 싫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그 때, 그 처음 사랑의 진실이 없습니다. 그 감격도 시들어 가고, 그 기쁨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던 날,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첫 사랑을 버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퇴보하는 것이 그 증상입니다. 영적인 퇴보를 알리는 몇가지 신호들이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것들에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첫 사랑을 잃어버린 신호입니다.
가장 먼저 징조는 말씀을 잘 받지 않습니다.
첫사랑의 감격이 떠난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을 보고 환경을 먼저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로 씨의 비유를 하십니다. 씨는 주님의 말씀인데 그 씨를 밭에 뿌리는데 4종류의 밭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밭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밭 중에서 길가,돌짝밭,가시떨기밭,옥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열매를 맺는 밭은 옥토 뿐입니다. 이 옥토는 듣고 잘 깨달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나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을 보면 세상에서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거나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말씀보다 세상을 앞세웁니다. 그러니까 첫사랑이 식어지고 주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을 먼저 앞세웁니다. 그래서 세상의 논리대로 세상의 방법대로 결국 가게 되면서 주님에게서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돈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면서 마음이 갈라지고 멀어지고 자꾸 소극적인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자꾸 돈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세상 속에서 자꾸 돈에 관한 이야기 돈버는 이야기 돈을 생각하고 돈을 염려하고 돈을 계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첫사랑이 떠난 사람들은 점점 예배의 감동이 식어지고 없어지게 됩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오직 돈과 관련하여 에너지를 다 집중하고 그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소위 말하여 주님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그 마음 그 눈 그 귀 그 몸의 에너지가 세상에 이미 중독이 되어 있으므로 예배가 따분하고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함과 진정함이 결여되면서 결국 형식적인 예배가 고루한 예배가 드려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기도가 어색하고 되지 않습니다.
그 마음 속에 세상이 가득한 가운데 드려지는 기도는 전혀 마음이 실리지 않고 믿음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기도가 자꾸 줄어들고 기도를 하여도 형식적인 잠깐의 기도로 끝이나고 맙니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게 되면 대화가 멀어지는 것처럼 자꾸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기도하는 마음이 줄어들게 되는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까? 새로운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첫사랑이 식어지면 죄를 짓고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이전에는 작은 죄를 짓고도 두려워하고 떨면서 회개하였는데 차츰 차츰 죄를 짓고도 담대하게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너무 무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죄에 대하여 자기를 합리하하고 변명하면서 자꾸 궁색하게 자기를 지켜나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그 사람의 중심은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꾸 식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 주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주님의 자녀들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히브리서12장 8절에 “징계는 다 받는 거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질병으로 사고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통하여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렇게 하여서라도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러 변화의 삶과 인격과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종 가정 속에서 부부들이 사랑이 전혀없이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사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정서적인 이혼이라고 합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인데 마음과 정서적으로는 남남인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 가정 속에는 어떤 삶의 열정도 어떤 풍성함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첫사랑이 식어버린 신앙의 사람은 마음이 굳어있고 삶 속에 주님이 주님으로서 역사하지 못하기에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새로움이나 도전이나 헌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첫사랑이 식은 교회들은 돈으로하는 일들은 많이 합니다. 시스템이있어서 무수한 프로그램은 돌아가면서 일은 잘 되어질 수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존재의 변화가 없습니다.
나는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냉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고 얼마나 변질되기 쉽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첫 사랑을 회복합니까?

3. 첫사랑을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첫째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5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여기서 먼저 우리 자신들의 실패한 지점을 잘 살펴보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사랑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자신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속으면서 사랑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질될때 보면 서서히 조금씩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회학자인 죠지바나가 이런 예화를 한적이 있습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솥안에 넣고 서서히 불을 높이면 가만히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못느낍니다. 그러나 뜨거운 물이 있는 솥안에 개구리를 넣으면 개구리가 금방 뛰쳐 나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서서히” 무너져 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마음에 생길 경우에 첫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세상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쾌락이 될 수 잇습니다. 사실은 이 둘중에 하나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사랑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결국 우리 마음에 주님에 대한 처사랑의 열정들이 식고 둔해지기 시작합니다.그러면 점점 주님에 대하여 나태하게 되고 결국 멀어지게 됩니다.

옛날 로마의 황제는 그리스도인이 자꾸 늘어나는 것에 대하여 큰 위협을 느껴 신하들을 불러 놓고 그리스도인들을 없앨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황제가 먼저 로마의 법률을 강화시켜 그리스도인들을 무조건 죽이는 법을 만들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신하가 황제의 의견에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믿는 자들을 죽여 순교자로 만들면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순교자들을 추앙하기 때문에 역효과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하는 황제의 방법보다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죽이지는 말고 잔인하게 고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저 예수쟁이들은 심한 고문을 받기만 하면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다고 좋아합니다. 또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늘의 상급이 더 많아진다고 기뻐하며 오히려 고문의 흔적을 자랑하고 다닙니다. 그 방법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했습니다.
이때 구석에 있던 한 신하가 조용하게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하게 즐기고 놀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간단합니다. 그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죄를 지을 것이고 그러면 기독교는 있어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없애는 가장 무서운 요인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주님이 기대하는 사랑을 지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첫 사랑을 회복하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이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역하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기 기억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큰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강조한 것은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영성의 사람입니다. 영성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교회는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처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과제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사람 기뻐하시는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회개하는 곳에 회복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는 곳에 주님의 사랑이 회복되고 회복하는 곳에 주님의 역사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 처음 행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처음 그 간절한 마음으로 몸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경배하든 그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열심과 그 중심의 아름다운 순수함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갖으라고 합니다.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사랑은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말도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그 첫사랑의 회복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희생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는 곳에 바로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7절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여기 주님은 승리하는 자에게 2가지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겟다고 합니다.
낙원이라는 말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들은 낙원과 천국을 다르게 해석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낙원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둘째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생의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그러나 이 말씀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듣고 행하는 자가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훌륭했습니다. 정통교회였고 역사가 있는 교회로서 좋은 교리도 있엇고 인내와 수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그로 인해서 결국은 성도간의 사랑도 식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신앙 우리의 신앙을 한번 점검하고 주님의 뜻대로 회복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첫사랑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어 주를 향하여 주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의 사랑이 새롭게 회복되어져 승리자로 주님 앞에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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