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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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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자로 불리우는 마하트마 간디, 그는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산상수훈을 애독하였고 산상수훈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생활 기본을 그리스도의 교훈에 두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멀리 떠나 있거나 어떤 때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변질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물질적 복에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이번 한 주간, 지난 11개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과연 내가 우리 교우들에게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달했는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으며 성도들의 영의 양식으로 부족하지 않았는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우들을 선동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을 남용하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교인들의 세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오용하지는 않았는가?

이제 남은 한 달 만이라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님께서 정말 주시길 원하시는 복에 대하여 증거하고 싶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재미 있는 설교, 은혜로운 설교 듣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인가? 오늘 산상수훈의 첫 번째 교훈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음까지도 가난한 것은 좋지 않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인색하다, 인정이 없다, 이해심이 부족하다는 말과 통한다. 반면에 마음이 부요하다라는 말은 후덕하다, 인정이 있다, 여유가 있다라는 의미로 통한다. 그러나 가난한 것이 심령이란 말로 바뀌게 되면 전혀 다름 의미를 갖게 된다.

오늘 본문의 8가지 복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복은 심령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사람들로부터 인색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이 있는 자라는 칭찬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

“심령” - 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근본적 부분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데,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말한다.

“가난” - “프토코스”라고 하는데, 매일 노동하여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두 단어가 합해져서 간단한 한 문장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문장의 의미는 심령이 너무나 가난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는 연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거지와 같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불쌍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눅18장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온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신학자, 루이스 바비에리,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능력이 없는 영적으로 무능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죄악됨과 죄에 대하여 전혀 무능한 존재임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에 바리새인의 모습 속에서 영적인 교만이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된다.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외면적으로 모범적 신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그의 심령 상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심령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바리새인보다 세리를 더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며 비천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심령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2.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

1)자각과 자기 부인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바로 알면 자신이 죄인된 것이 드러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겸손히 고백한다.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결코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자랑할 것은 자기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뿐이다. 자신이 아무리 능력 있어도 십자가 뒤에 숨게 된다.

2)하나님께 대한 신뢰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가난”, 프토코스란 말은 재물, 능력, 명성이 없는 상태, 어떠한 공격에도 방어할 힘이 없는 무력의 상태를 가리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오직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인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붙잡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를 통해서 교만이 깨진다. 돈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기술이나 재능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믿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터득할 때 비로소 전능자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나를 도울 분이 오직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만이 나의 도우심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 만을 신뢰한다.

3)수용적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는 줄을 알기에 자신을 비우고 주님을 모셔 들인다. 전에는 따지고 재고 늦장부렸지만 이제는 지체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대로 믿고 받아 들인다. 다른 사람의 충고나 도움도 감사함으로 받는다. 거부한다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가난한 사람은 찬밥 더운 밥 가리지 않는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뿐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3.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1)세상의 것들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탄한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것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들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불완전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복을 삼지 않는다.
전 1:2-3,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약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예)사업의 실패, 실직, 이별, 변심... 파괴와 소멸의 가능성를 내포, 항상 불안함.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의 가치가 어떠함을 분명히 알고 혼돈하지 않는다. 분명한 선이 그어진다.

2)하나님과 완전한 화합을 이루기에 복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의 가치를 깨닫고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말씀, 뜻에 완전히 순종, 신뢰한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손해보는 일이 있어도, 어려움을 당해도, 이러한 환란과 고통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가보다. 아멘, 믿습니다. 낙심, 원망, 불평하지 않는다. 항상 감사 감사 감사...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했는데 이 땅에서 땅만 보며 탄식하고 싸우며 살기보다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소망하므로 안되도 감사, 잘 되면 더 감사. 항상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룬 삶이기에 행복한 것이다. 때로는 실패와 육신적 고통으로 인해 근심 낙심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아니심을 믿기에 그에게 주신 기쁨과 복을 잃지 않는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4.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인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곳이다. 완전한 구원과 해방을 얻는 곳이다. 더 이상 눈물 골짜기를 걷지 않으며, 질병, 억울함이나 이별이 없는 곳이다.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은 천국의 백만분의 1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결국 이 세상에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야만 받는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본문을 보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현재 시제로 말씀하셨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누리게 된다.
영국의 주석가 윌리암 버클레이는 감탄문의 형식으로 노래했다.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오 신자가 된 축복이여, 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즐거움이여, 오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주가 되신 구세주로 알게된 참된 행복이여!”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모하는 신자의 삶보다 더 큰 감격과 즐거움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누릴 기쁨에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요소들을 갖다 붙이기 때문에 빼앗기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건강, 물질, 지위, 명예, 재능은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현세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올바른 목적을 위해 구하고, 쓰여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기쁨과 감격이 되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이미 주님 기쁨 마져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받은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영적 나태함과 교만에 빠져 있는 상태. 하나님으로 인해 부요함을 누리기 보다는 육신적 쾌락과 안일, 물질적 욕심으로 만족하려는 신자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항상 분주하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나까 만족함이 없다. 여기가 아닌가 보네, 아까 거긴가보네!

2)받은 복을 풍성히 누리는 자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이런 사람은 물질의 많고 적음, 지식의 유무, 지위고하를 떠나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은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요. 복이 있는 자요. 천국을 소유한 자인 것이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복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최상금의 복, 인간이 짓고, 만든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말한다. 그 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깨지고 부서질 것, 소멸되고 무너질 육신의 것으로부터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자. 그리하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천상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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