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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지키라 (잠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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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행복과 기쁨은 어떤 사실과 상황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의 관점 즉, 마음에 의하여 부여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맛있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시장하여 잘 먹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이어트를 해야 되는데 이런 유혹을 어떻게 이기지?’ 하고 곤욕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위장이 좋지 않아서 그 음식을 보고도 전혀 먹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고통의 상황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눈이 펄펄 내려 온 대지 위를 덮고 있는데도 그 눈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 눈을 치우기 위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도 몸이 아파서 밖에 나갈 수 없어 오히려 마음이 더욱더 슬픈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이렇게 주일이 되면 6부 예배를 드리고 저녁예배까지 드리는데 마음에 혹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휴, 어떻게 매일 여러 번 설교를 해야 되나. 예배당이 좁아서 참 힘들다.’ 하고 마음에 갑갑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참 감사하다. 예배당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인물들을 양성하고 구제와 선교를 위한 은혜의 사역을 이룰 수 있어서 감사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큰 축복이요,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지금은 그나마 고쳐서 다행이지만 몇 해 전에는 여름철에 비가 오면 천정에서 비가 뚝뚝 떨어져서 그 아래에 양동이를 받쳐 놓아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예배당에서도 하루 종일 매번 가득 가득 모여서 예배를 종일토록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은혜 받는 모습을 보고 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좋지 못한 여건을 가지고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부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회가 여러 가지 여건으로 ‘불편하다’ 혹은 ‘주차장이 없어서 교회 나가기 힘들다.’ 라는 말을 들을 때 조금 있으면 시험 봐서 교인들 뽑을 거니까 ‘지금 빨리 오십시오.’ 라고 생각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자부심은 어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베푸실 때에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입니다. 안타깝게도 때가 되어 그들이 배고픔을 느꼈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심히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도 역시 인간이기에 배가 고팠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워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를 민망히 여기셔서 이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어린 소년 하나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하잘 것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상태에서 감사하여 기도를 하시고 그것을 떼어주실 때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즉 부족함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의 역사가 연약한 것을 가지고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먹을 만한 가득한 음식이 있어서 쌓아놓고 그들이 와서 다 먹었다면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했기에 그것은 기록되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황무지에 떨어졌을 때도 한탄하지 않고 내가 이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면 그것은 참 귀한일이 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면모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삶의 존재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우리 마음상태에 관한 축복을 받아야합니다.

오늘도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될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친 삶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지켜 상처를 받지 않고 건강한 심령이 될 수 있도록 잘 방어하고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공격을 받고 있는 개념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쓰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다치고 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많이 어려움을 겪으니 너의 마음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상처를 받지 않은 건전한 자아를 가진 사람의 기쁨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마음이 바로 펴지면 우리는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것 역시 바르게 곧고 펴지게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뿌옇게 얼룩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 세상은 다 뿌옇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안경을 가지고 보면 세상은 맑은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기쁨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축복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마음 편하게 가지고 기쁨과 사랑과 축복의 심정가지고 온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다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꿈틀대는 벌레까지도 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미물인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기쁘게 여겨 질 수 있습니다.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의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직과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정직과 진실이 통할 때 까지 우리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세상에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나서야 합니다.
내가 맑은 거울이면 상대도 맑게 비춰줄 수 있습니다. 내가 왜곡된 거울이면 상대도 나를 통해서 비춰지는 모습이 왜곡되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허리 바로 펴고 곧추세워 우리 자세를 바로 잡듯이 마음도 바로 펴고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 옆의 사람 얼굴 보면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다면 내 얼굴이 찌푸려져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웃는다면 내 얼굴이 웃고 있는 모습임이 분명할 겁니다. 상처를 가지고 회복하지 못하고 치유받지 못함으로 늘 아파하는 사람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가지고 사니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니 우리 심령에는 근심만 남게 됩니다.
<잠언 15장 13절>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근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우리의 심령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가증하고 내가 늘 옳은 것 같고 앞에 선 사람의 수고 보다는 약점만 보이고 다른 이들은 다 나보다 못해서 내가 항상 주장해야 할 것 같은 것은 내가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픔입니다. 그 아픔은 내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 마음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우리 삶의 고통이요, 아픔이요, 눈물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괴로운 것 많고 사람 볼 때도 괴로운 것 많으면 나는 마음을 다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단은 어느 순간이든지 우리 마음에 흠집을 내고, 상처를 내고, 따라서 우리를 그의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사단의 노림을 인식하고 내가 지금 사단의 사냥거리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사단의 올무에 걸려서 나는 마음을 상해 당하고 마음을 상해 다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해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마음의 평안보다는 분요로움을 줍니다. 분노를 줍니다.
맛이 없는 식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건강이 주어졌다는 축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이 바르게 설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합니다.

두 번째 생각해 봅니다.
상처받지 않는 건강한 자아상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입니다. <내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마음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수시로 상처입고 우리는 고통가운데 아픔을 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 살다보면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다 상처 가지고 있습니다. 자라온 삶의 성장과정에서 이러저러하게, 거칠게 살아가는 세상의 전장 속에서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치유가 가능합니다. 내가 상처가 있다라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투사될까요?
자꾸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내 주변으로부터 어떤 누구로부터도 내가 피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과 상황이 내 마음에 안 듭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꼭 말하고 싶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내 말에 동조해 주어야 내가 마음이 좀 편해지고 위로받는 것 같습니다. 상처가 심한 사람일수록 감정적인 동반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늘 옳은 것 같고 내 마음에 동조해 주지 않으면 그는 내 적과 같이 느껴져 매우 공격적인 가해의 대상으로 내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목소리가 커집니다. 말이 많아집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혼내주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 삶속에 내가 상처를 받고 있어서 이와 같이 내 마음이 표출되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상처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감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았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경제적으로는 피폐했고, 소망이 없고, 눌린 상태가운데 그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야를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자연을 정복하시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예수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그들은 겉옷을 벗어서 길가에 깔며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그들은 외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나라에 권세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 되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무능해 보이는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그들의 가슴에 있는 욕구불만을 해소하지 못해 한 희생양을 둠으로써 발산시켜보고자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기대했던 예수에 대하여 분노와 실망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은 함성 칩니다.

스스로에 우리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는 치유받기에 애써야 합니다. 내 스스로 환자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치료에 힘쓸 수밖에 없고 더 나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문제는 환자 스스로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라고 느끼지 못하고 주의도 안하고 치료도 안하고 제고집 부리면 결국 결정적인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성을 다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유익한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내 정성을 다 해서 내 마음의 원대로가 아니라 내게 정말 유익을 끼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절제와 인내를 요청합니다.
늘 그런 생각하는데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은 약이라도 잘 먹어야 해요. 몸도 성치 않은데 약 먹는 것도 귀찮아서 자꾸 빠트리면 결국 치료하기 힘들어 질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나가는 회개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진정한 치유라는 것은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모든 주변이 다 해결되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내 주변 여건이 어떠하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받고 충만해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씻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 받고, 누리는 이와 같은 회개와 치유의 역사로 가능할 뿐입니다. 내 마음의 색안경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사물은 언제나 그 색깔로 굴절되어 보일 뿐입니다. 세상은 고통스럽고, 사람은 가증하고, 나는 늘 피해자일 수밖에 없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뿐이라 생각합니다.
내 옆의 사람이 나를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 옆의 사람이 나를 도우려한다고 생각이 드는 것과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행복해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상처받지 않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가 아닙니다. 다음에도 이런 똑같은 일이 일어날 때 나는 어떻게 그 일을 처리할까하는 원칙을 세우는 겁니다.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사이를 왕복하는 것이 ‘시스템’ 소위 말하는 <구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우리는 마음의 구조를 상처받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서 떡을 만들 때 그 맨 끝부분에다 동그란 것을 놓으면 가래떡이 나옵니다. 널찍한 것을 넣으면 절편이 나옵니다.
구조적으로 우리에게 소화된 모든 것들, 우리에게 흡수된 모든 것들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판단되어지고 받아들여지고 느껴지느냐 하는가 하는 마음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별해서 듣고, 선별해서 보고, 선별해서 섭취해야 합니다. 아무거나 먹으면 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아무리 비싼 재료로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도 그 음식이 상했으면 그거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싼 재료, 아무리 좋은 요리사가 아무리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도 그 음식이 부패했으면 우린 그것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심령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상한 생각, 상한 말, 상한 장면, 이와 같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마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심령이 건강해 질수 있겠습니까? 부패된 말, 부패된 생각, 부패된 이야기, 부패된 우리 삶의 장면, 부패된 모든 것들을 누리고 느낀다면 우리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알지만 건강의 요소는 이렇게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마음 편하고 잘 먹고 잘 쉬고 운동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픈 것 치료할 수 있겠죠? 아마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주고 그저 우리가 잘 섭취할 수 있는 신선하고, 건강하고, 또 우리가 잘 운동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힘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우리는 소화하고 섭취해야 합니다. 섭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어떤 것을 입수하여 삶을 판단하고 구성하는 요소로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상한 음식 자꾸 먹으면 우리는 결국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상한 이야기, 상한 내용, 상한 모습, 상한 삶의 모습을 자꾸 대하면 우리는 결국 마음이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이 말씀을 나에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내게 이런 것을 보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내게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나보고 이런 느낌을 가지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내게 이일을 하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내서 나와 교재 하라고 하셨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만을 섭취할 수 있는 삶의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늘 보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에 따라서 그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는 가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오래전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바둑을 배운 때가 있었는데 처음에 배우는 사람은 늘 빠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겨울 방학 때 바둑을 처음 배우다 보니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원에도 가고 하루 종일 바둑을 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기준은 바둑을 두는 사람과 안 두는 사람으로 구별 됐습니다. 사람만 보면 바둑 두자는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교회에 가면 사람들 머리가 다 까맣잖아요. 이게 다 바둑알로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앞에는 목사님이 좀 떨어져 있잖아요. 아 이건 어떤 포석을 둔 건가 보다 이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유익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제가 산에 가끔 갈 때 산에 갔다 내려와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얼굴이 다 나뭇잎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비슷하잖아요. 그리고 사람 서 있는 것 보면 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이 이렇게 있으면 수풀이 있는 것 같고......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서 마음에 다감하게 느껴지고, 다정하게 느껴지고, 또 뿐만 아니라 마음에 신선함을 가지게 됩니다. 늘 이런 생각합니다. ‘좋은 것은 많이 보는 게 좋겠다.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은 많이 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정말 사람들은 좋은 것을 많이 생각하고 좋은 것을 많이 보고 좋은 것을 많이 들어야 되요. 그러면 우리는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들과 많이 교제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주보에 썼잖아요.

‘삶이 힘들면 우리는 시를 한 편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삶이 힘들면 사람의 마음이 강해집니다. 날이 서게 되요. 힘든 삶을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힘을 쓰면 우리 삶이 자꾸 날이 서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한 편의 시라도 더 읽어 마음을 순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 내 손에 걸리기만 해봐라. 내게 동조해 주면 동지고, 내게 조금이라도 반대하면 다 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마음이 매우 호전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 순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그때 마다 더욱더 날이 서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악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진행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 주변을,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건전한 일들과 사람들로 구성해야 됩니다. 늘 마음 다치고, 시험받고, 고통당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인적요소를 살펴보면 그 주변에 그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해요. 때로는 주변을 정리하는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환경 중에 가장 중요한 환경 중의 하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우리 삶의 환경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서 내가 이 사람과 교제를 통해 내 믿음이 자라고, 내 마음이 기쁘고, 내 마음에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은혜를 잃고, 아프고, 고통을 당하겠는가 생각해서 우리는 정리할 것 정리 해야만 합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것이 내 영혼의 고통과 아픔만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죄에 동조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빠져 적극적으로 죄를 작위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은근히 동조하고 그것에 대해서 즐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결국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교회 처음 개척해서 상가에서 예배드릴 때, 스피커가 천정에 달려있어서 공지사항을 알려주는데 안타깝게 예배드리는데 “여러분, 우리 믿음대로 삽시다.” 하는데 “언제까지 관리비 내십시오.” 하는 얘기가 나오면 참 어렵습니다.

그게 말해도 조정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피커 선을 잘라버렸습니다. 못 듣는 얘기 있겠죠. 그렇지만 못 듣는 얘기 있어도 예배시간에 적어도 그런 방해는 받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잘라버리면 우리들에게 아쉬움도 많을 것 같아요. 그러나 아쉬움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얻는 유익도 더 큰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 많죠. 맛있는 음식 잔뜩 있는데도 속이 안 좋아서 하나도 못 먹고 쳐다만 보는 사람, 영화 재미있는데도 도저히 졸려서 못보고 조는 사람, 옆의 사람 다 은혜 받고 있는데도 혼자서 시험받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웃는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요? 그런 사람 있어요.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그 가운데 그것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이예요.
상처받지 않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별해 섭취하고 우리 영혼을 상하게 하는 사단의 역사를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은혜받기도 힘든데, 기쁜 마음으로 살기도 힘든데, 언제 시험 들고 언제 마음 불편하게 살겠습니까. 여러분 삶이라는 게 참 짧아요.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 어떻습니까?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제 모습도 좀 달라지겠죠? 저도 여기서 여러분들의 얼굴모습을 보면 뭔가 달라지는 것을 제가 느낄 수가 있어요. 뭔가 달라지시더라고요. 우리 삶의 시간이라는 것은 너무 빨리 흐릅니다. 시간이라는 게 제한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안타까운 시간들을 우리는 엉뚱한 일에 소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도 힘든데 언제 불행한 일까지 다 찾아서 불행하게 살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을 지켜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성숙된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 그 백성에게 기쁨을 줍니다. 내게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있어도, 어려운 고통이 있어도,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되며 그것은 나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시편 35편 27절>을 보면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백성의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 백성의 형통함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5장 20절>을 보면 “저는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매 우리 삶에 깊은 고민 고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족함 속에서도 근심하는 사람 있습니다. 좀 건강하지 못해도 남을 돕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가득한 사람 있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은데도 늘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 끼치고 있다고 마음속에 늘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아름답게 보아야 합니다. 결전보다는 하나님이 왜 그를 사랑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옆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한 사람 한 사람 내신 거예요. 하나님이 어느 것 하나 실패작이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하면 우린 인간에 대한 존엄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셨을진대, 그를 통하여 이룰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내가 어찌 그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찌 그를 왜소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봅니다. 아마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앉아있다면 여러분이 괜찮은 분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왜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앉아있을까 한다면 여러분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보십시오. 괜찮아요. 아니면 형편없어요? 구별이 안 되세요?
다른 사람 흉보고, 다른 사람 허물 들추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는 사람은 좀 안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실제 생각하면 자신이 그런 성향이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서 왜 나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자꾸 할까? 하고 시험이 들면 사실은 그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적어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말 했다. 정말 이런 말 한마디도 정말 받아주지 않을 사람 같다.’ 생각하면 말도 안 꺼내는 겁니다. 우리는 빨리 우리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밖에 없는 마음의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얼굴이 빛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의 빛을 우리들에게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의 사람을 한 번 보면 그 사람의 얼굴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겁니다. 우리 사람의 얼굴은 서로 비취는 거울과 같아요. 미워함보다 더 큰 사랑은 기쁨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미워요. 그런데 그 사람 죽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저 사람 참 미워요. 그럼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것보다 그 사람이 훌륭하게 되어서 나를 도와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 그런 것 같은데요. “나 도와주는 것보다 죽는 게 나요.”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마다 다 죽는다면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여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최대한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힘이 되어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비행기를 탔는데, 저는 비행기를 타면 제일 늦게 타는데 앞에 앉아 있다가도 그 좁은 비행기 안에 가서 뭐 미리 들어가서 있는 게 좀 답답한 것 같아서 밖에 있다가 마지막으로 타라고 방송하면 그때 타는데 그때는 들어갔는데 좀 이상해요. 그런 적이 거의 없는데 아마 좌석 표를 이중으로 같은자리를 주었는가 봐요. 그런 경우는 특별히 없는데 아마 그날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봤더니 어떤 분이 막 다투고 있더라고요. 승무원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요. 그런데 승무원이 난감해 하는 것 같고 하여간 시간이 꽤 걸렸어요. 이제 정리가 되고 저는 그냥 서있었습니다. 보니까 상황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저는 그 승무원이 해결하고 나오 길래 “아휴 힘드시겠네요. 애쓰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표를 줬어요. 보니까 역시 딴 사람이 앉아있는 표잖아요. 좀 안돼 보이더라고요. 승무원도 똑같이 근무하고 그러는데 자기가 표 잘못 준 것도 아닌데 괜히 어려움 겪는 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위로해 드렸더니 저를 보더니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프리미엄 퍼스트 석’으로 인도하더라고요. ‘프리미엄 퍼스트 석’은 ‘일반 퍼스트 석’도 아니고 둘러막혀서 혼자 드러누워서 가는 데거든요. 제가 그래서 ‘어려운 사람 위로하면 큰 보답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왜 내 자리 없느냐, 뭐 왜 이렇게 해 놨느냐, 당신들은 왜 이러느냐, 그런 말해서 내가 유익 얻을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그 사람 위로 좀 해줬더니 소리 질렀던 사람은 좋은데 못 앉았어요. 저는 소리도 안 질렀는데 좋은데 앉아서 갔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불친절한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나올 때 꼭 그래요 “오늘 힘든 일이 많으셨나보군요.” 그리고 제가 그냥 봉사료를 조금 드립니다. 그러면 다음에 그 식당가면 그분이 정말 잘 해 주시는 것을 늘 느낍니다. 전에 사무실에서 여기 오기 전에 일을 보시는 분이 있었는데 좀 불친절 했던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분들이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일도 좀 힘든 것 같고 그런 것 같아서 때때로 점심도 자주 사드리고 했더니 저한테 매우 친절하게 잘 해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있는 분들이 뭐라고 했냐면 제가 그분 돈을 빌려줘서 그분이 저한테 잘 해준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돈 빌려준 것도 없고, 점심 몇 번 사드린 것 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울 때 위로해주고, 그저 몇 마디 격려해주면 마음을 사게 되고, 결국 그것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허물 들추고, 어렵게 공격하고, 그 사람의 잘못된 것을 들춰봐야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쁜 것이 없습니다. 위로하고, 힘을 주고, 세워주고, 격려하면서 우리 마음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쁘고 감사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 질수 있는 이유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일 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을 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가 돋보여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즐비해서 같이 즐거워하면 우리는 더 큰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내 주변의 사람 다 못되고 내가 잘되면 더 돋보일 것 같죠? 오히려 더 위험해집니다. 나 혼자 우뚝 솟으면 공격당할 수밖에 없고 더 위험한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줄 때 그분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얻는 것이 최악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최선으로 사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감사히 만들 줄 아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 돼야 합니다. 내 유익보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 우리 때문에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우울한 분 있습니까? 우울함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쁜 일이 되고, 즐거운 일을 하시면 우리는 비교적 덜 우울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4절>을 보면 마음이 약한 자를 안위하고 우리 따라서 합시다.
“마음이 약한 자를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정말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붙들어주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을 때, 결국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은 하나님이 내게 가장 합당한 모습으로 주신 것이니 나는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올해 여러분께 여러 번 강조한 것 같은데 저는 올해 들어서 제 마음에 가장 큰 기쁨으로 받은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수용>과 <누림>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성취해서 내 마음에 원하는 어떤 것을 이루어서 내 마음이 기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고, 기분이 좋아도, 기분이 나빠도, 받을 만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니 이것을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겠다라고 수용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결국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아직도 약해서 충격을 받으면 휘청거릴 수 있지만 그 충격을 흡수하는 약간의 시간 후에 우리는 다시 꿋꿋이 서서 우리의 삶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아픔의 상황들을 수용할 수 있고 아픔의 상황을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누리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누리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마음속에 늘 갈급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누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여유로운 백성입니다. 살아가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늘 상기돼 있어요. 늘 흥분돼 있어요. 그래서 한 번 탁 건드리기만 하면 분노가 폭발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걸리면 한 번 내 손에 혼나봐라.

반면에 항상 평안한 사람이 있어요. 어떠한 충격도 흡수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정말 내게 주어진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더 큰 기쁨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이세상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운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모든 소원을 다 풀어야만 우리는 행복해 질수 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람들이 내게 어찌해도 내 삶의 상황이 어찌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다면 그때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판단해서 항상 어떤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우리 삶이 기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만족할 줄도 알고, 누릴 줄도 알고, 기뻐하여 나눌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익어진 숙성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대적자의 마음도 돌이킬 수 있는 인격과 인내를 소지합시다.
이제 우리를 대적하는 대적자의 마음도 돌이킬 수 있는 인격과 그리고 인격만 가진다고 그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기다려줄 수 있는 이런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참 어려운 것 같죠.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언젠가 그런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깊이 익어진 인내 속에 시련 속에서 정련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형평과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고 행복한 주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지켜 행복한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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