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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초청] 하나인 생명 (창 44: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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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설교말씀제목은 ‘성탄의 작은 시작’이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시작할 엑소더스 운동 열일곱번째를 말씀드렸지요.  ‘미약함의 능력’을 말씀했지요.  그리고 오늘 말씀제목은 ‘하나인 생명’입니다.

초청주일에 즈음하여

우리 교회가 다음 주일에 이웃초청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킵니다.  그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을 포함해서 그동안 우리가 꼭 교회로 인도하려고 하는 분들을 다음 주일에 교회에 초청합니다.  이미 광고된 대로 좋은 간증집회도 있습니다.  성탄축하의 칸타타 찬양집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님들의 따뜻한 사랑의 초대하는 그 분위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번 한 주간 동안에 다음주일에 모실 태신자들, 이웃들을 위한 준비를 집중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열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을 낼 일이 기다리는 것이지요.

시인 안도현(전도연이 아닙니다)의 '연탄재'라는 시에는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번에 우리가 한번 뜨거운 열심을 내어볼 일이 전도의 초청이지요.  이제 이 일에 한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말’입니다.  아니 갑자기 말씀이면 말씀이고 말이면 말이지 말씀과 말이 필요하다니,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제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웃을 초청하는 것은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말씀을 따라 초청하는 우리의 말입니다. 

말씀과 말의 세계로

말씀, 또는 말.  이것은 아주 신기한 것입니다.  말씀, 혹은 말은 그 안에 어떤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말씀의 세계, 또는 말의 세계입니다.  자,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분께서 요한복음1장1-3절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게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자, 우리가 먼저 1절을 읽었습니다만 모든 것이 시작하는 때에 먼저 말씀, 즉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이지요.  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까.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즉 만물, 우주가 다 그 분 안에 있는데 그 분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존재하시는 모습은 말씀, 즉 말, 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 말, 또는 말씀의 모습만 갖고 계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가 그 분의 형상으로 지어질만큼 어떤 형상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그 분의 뒷 모습을 보이신 것처럼 어떤 형상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형상에 매이신 분도 아닙니다.  정말 무소부재,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한 형상으로도 나타나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시니 정말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는 그런 놀라운 분이십니다.  참 하나님 참 사람이신 분이시지요.  그런데 그 분이 태초에 천지를 지으실 때 그 분을 나타내신 아주 중요한 한 표현 방법은 바로 말씀, 즉 말이었습니다. 말.  창세기 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가라사대, 즉 말씀하시되, 빛이 있으라, 고 하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말, 이란 형태로 나타나시면서 빛이 있으라, 고 하실 때 그 빛이 있으라는 말, 그 속에 빛의 세계가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한 번 말을 해 보십시요.  자, 이렇게 말하십시요.  따라하실까요.  우리 교회에 우리 남편이 와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하시는 동시에 여러분은 그 하신 말을 믿어 보십시요. 즉 믿음으로 그 말을 해 보십시요.  우리 교회에 남편이 앉아 있으라.  그렇게 말할 때 믿으면 여러분 말 속에는 믿음의 광경이 함께 창조됩니다. 즉 남편이 지금 교회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한 번 말할 때 그 말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것입니다.  남편이 교회에 앉아 있으라, 는 그 말은 지금 여러분의 갖고 있는 실제의 환경을 넘어서 남편이 앉아 있는 그 예배의 광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과 그 믿음과 그 상상 속에 있는 그 말의 세계에서 남편이 앉아 있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이지요.  말이 창조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말과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말과 함께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그 말을 철수하지 않는 한 남편은 그 말의 세계 속에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말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 말을 도로 거두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고 믿음으로 지키고 있으면 그 말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 그 믿음의 세계를 놓고 기도합니다.  꿈을 지키면서 기도합니다.  그 말, 남편이 교회에 앉아 있으라, 는 그 창조적인 말은 그 말을 지키는 동안 어느 때가 되면 놀라운 결과를 갖고 옵니다.  어느날 정말 남편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첫째 말이 있었습니다. 둘째 믿음이 있었습니다. 셋째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세계를 그리면서 인내하며 말을 하는 우리의 말이 있었습니다.  나의 남편은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는 혼자말 같은 믿음의 말, 그 아멘의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말의 세계 안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남편은 하나의 세계 속에 있습니다. 서로 하나되어서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창조적인 말의 세계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말씀의 세계 속에 빛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 분의 말씀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 분의 말씀 안에 있는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지금 우리를 놀라운 창조의 세계 속에 있게 하고 그리고 그 말씀, 그 말 안에 있는 놀라운 빛의 세계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가 그 분의 말씀에 아멘, 하면서 살면 우리는 그 말씀 안에 있는 놀라운 세계를 풍부히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현실이 되는 세계

우리가 누리는 새로운 세계는 믿음으로 현실이 되는 세계입니다.  바로 믿음의 말씀이 만든 세계입니다.  이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의 세계를 믿으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만 살지 않게 됩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 우주선의 도움, 우주망원경의 도움, 과학의 전진으로 보이는 그런 세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세계를 그대로 다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그 말씀이 지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지어진 모든 세계를 성경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미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주를 안으며 세계를 품으며 천국을 믿으며 그 천국,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하늘 새 땅을 이미 누리게 됩니다.  천국을 믿으니까 천국의 기록된 하늘의 생명수의 강을 믿으면서 그 강물이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넘쳐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환영하며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또한 충만함을 믿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세계를 말씀을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찬송가 343장4절에 보면,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삶을 얻네(이미 주어진 것이니까요 믿으면 얻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우리는 이 놀라운 찬송을 부릅니다.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무엇을 믿습니까. 말입니다. 누구의 말?  하나님의 말, 말씀입니다.  말씀, 그 말을 믿으면 우리는 그 말의 세계 속에서 아, 이런 세계가 준비되어 있구나, 라는 체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믿음의 상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상상 속에서 꿈꾸는 비전들이 우리의 입의 말을 통해서, 즉 나는 믿는다, 그렇게 된다, 그래 내 남편은 반드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그린다, 그래 지금 남편과 나는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한 세계 속에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묶여져 있다,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다, 나는 이제 남편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믿음, 이 세계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그 말의 세계가 이제는 말씀의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말로 창조하라

여러분, 바로 이 말의 세계가 창조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말의 세계를 말로 창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부터 남편, 아내 부모 또는 형제 이웃에 대해서 두가지 말을 해야합니다.  나의 아들은 나와 함께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라고 말하십시요.  이렇게 말하심으로써 다음의 말씀의 세계 속에 있는 우리를 확인할 것입니다.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때 예수님의 권속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던 것같이 우리는 이 말씀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한 은혜를 같이 받을 그 사람들을 먼저 우리의 말, 믿음의 말의 세계 속에서 모아 놓아야 합니다.  다같이 한 곳에….. 바로 이 말씀에 아멘하는 우리의 말의 세계입니다.  우리 가족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라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 그렇게 되고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그 꿈을 말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족이 다같이 한 곳, 우리 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라는 말을 하십시요. 긍정적인 이 말을 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그 세계를 말로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말은 이제 초청의 말입니다. 바로 우리 가족을 이웃을 말로 초청하여서 우리의 그 말씀, 그 말로 만들어진 세계 속에 이끄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꼭 다음 주일에 함께 예배드리는 제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요. 솔직하게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그 말의 세계를 만드시고 그 말의 세계 속으로 초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꿈의 세계’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그 꿈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꿈을 지키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가지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이 말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은 서로 함께 묶여 있지요’라고요.

생명의 결탁을 선언하라

자, 여기서 우리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살자는 결사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얻어야할 가족, 이웃은 그저 그냥 대충해서 얻을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꼭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은 천국가족을 만들고 싶은 그런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진실히 믿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간절히 초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생명이 결탁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각이 한 가족의 헤어짐을 이기고 서로 다시 하나되게 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결탁, 하나인 생명이라는 이 강력한 일체감이 서로 다시 못만날 관계, 다시 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거리가 생긴 사람들 사이에 다시 놀랍게 재회하고 하나되어 다시 함께 같이 살게 되는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서로 헤어질 수 없다는 어떤 놀라운 일체감, 하나된 각오가 들어나면서 함께 같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에서 배움

여러분이 아시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만남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이 서로 다시 만나는 일은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막내아들 베냐민과 요셉은 그들의 어머니가 야곱으로부터 얻은 친아들들, 친형제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이 태어나면서 어머니 라헬은 산고로 죽습니다.  이 때문에 두 형제는 각별한 사이로 자라납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각별히 사랑하는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을 꿉니다.  꿈에 형제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의 별에 절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요셉의 입의 말을 통해서 형제들과 가족에게 알려졌습니다.  요셉은 그 꿈의 세계를 말을 함으로써 말의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요셉의 말은 그대로 믿음의 세계가 되어서 요셉에게 간직되었으나 형제들은 화가났습니다. 시기합니다. 그 말의 세계를 깨뜨리려고 결국 요셉을 들에서 구덩이에 던져서 죽게하려다가 다시 꺼내어 애굽에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의 말의 세계, 그 꿈대로 말한 세계는 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의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가지고 말하기를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아버지 야곱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을 요셉같이 생각하고 아끼고 또 아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고 온 애굽 땅에도 흉년이 들었을 때 요셉은 이미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된 줄 모르는 형제들이 곡식을 구하려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그 형제들을 알아보았으나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높은 권세에 오른 애굽의 국무총리가 설마 자기들이 팔아 넘긴 요셉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요셉은 한편으로는 형제와 가족을 돕기 시작합니다. 곡식을 팔면서도 곡식 대금은 몰래 그들의 보따리에 넣어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형제들이 정말 자기를 팔아 넘긴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고 있는지, 또한 자기의 동생 베냐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를 저울질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애굽에 곡식사러 온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몹니다.  아니, 아닙니다. 우리가 열두형제가 있는데 하나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더 몰아부칩니다.  너희가 정말 정탐꾼이다, 아니라면 그 막내라는 동생을 데려오라, 아니면 여기 있는 너희 형제중 하나를 감옥에 가둘터인데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덩이에 던져 넣는 일, 애굽에 파는 일에 앞장섰던 형 시므온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곡식을 얻어서 고향에 돌아갔으나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하니 아버지가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죽음도 형제들이 죽인 것 아닌가, 라는 의심이 있던터라 베냐민까지 죽이려고 드나, 하는 생각에 내놓지 않습니다.  결국 기근이 심해지니 아들중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아무래도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시므온도 구할 수 없고 곡식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베냐민을 데려가야 합니다.
다만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대속의 주님, 그 죽으심의 각오

여기서부터 이른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예고하는 속죄의 죽음의 각오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다가 한 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창43: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로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라고 할 때에 담보(히, 아라브)라는 말의 원뜻은, (마치 물물교환에서 처럼) 무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베냐민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내놓은 목숨을 다시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담보라는 말은 유다지파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실 예언이기도 합니다.  바로 속죄의 죽음을 각오하는 말입니다.  베냐민 대신 내가 죽겠습니다.  이 일체감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깊은 결심이 있습니다. 서로의 생명이 결탁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가기를 허락하였고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다시 애굽에 내려갑니다.  그리고 요셉인지 모르는 가운데 요셉 국무총리를 다시 만납니다.  요셉은 짐짓 형제들을 떠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곡식을 사서 돌아갈 때 다시 곡식대금을 몰래 그들의 자루에 넣어주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기의 은잔을 몰래 넣어 놓게끔 부하를 시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형제들을 추격해서 다시 도둑으로 몰아세웁니다.  은잔이 나오는 자루의 주인공을 감옥에 넣기로 했는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옵니다. 형제들은 기가 막혀서 요셉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백함을 호소하면서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즉 총리님)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 때 요셉 국무총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17절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기회를 주는 말입니다.  요셉이 테스트하는 것은 그들이 전에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것 같이 자기들을 위해서 베냐민을 버리는지 아닌지를 보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일체감을 갖고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지요.  이 때 유다가 다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27절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절 하나는 내게서 나간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찣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절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유다는 바로 여기서 아버지의 베냐민에 대한 깊은 사랑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30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31절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 말은 지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결탁(카솨르)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뜻으로는 ‘단단히 묶여져 하나가 되었다’는 것으로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단단히 하나로 묶여져 나뉘어 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생사를 같이 할 그런 사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his life is closely bound up with the boy’s life).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이
서로에게 묶여져서 생사를 같이 할 각오가 되어있을 정도로 하나라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하나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생명은 결탁되었다

야곱과 베냐민의 하나됨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과 하나이십니다.  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베냐민을 아끼는 아버지 야곱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한 생명으로 여기시고 함께 하나인 몸같이 그렇게 아끼십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어지시는지요.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시는지요.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께서 그대로 계실 수 없으신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와 사망의 사슬에 묶여져서 죽음의 길에 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편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절망적인 감옥에 갇힌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대로 계시겠습니까.  여기에 이 관계에 한 분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기서는 유다가 그 예표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위해서 자기가 대신 감옥에 갇힐 테니 베냐민 만은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이미 유다는 아버지 앞에서 베냐민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과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속자, 속
죄의 제물로서 자기를 바치는 각오를 보입니다. 

32절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34절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아버지와 베냐민을 동시에 위하는 그 마음은 아버지와 베냐민의 생명만 서로 결탁된 하나된 생명이 아니라 자기도 이제 아버지와 그리고 베냐민과 하나인 생명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보이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그 분의 아들을 위해서 내가 대신 죽을 각오입니다, 라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막내아들 같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실 때 그 말씀의 세계 속에서 이미 우리는 그 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말씀 속에서 우리를 지으셨고 그 말씀 안에서 우리를 그 분과 하나로 보시며 모든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주님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시며 대속하시며 구원하시며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게 그렇게 말씀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2:13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가족, 이웃을 주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렇게 믿으시고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려 우리를 그 분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가족은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그런 분들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가족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분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이 말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당신과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살아야한다, 는 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내 가족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상태가 아니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당연히 이곳에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강력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말의 세계 속에서부터 새창조의 은혜가 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다같이 한 곳에 이곳에 우리 교회에 모여있으라.
우리의 생명은 하나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영생해야 한다, 라고 강한 결심을 가지십시요.  이제 저와 여러분은 말로 초청하십시요.  말의 세계에서 먼저 느끼십시요. 
저는 습관적으로 이렇게 혼자 말같이 이렇게 선언하곤 합니다.  글쎄 이것을 기도라고 해야할지 믿음의 선언이라고 해야할지 혼자 독백이라고 해야할지 그러나 저는 자주 감동이 올 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반드시 우리 왕십리 교회에 굉장한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왠지 그렇게 느껴지곤 합니다. 말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를 느끼는 훈련을 하십시요.  그리고 그 느낌 속에서 가족과 이웃을 만나십시요. 너무도 달라질 것입니다.  상대방은 우리가 마치 서로 무언가 새롭게 생명이 하나로 묶여진 어떤 일체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우리의 초청하는 말의 세계로 들어올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려야할 사이예요 꼭 오셔요 함께 예배드려요’, 라고 하시는 그 초청의 세계로 그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인내하시면서 그 말의 세계를 절대 부정적인 말로 철수하지 마십시요. 

함께의 각오와 그 말을 거두어들이지 말라

요셉은 자기의 꿈을 말한 후 그 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시기해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도 또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가도 그는 그가 한 꿈의 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결국 애굽의 지도자요 생명의 구원자요 온 가족까지 그에게 절하는 집안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온 집안의 생명, 생활을 다 책임지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열방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인도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가 한 말, 꿈의 세계, 온 가족이 결국 그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해서 모이는 그 꿈의 세계를 선언한 말을 결코 철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말의 세계를 창조해야합니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이웃, 친구, 친지, 전도해야 할 그 분들을 그 말의 세계, 소망의 세계 속에서 목숨걸고 함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결탁되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니 목숨을 걸고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다는 아내와 남편의 말을 누가 끝까지 거절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삼인의 교회들, 이제 전도를 위해서 서로 파트너와 함께 전도하려고 하시는 여러분에게 이 주간에 꼭 간직할 결심이 이것입니다.  초청하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자 우리는 하나인 생명이니까. 이제 함께 살아야 한다.  이제, 결코 나는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하고 거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십시요.  결탁된 생명들을 찾아서 이번 주간에 기도하시며 초청하십시요.  여러분의 말씀, 그 말하신 세계로 말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
십시요. 

30절  아비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내가 어찌 무책임하게 옆에 빠져서 나 혼자 살 길을 가겠습니까.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서로에게 묶여있거늘….

사랑하는 여러분,
결탁이란 말이 좀 어색하지요? 그러나 이 어색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기억하십시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 결탁되었다. 결코 그냥 버려둘 수 없다, 자, 일어나자 살리자 함께 하자 같이 하자 같이 예배드리는 사이가 반드시 되게 하자 다시 하자 그래 다시 하자 아니, 이미 내 믿음 안에서는 이루어졌다, 우리는 함께 예배드린다. 이 말을 결코 거두지 말자.  이 믿음의 세계를 간직하시면서 이 번 주간에 꼭 여러분의 가족 이웃을 초청하십시요. 그리고 연탄재의 추억보다 나은 뜨거운 열심을 이번 주간부터 한번 내어보십시다.  다음 주일에 바로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히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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