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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는 길 (요일 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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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자”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사랑보다는 미워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으니 이 부분에서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일4:7~21의 본문을 읽기 시작하니까 사랑하지 못한 이유가 보였다.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렇다. 감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자격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리고 죄로 인해 죽을 나를 살리셨다. 자기가 죽음으로써 나를 살려놓으시므로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려 하심이니라.”

결국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사랑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못된 우리가 사랑에 이르는 길은 이러하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한 사랑을 알아야 한다. (요일4:9)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계셨다. 하나님은 나를 먼저 사랑하사 나를 죽음에서 살리시려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신 사건은 가장 큰 사랑의 사건이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 왕은 시골에 사는 자를 사랑한다. 농장에서 일하느라고 얼굴이 검게 타버린 슐라미 여인을 사랑하여 예루살렘 궁중에 있는 많은 여인들보다도 게달의 장막같은 처녀를 사랑한다. 그것이 아가서이다. 그 검은 여인을 왕이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러나 솔로몬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된 나를 사랑하사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게 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신 성탄의 이야기는 설명될 수 있으나 그가 이 세상에 사랑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를 살리고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에 모든 초점이 있다. 엡2:1을 보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나의 악한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 죄와 허물로 죽은 나를 대신하여 그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 자신이 피 흘리셨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플 때 대신 아파하시는 것이다. 내가 무거워할 때 대신 짐을 져 주시는 것이다. 대신 고초를 겪고 희생하시는 것이다.

고대 어느 그리스 왕은 간통, 간음죄를 막으려고 범죄자의 두 눈을 뽑는 법을 공포하였다. 그때 잡혀온 사람은 바로 자기의 아들, 왕세자였다. 온 나라에 소문을 몰고 나간 왕세자의 범법 행위에 대해 왕은 분노했지만 고통스러웠다. ‘내 아들을 어찌할꼬. 그가 눈을 잃고 나면 영원한 암흑 속에 살게 되는데...’ 그렇다고 처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왕은 이렇게 판결한다. “정해진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나는 너의 눈을 뽑겠노라 그러나 또 하나의 눈은 내 눈을 뽑겠노라.” 고통 속에 진행된 왕의 판결은 온 국민을 사랑하고 또한 아들을 사랑하는 왕으로 드러났다. 자기의 희생으로 사랑을 증거한 것이다. 내 곁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두 눈만 뽑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어야만 살릴 수 있다면 대신 죽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먼저 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인지 무지하다. 그래서 난폭하고 내 소견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우긴다. 내 좋을 대로 하고는 사랑이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살리려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그것이 자기 희생, 곧 십자가의 길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사랑을 모르면 나는 사랑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새 생명을 갖지 못했기에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였다. 사랑은 본대로 한다. 아는대로 한다. 죽어주시는 사랑으로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직도 모르고 있니?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둘째,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한 이 사랑을 믿어야 한다. (요일4:16)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하였는데 사랑 안에 거하려면 믿어야 한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다. 사랑은 삶이다. 사랑을 알았으면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누려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의자에 내 몸을 맡기듯 맡기는 것이다. 의심 없이 내 전신을 의자에 내어 맡기듯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에 인생의 삶 전부를 맡기는 것이다. 믿는 것은 사랑의 교제다. 그것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을 믿으면 담대하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으니 두려움도 없고 형벌도 없고 지옥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살려내실 만큼 소중한 나의 삶, 슐라미 여인보다 더 더럽고 더 추하고 게달의 장막같은 죄와 허물의 누더기가 있는 나를 사랑하셔서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 이것을 믿는다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으로 믿는다면 주님의 사랑이 내게 수혈된 것이다. 믿음이란 튜브를 통해 주의 피가 내 속에, 주의 심장이 내 속에 들어온 것이다. 믿는 자는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지 못하고 만입이 있어도 내 구주되신 은총을 다 감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믿어야 한다. 믿지 못하면 그것이 죄이다. 성령이 오시면(요16:8~9) 믿지 아니함을 책망하신다고 하였는데 사랑을 의심하면 그것이 죄이다.

뉴질랜드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있는 권유미 권사는 청년 시절에 친구들과 부산에 놀러 갔었다. 그런데 방파제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물에 빠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조동래 권사는 수영도 못하면서 뛰어들어 생명을 건져 주었다. 여자를 건져 주려고 들어갔지만 헤엄을 치지 못해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발 밑에 말뚝이 받혀 주었다. 누군가가 박아놓은 말뚝이 그 발을 받혀주어 살아났고 한 여자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 결국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사랑은 믿어야 한다. 그때 살맛이 나고 존재하는 것이 기쁨이 된다. 나를 사랑해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그 십자가가 죄의 바다에서 빠져 죽는 나를 구원하고 내 실족한 발을 받혀주는 안전 발판으로 되어 있기에 우리는 살아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나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허물을 덮는 사랑의 전도사가 될 수 있다.

셋째, 나를 먼저 사랑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으라. (요일4:13)

요일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을 누리고 있음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을 받으므로 우리는 확증을 갖게 되고 담대하게 되어 사랑의 삶을 산다. 성령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우리는 미워하는 삶이 지배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크리스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 크리스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 계명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게 된다. 그의 성령을 부어달라고 하자. 나는 구원을 받았어도 내 안에 있는 죄가 내 안에 내재하여 있다. 은혜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면 이 죄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누리는 사랑 충만을 밀어내고 교만, 이기심, 의심, 세상 사랑을 가져오게 한다. 그래서 미워하고 다툰다.

보혜사 성령을 사모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는 크리스챤이 되자.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이요(요일4:12) 사랑의 실천이 크리스챤의 마땅한 길이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믿고 행동으로 나타내자. 손양원 목사님처럼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교회와 가정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자.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며 손을 내미는 것으로 내가 먼저 실천하자. 성령을 부어주시면 사랑 충만하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랑만이 아니고 작은 짐승의 생명까지라도 깊은 산에 사는 벌레 생명까지라도 사랑하자. 사랑받으면 사랑을 나누면 누구든지 변한다.

나는 중3때 콩쿨 대회를 나갔다. 선생님께 집안 일이 있다고 속이고 개근상 받는 것에 이상이 없도록 약속을 받고 조퇴하여 시민관에 갔다. 내 차례가 되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가서 심사 위원께 인사하고 노래를 하려는데 담임선생님이 거기에 와 계셨다. 마이크를 잡고 ‘고향 무정’을 부르는데 딩동댕을 안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서 매 맞을 것을 각오하고 옷을 입고 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담임선생님은 나를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신다. 가을이 되어 소풍을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제천의 명가수를 소개한다고 나를 부르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그 덮어준 사랑, 그 사랑에 감동을 받는다.

고마우신 선생님! 꼭 찾고 싶은 선생님이다. 강림절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사랑의 실천을 오늘 저녁에 보여주고 집으로 돌아가 한 가지씩 적용하며 아름다운 2006년을 마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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