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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딤후 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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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딤후 4 : 9 - 21
제 목 :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상담학을 전공한 김경수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독설 - 아버지는 축복의 전도사” 라는 책인데요, 이 책에서 그 목사님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축복을 전달하는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버지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독설을 퍼붓고 있다. 그 독설을 쏟아낼 때 아버지는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그 독설을 들이마시는 가족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병들어 간다.” 

요즘 심심찮게 뉴스를 통해 보도 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폭력 가장에 대한 살인입니다.  자녀가, 아니면 부인이, 심지어는 딸과 부인이 공모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을 죽인 사건들이, 요즘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서로가 가장 사랑해야 될 가정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특히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내를 때리는 남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내는 연약한 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그릇을 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육체가 깨어지고, 인격이 깨어지고, 심지어는 영혼까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장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 그런 일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남편이 폭력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지적하는 문제는, 이런 육체를 향한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 폭력만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상처를 주는, 언어적인 폭력을 가하는 가장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기 기분에 내키는 대로 함부로 말을 하다 보니까, 아내가 상처를 받고, 자녀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 언어폭력에 의한 마음의 상처는, 육체적인 폭력에 의해 발생한 상처와 같이,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이는 평생을 가슴에 상처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살아가면서 말에나 행동에나 항상 조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경 말씀 한 절 더 찾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딤전 4 : 12 - 16까지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찾아서 한절씩 교독하지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 의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할렐루야!!!!!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한 권면의 말씀인데요, 이는 우리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권면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성도라고 하는 신분에 대해,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조심하여, 세상에 대하여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삶을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게 될 때,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한번 따라 합시다.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믿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말과 행동 여하에 따라, 이렇게 우리 주변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능력있는 삶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남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세워 줄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속한 이 성천 교회의 신앙 공동체 속에서도 서로에게 복이 되고, 기쁨이 되어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 찬양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 찬양인데요.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  할렐루야!!!! 
이런 귀한 축복의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 주변에도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까지는, 우리의 절실한 노력이 필요한 데,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백번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적과 싸워서 승리하기 전에, 나를 먼저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런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이런 하나님의 기대와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결코 이루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의 모습,  세상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가정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유익을 주는, 그런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아왔는지, 이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입니다.  이제 12월도 중반을 넘어 가면서, 계절도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요,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이 한창 바쁘게  지내지 않습니까?  왜 바쁩니까?  월동준비하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기름도 채워 넣어야지요, 김장 김치도 지금 담궈야 합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이처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부분들을 점검하며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오게 마련인데, 세월의 흐름에 무감각하게 지내다 보면, 장차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채 허무하고,  초라한 인생으로 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남은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겠습니까?  또 무슨 양식을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성령의 기름을 채워 넣고, 우리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채워 넣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 성령의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까?
성령의 기름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는 인생에 암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에 겨울이 닥치면, 추위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양식은 또 무엇입니까?  요 4 : 34절에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했습니다. 단순한 하나님 말씀이 양식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 가운데서 지켜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을 살찌우게 하는 양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내 신앙 가운데 반드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게 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라고 했어요.  오늘 바울이 말한 겨울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첫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겨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죽음이 이제 가까이 다가 왔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계절을 4단계로 나누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4계절로 나눕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노년기, 이제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아니한 때는, 계절로 치면 어느 계절이겠습니까?  바로 겨울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의 나이가 칠십이 넘은 때였어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 이라고 모세가  말을 했는데, 바울의 나이 칠십이 넘었다면,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나이입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겨울은, 이런 자연적인 노쇠현상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강압적인 죽음, 곧 순교의 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봐서, 바울은 이제 머지않아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이 겨울이 지나가게 되면, 내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예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느 사람과 같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아니 했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4 : 6절을 보세요. “내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교함으로 자신의 인생이 이제 마감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성도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사람이 죽으면 인생은 끝이 납니다.  자연사이든, 순교이든, 이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이켜 봅니다.  주마등과 같이 자신이  지나 온 인생길이, 스쳐 지나갔을 줄로 압니다.  한때는 예수를 배척함으로  후회함이 있는 인생을 살아갔지만,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후로, 그는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천국에서의  자랑스런 면류관을 받은 소망만이 남아 있습니다.  참으로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4 : 7 - 8절을 보세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얼마나 멋진 신앙의 고백입니까? 

이런 자신의 고백과 같이,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라고 하는 이 말씀은, 단순히 디모데를 향한 인간적인 정에 의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인생의 신앙적 충고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도, 자신과 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인생의 겨울이 닥쳐오는 그 시점에 이를 때에, 이런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갔음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라고 하는, 신앙적 권면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에도, 언젠가는 이처럼 겨울이  닥쳐오게 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울과 같이 자신의 인생에 겨울이 언제 닥쳐올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바울과 같이 순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인생의 앞날을 짐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일 일은 난 모르며 살아갑니다.  내일 일이 뭡니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사람이 날 때는 순서가 있다고 하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바울과 같은 멋진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에 성령의 충만함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인생에 있어 이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을 예비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장차 영원한 저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면류관을 예비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교회에 적을 둔  교역자들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나 이루는 것이지, 자신들은 세상에 바빠서,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 25장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같습니다.  신랑을 맞을 때가  이제 멀지 않았는데, 등에 기름이 떨어져 가는지도 모르고 잠에 취해 있다가  등불을 꺼트려, 신랑은 만나지도 못하고 혼인 잔치의 문은 닫혀 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로, 자신의 신앙의 등불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늘 기도함으로 성령의 기름을 채워 넣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겨울을  당황함 없이 대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필요합니다.  돈이 많아야 이 세상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또 어느 정도 지위나 명예도 필요합니다.  권력이 있어야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또 건강도 필요하지요.  건강해야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운동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너무나도 할 일들이 많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고, 다 이룬다고 할지라도, 평소에  신앙생활을 등한시하며 게을리 해서, 신앙의 등불을 결국 꺼뜨리고 만다면, 그 인생의 최후는 초라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 추한 모습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죽기 싫어서 병 중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입니까?  자신의 죽음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예요. 이제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자신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지요. 
여러분, 똑같은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경우는 참 우습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도들이 가난할 때는,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은,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동차 보험을 넣는데, 돈이 없으니까 책임  보험만 넣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핸들을 지켜 주시면  사고 없이 안전하게 잘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고 없이 안전하게 운전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건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완전히 맡깁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나 가족 중에 큰 병에 걸리면 목돈이 들어가게 됩니다.  보험이나  들었으면 다행인데, 보험들 돈도 아까워서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지켜 주심으로, 모두가 건강하게 잘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주어진 직분을 따라 헌신하며  봉사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분들이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요해지지 않습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 중에는 이 때부터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신앙생활에 열심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상실해 버립니다.  돈이 많으니까, 그 돈으로 사고 나도 안전할 수 있는 자동차를 삽니다.  건강도 얼마나 조심하는지, 병 걸려 죽을까봐 유기농 야채만 먹고, 헬스클럽이다 에어로빅이다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얼마나 챙기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도우심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자, 이런 분들이 나중에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과연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으로 여기며 찬송 중에, 기도 중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한 순간으로 더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인생이요, 부끄러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또 자신의 건강 챙기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해 놓는다고 오래 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믿습니까? 

어떤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한 레스또랑을 정해 놓고 점심은 꼭 그 집에서 식사를 합니다.  식당과 미리 계약을 해서, 자신이 먹는 점심은  천연 유기농으로 지은 쌀과 야채, 고기만을 이용해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꼼꼼하게 따져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건강을 챙기던 사람이 나이 50도 안 돼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병에 걸려서 죽었습니까?  아니요.  점심 식사를 하고 문을 나서 길을 걸어가다가, 그만 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고 헛 일 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겨울은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항상 깨어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언제 죽음이 닥쳐와도 당황하지 않고,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시 36 : 9절에 보면,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했습니다.  생명은 주께 있는 줄 알고, 성령의 기름을 채워 넣어 신앙의 등불에 불을 밝히게 되면,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며, 인생을 계속해서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겨울, 곧 죽음이 언제 어디서 닥쳐온다 할지라도, 신앙으로 잘 예비하는 가운데, 장차 바울과 같은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늘 바울이 말한  겨울의 두 번째 뜻은 무엇입니까?  그 두 번째의 뜻은, 인간관계에 대한 겨울입니다.  다시 말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기 전에” 라는 뜻이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의 바울이 처한 모습이 어떻습니까? 

이제 나이 들어 힘들고 외로운 때입니다.  지난날의 혈기 왕성한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제는 힘없어 초라하게 늙은 바울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때에, 바울은 자신이 이제까지 교제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마지막 21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온통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하면서,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까?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리하며 수정해 나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바울이 먼저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누구누구입니까? 한 사람은 데마이고, 또 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두 사람 다, 바울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데마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대로, 바울을 스스로 떠나간 사람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바울과 동역하던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1차 전도 여행 때에 옥에 갇히자 자신도 옥에 갇힐까 두려워해서, 바울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평소의 바울의 성격 같으면 생각도 안했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에게 가장 먼저 떠 올려지고 있는 이름이 누구입니까?  바로 데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겠습니까?  이제는 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배신감도 느끼고, 서운한 감정도 많았겠지만, 그래서 다시는 상종도 하기 싫은 사람이었지만, 그 때 그 상황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를 먼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10절의 말씀 속에서 이런 바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흔히 말을 하지요?  신앙의 철이 들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신앙의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남을 생각하며 배려할 줄 아는 신앙, 이런 신앙이 성숙한 신앙이요, 철들은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데마를 떠 올리면서, 자신이 오히려 옹졸했음을 후회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세요.  사람마다 신앙의 크기가 다 다릅니다.  믿음의 크기 다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지요.  신앙이 크고 앞섰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닌, 자신의 신앙 관점으로 데마를 판단하고 배신자라고 낙인찍었던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바울이 거론하고 있습니까?  마가입니다.  데마는 스스로 바울을  떠났던 사람이라면, 마가는 바울이 스스로 떠나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마가를 떠나 보냈을까요?  데마와 마찬가지로, 한 때 바울의 사역을 돕지 않고 떠나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로 인해 바울은 바나바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용납하고 같이 사역을 하고자 했지만, 바울은 마가를 용납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다툰 후에 헤어지게 되었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향했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로 떠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마가를, 이제 바울이 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제는 마가를 유익한 자라고, 복음 전파 사역에도 유익하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도 유익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이 마가의 이름을 떠 올리면서, 분명 바나바의 이름도 떠 올렸을 것이 틀림이 없는데, 바나바를 떠올리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바나바의 신앙에 다시 한번 고개 숙였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바나바와 다툴 때, 바울은 바나바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신의 신앙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사실 바울도 원래 바울이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과의 만남 이후에  바울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도로서 사역을 시작할 때  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바나바의 도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전에 한 일을  생각한다면, 당장 돌로 쳐 죽여도 시원찮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나바의 간절한 기도와 요청 때문에, 바울이 공회 앞에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회 앞에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전력이 있는 바울일진데, 그래서 자신도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누군들 용납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보면 자신보다 다 나은  사람일 수가 있는데, 바울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데마를 용납하질 못했고, 마가를 용서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옹졸함과 잘못되어진 판단을 뒤 늦게 후회하면서, 이제 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러한 바울의 심정을 또 다시 느껴 볼 수가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잘못된 것이 있지만,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이 이제는 성숙해진,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바울의 이러한 면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맺는 것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맺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구나.”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한 치의 후회함이 없다고 자랑했던 바울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공언했던 바울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인생의 말년에 와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며 교훈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은, 자신과 같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며, 남은 생애를 살아가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냉각되어 얼어붙기 전에, 어서 가서 먼저 손을 내 밀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관계를 회복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데마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어, 그저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며 용서를 빌고 있지만, 마가는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꼭 데려 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찾아 가서 용서를 구하고, 서로 막힌 마음을 풀고 화해하기를 원했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리하지를 못할 형편이기에, 디모데를 통해 꼭 데려 오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과 같은 때 늦은 후회를 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어붙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며,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이해를 구할 것은 이해를 구하는 가운데, 서로의 마음을 풀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우리는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좀 서운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이제는 바울과 같이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먼저 찾아가 문안하며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우리는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니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아직까지도 풀지 못한 응어리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가슴에 맺힌 모든  응어리를 다 풀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 해가 가기 전에, 그러한 감정을 다 풀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마 16 :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말에는 이런 권세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의 마음을 푸는 용서의 말, 이해의 말, 축복의 말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미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회란 언제나 있지를 않습니다.  지금 내가 보는 사람 내일도 내가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볼 수 없을 수도 있고, 그가 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겨울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매일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이 어느 순간엔가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며 살아가시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죽음이라는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힘 있게 신앙생활 해 나가시고,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용서를 구하고, 화합하는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의 남은 인생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통로가 되어, 더 큰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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