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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기있는 처녀같이 되어라!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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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를 여러 가지로, 다양한 소제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천국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셔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여자가 결혼 후에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은 토요일 저녁에 그녀가 남편과 함께 술집에 가는 것을 중지했을 때 분노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먼저 그녀가 남편에게 불순종한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많은 기도와 말씀의 묵상 후에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내가 이제 크리스천이며 내가 가서는 안 될 장소들이 있음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에게 순종하려고 합니다. 만일 당신이 토요일 밤 당신과 함께 술집에 나도 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면 가겠어요. 내 옆에서 당신이 옳은 행동을 하시리라고 믿어요.” “정말이요.” “정말이지요.” “그럼 좋소. 나는 토요일 밤 당신과 함께 가기를 원하오.”

그 토요일 밤 그녀는 진지한 기도로써 버티며 그녀는 술집에서 술집으로 남편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온화하고 조용한 기분으로 남편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음주에나 점잖지 못한 이야기들에 끼지 않으면서 남편의 친구들에게도 친절히 대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는 그 후 다시는 술집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녀의 조용한 순종은 남편이 자신을 꾸짖게 되고 드디어 그 남편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슬기로운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아름다운 슬기로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신랑은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셨고, 처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를 가리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 미련한 처녀 같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moros”라는 말입니다. “모로스”라는 말은 “센스 없이 사악하게 굴고, 어리석게 구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대책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 딴에는 똑똑한 척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대책이 서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혼자 똑똑하고, 혼자 의롭고, 혼자 잘하고, 혼자 훌륭하고, 혼자 잘났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대책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영어성경 The Message에는 미련한 처녀를 “The silly virgins”로 번역했습니다. “멍청한 처녀, 노망한 처녀, 망령된 처녀”로 표현했습니다.

1) 미련한 자 들도 모양은 낼 줄 압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 같습니다. 미련한 처녀들도 슬기로운 처녀들과 똑 같은 등을 준비했습니다. 모양새는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형식은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예배당을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그 안에서 성례식이 집행이 됩니다. 예배가 드려집니다. 전도도 합니다. 구제도 합니다. 선교사도 파송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습 세례를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교회의 각 부서에서 열심을 냅니다. 헌금 생활, 전도생활, 구제생활, 금식기도도 곧잘 합니다. 어디 내 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교회생활을 잘합니다. 여기까지는 가라지와 알곡,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표가 나지 않았습니다.

1,453년 회교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와 함께 중세 기독교의 성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발칸인 들이 앞으로 수세기동안 크리스천의 지배를 받느냐 회교지배를 받느냐의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했는데도 교회의 사제들이 모여서 성모마리아상의 눈의 색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천사는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성수에 파리가 빠져죽었는데 성수가 오염됐느냐, 파리가 성화됐느냐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결국은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1917년 겨울 레닌의 귀국으로 공산혁명군대가 모스크바를 쳐들어와 세상이 뒤집히고 기독교 왕족과 부자와 승려와 군벌등 125만 명이 시베리아로 피난가다 죽고 기독교의 뿌리가 뽑히는 마당에 모스크바의 한 목사(사제) 회의에서는 까운의 후드 색에 관한 문제와 축도할 때 손가락을 어떤 모양으로 펼 것인가에 대해 두시간반을 싸웠습니다. 한국의 교회 회의는 어떤가?

문제는 기다리던 신랑이 대낮에 오지 않았습니다. 대낮에 왔더라면 하등의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신랑은 미련하지 않고 슬기로웠으므로 대낮에 오지 않았습니다. 대낮에 오면은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를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미련한 자 들은 예비치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미련한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은 대낮에는 필요 없었습니다. 한밤중에 필요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고 잦습니다.  졸고 자는 사이에 등의 기름은 다 닳았습니다.

한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하매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10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등에 기름이 닳았으므로 등불이 꺼져 갑니다. 이제 표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3) 미련한 자 들은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6-8)고 말했습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는 부탁은 말이 되지 않는 미련함의 극치였습니다. 한 밤중에 신랑을 맞으면서 기름이 없어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하는 것은 미련 그 자체였습니다. 불가능한 억지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자들의 어거지나 억지가 통할 때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통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처녀가 신랑을 맞이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천하에 어떤 방법으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당도한 후에 기름을 사기 위해 주유소에 갔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시간에는 절대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가 신랑을 맞이하는 겁니다. 게으른 자 석양에 바쁘다고 신랑이 당도한 후에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오늘날 미련한 교인들은 신랑을 맞이하는 주의 날 예배시간에 사고팔러 갑니다. 먹고 마시러 갑니다. 취하고 놀러 갑니다. 땀 흘리고 단련하러 갑니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일 겁니다. 돈벌이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 미련한 자들은 중언부언했습니다.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혼인집 대문이 닫혔습니다. “그 후에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11)라고 외쳤습니다. 미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은 기도라기보다 중언부언이었습니다. 신세타령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시간에 깨달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축복의 문이 이미 닫힌 후에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절대 마지막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갈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노망한 처녀의 최후는 너무나 허망했습니다. 노망한 교인들의 최종적인 모습일 수 있습니다.

2. 슬기 있는 처녀 같아야 합니다.

“슬기롭다”는 말은 “phronimos”라는 말은 “생각이 깊다. 사려가 깊다. 주의를 기울이다. 바른 마음을 가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분한 생각이 있는 여자와 덜렁대는 여자는 하늘과 땅차이가 있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는 노망한 처녀가 아니라 실속 있는 알찬 처녀”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1) 슬기 있는 자들은 미리 준비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릇에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볼 때는 번거롭고, 귀찮고, 청성스럽고, 하찮아 보였습니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닙니다. 주일을 꼭꼭 지키고, 헌금을 꼬박 꼬박하고, 새벽기도를 생활화하고, 철야기도를 주기적으로 하고, 봉사생활을 끊임없이 하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그러한 준비가 능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준비는 평안할 때 하는 것이지 어려울 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환난 중에는 불가능합니다.

2) 슬기 있는 자들은 즐거움에 동참합니다.

슬기 있는 자, 지혜로운 자, 은혜로운 자, 능력 있는 자에게는 절대 문이 닫히는 법이 없습니다. 아름답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항상 문이 열려있듯이 슬기로운 교회에는 축복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슬기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축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처녀가 신랑과 잔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 서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주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경보를 듣고 경계심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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