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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기회를 붙잡고 사셨습니까? (마 1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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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의 작가로도 잘 알려진 나다나엘 호손의 "데이비드 스완"이라는 단편집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게 되면, 스무 살 난 스완이라는 청년이 고향을 떠나 보스턴으로 취직을 하러 길을 가다가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샘터 옆에 누워 단잠에 빠져있는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가 자는 동안 잠시 뒤 숲을 지나던 마차가 바퀴 고장으로 멈췄고 마차에서 내린 나이 지긋한 부자 상인 부부가 햇빛을 피하다가 평화롭게 잠든 데이비드를 발견을 합니다. 잠자는 스완의 모습이 자기의 죽은 아들과 비슷한 것을 보고 아들을 삼으려다 그의 하인이 "떠나실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생각을 거두고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그 다음 사랑을 찾는 어여쁜 소녀가 그의 곁을 지나가다 그때 벌이 데이비드의 눈꺼풀에 앉으려 하자 소녀는 손수건으로 벌을 쫓아낸 뒤 그를 흘낏 훔쳐보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근방에서 번창하는 상인이었고 마침 데이비드 같은 젊은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약 데이비드가 그녀와 아는 사이가 되었다면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데이비드는 깨지 않았고 소녀는 아쉬운 걸음으로 떠나갑니다. 그녀가 떠난 후 두 악당이 스완의 보따리를 가져가려고 접근을 합니다. 만일 그가 깨면 처치하려고 비수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고 한 사람은 꾸러미를 뒤지는데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샘물을 핥아먹자 혹시 개의 주인이 올까봐 그들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잠들어 있을 동안에 그는 부자가 될 기회, 사랑을 만날 기회, 그리고 그가 도둑맞을 기회, 혹은 살해당할 기회들이 계속 지나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그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런 기회들을 알 수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 나라 비유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조금은 늦었지만, 자기 앞에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한 농부는 오랜 세월 자신의 주어진 이 환경을 체념하듯 남의 밭을 빌려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 아닙니까? 또 진주를 구하는 사람 역시 수많은 기회를 찾으려고 다녔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농부가 그 가치를 알지 못했다면, 상인이 귀한 진주를 보았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몰랐다면 모든 것을 팔아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가치의 인식이 바로 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기억해 주십시오. "어떤 기회를 붙잡고 사셨습니까?" 자! 우리 역시 이 한해를 살아오면서 우리 역시 수많은 기회들을 만나고 살았지만, 그 기회들을 놓치고 살 때가 없었는지요? 이제 우리도 이 한해를 보내면서 각성할 것이 있고 또 결단할 것이 있습니다.

1. 먼저 우리는 무엇을 각성해야합니까? 누구나 2006년도 한해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어떤 목표들이 여러분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 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 농부를 보세요. 수세기 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던 보화를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보화를 조용히 도로 파묻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속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농부는 결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보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보화가 묻혀 있는 그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막상 자신의 것을 팔려고 하니 비록 볼품은 없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지니고 온 그 손때 묻은 것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다 간직하고 소유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모두가 사연이 있는 물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갑자기 집에 들어와 미친 사람처럼 이것, 저것을 다 청산하려는 남편의 행동 앞에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미친 사람 소리 들으며 가장 소중한 것까지 팔아버리는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소유한 기억과 사연, 값나가는 모든 물건보다도 밭에 있는 보물이 훨씬 더 가치 가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진주장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찾던 값진 진주를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주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 겨우 살 만한 것입니다. 어쩌면 돈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는 고가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비장의 진주들을 봅니다. 돈이 아니라 일평생 수집한 골동품과 같은 것입니다. 진주 하나하나에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죽음의 위기도 넘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팔 수가 없는 돈 이상의 가치를 포함한 바로 자신의 지난날을 설명해주는 보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진주를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진주를 삽니다.

이 비유를 들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죄로부터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더불어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동행해주시는 것의 가치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요한복음 1: 9-11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왔지만 그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스스로 구원의 길을 버렸습니다. 뭐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또 사명도 허락하셨는데 내게 주신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살았는지는 아닌 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그 가치를 너무 적다고 묻어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은 것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섬기기에 꼭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혹은 내가 받은 달란트는 하나밖에 안되니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아서 묻어 두는 분은 없습니까? 사실 한 달란트를 묻어두는 것도 비극인데 우리 가운데 다섯 혹은 두 달란트를 묻어두는 사람은 없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더 큰 비극이겠습니까? 실패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주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을병에서 고쳐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요. 쓸모없는 나를 지금까지 살려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우리가 처음부터 메마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감격도 있었고 헌신의 수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무기력합니다. 에배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엇입니까?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계2: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인간의 모든 사랑은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뜨거운 첫 사랑도 식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주님 사랑, 성도 사랑도 그렇게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지했던 그 따끈했던 사랑도 언제인가부터 식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진리의 정통성을 사수하려고 타인들의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감시하면서 서로간의 불신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게 믿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균형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놓칠 수가 있고,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을 놓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것으로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없는 진리는 결국 인간을 진리게(질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첫 사랑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 가는 부부들에게 상담자들은 종종 추억 여행을 권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첫 키스를 나누었던 곳, 프로포즈를 했던 곳-이런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문득 그 첫 사랑의 감회를 되찾고 우리의 사랑의 언약을 기억해 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 곳으로 기도의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주님에게 드렸던 약속과 결단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언약, 그 결심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봉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통하던 그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부부 사랑의 식어감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부부의 의사소통의 상실로 지적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열정을 상실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도 주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지적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슨 큰일을 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에게 차라리 한가지 일 주님 바라보는 일에 집중했던 마리아에게 너는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신 바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나라를 바로 대하게 됩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바로 대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 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주는 유익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제 여기 농부나 상인처럼 우리 역시 결단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 44절에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또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난 사람도 어떻게 했습니까?` 46절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투자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했습니다. 올인(All in)입니다. 신앙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그냥 심심풀이 한 번 해보는 것 아닙니다. 인생전체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삶에 구원의 가치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데 대한 가치를 알고 내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기 재산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자들의 밥이 된다할지라도, 왕궁 뜰의 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어 죽어간다 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간직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해의 출발을 그냥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살아온 것 사실입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생 목표를 바로 정하고 달려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그는 환호하듯이 외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바에는 우리가 그런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 다 먼지 속에 파묻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그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은 다 심판 받아 없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하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분이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았느냐 바로 살지 못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목표를 정했다면 그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를 치고 마지막에 가서 찬양할 수 있는 목표라야 하지, 중간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일과 끝까지 붙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란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람이요,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와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이란 결국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다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놓쳐버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와서 발을 붙들어 줄테니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사람들이 놀라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와서 발을 붙들어 준,s 일은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을 통하여 얻어지는 영광은 헛된 영광으로 끝나지 붙잡아 둘 수 있는 참된 영광이 아닙니다. 사탄은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는 헛된 영광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붙잡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결코 놓쳐서는 안될 십자가를 놓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붙잡을 수 없는 헛된 영광을 버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십자가를 붙잡으심으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붙잡아야할 것을 붙잡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이 농부가, 상인이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도 미루었다면, 다시는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에는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12월 달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2006년도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기회는 그 때 붙잡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히말라야산맥에 가면 "날 새면 집 지으리"라는 이름도 희한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집이 없이 평생을 사는 새입니다. 이 새는 놀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햇빛이 비취는 낮에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 새는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아서 애절하게 울기 시작합니다. "날 새면 집 지으리~" "날 새면 집 지으리~" 그러다가 날이 새고 햇빛이 비치면, 또 노래하고 춤추고 다른 새들하고 놉니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면 찬바람 몰아치며 기온이 뚝 떨어지면 날개를 펴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아서 또 울부짖습니다. "날 새면 집 지으리~" 평생토록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얼어 죽는 새가 바로 '날 새면 집 지으리'라는 새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썩어 버릴 명예와 썩어 버릴 부요, 잠시 이 순간 밖에는 나에게 의미가 될 수밖에 없는 헛되고 헛된 그것들을 붙들고 그것들을 위해서만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한해의 끝자락에서 반드시 자신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원히 있을 그것, 하나님 앞에 인정되는 그 삶을 위해서 정말 영원한 투자 속에, 영원한 선택 속에 인생을 살고 있는지, 이 보든 것을 위해 농부나 상인처럼 이 땅의 지위, 이 땅에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들이 잠시 잃어 버려진다 해도 과감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을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몇 해 전 미국 오클라호마 시내의 큰 아파트에서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소방관의 도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아기가 방에 있다며 아파트로 들어가야 한다고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 속으로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미친 듯이 울며 아이를 구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때 한 체구 좋은 소방관이 사다리를 타고 여인의 집으로 올라갔고,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방안에는 불길과 더불어 연기가 가득했습니다.―에 침대 속 이불에 싸여있는 아기를 안고 조심스럽게 창문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내려오는 소방관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받아든 여인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아니라 인형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가치 없는 인형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가치 없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진정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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