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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만찬 (마 26: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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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일과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때는 “무교절의 첫 날”이었습니다. 무교절은 니산월 15일에 시작하여 21일까지 일주일간 지속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무교절 첫 날에 유월절 잔치를 먹었습니다. 식사 중에는 누룩 없는 빵과 양고기와 쓴 나물을 먹으며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인 니산월 14일에 만찬을 하셨습니다(요 18:28). 그럼에도 마태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언급한 것은 유월절까지를 뭉뚱그려 무교절로 부르곤 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예비하기 원하시는지 물었습니다(17).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예비했습니다(18). 유월절인 니산월 14일은 목요일 해지기 전까지이고, 같은 목요일이지만 해가 저물면 니산월 15일로 무교절이 시작 됩니다. 유대인 월력은 해진 후부터 다음날 해지기까지를 하루로 보기 때문에, 태양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대인 월력에 따른 날짜 계산에 대한 감각이 둔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유월절 양을 잡기 전인 니산월 14일 곧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모이셔서 “저물 때에”(20) 양 고기가 빠진 식사를 하셨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모두 탁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왼팔 상박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는 옆 사람 뒤쪽으로 뻗어서, 앉은 것 같기도 하고 비스듬히 누운 것 같기도 한 모양으로 식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모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요 13:23).

식사 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배신할 자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 제자들은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에 모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주여 내니이까”(22)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3)고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에게 배반을 당하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이라는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갑자기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아시고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성경에 예언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반자에 대해서는 몹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위치라면 12제자들 중에서도 가까이에 누운 몇 사람으로 한정될 것입니다. 주님은 직접적으로 배반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유다로 하여금 주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랍비여 내니이까”(25)라고 물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모두 근심하며 그렇게 묻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의심을 받으니까 똑같이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에서조차 뻔뻔스럽게 자신의 양심을 속였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구원 받는 자들은 열 한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떨며 자신을 살핍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혹시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까 근심합니다. 그들은 연약하지만 주님 앞에 진실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주님 앞에서조차 거짓됩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모든 제자들과 유다 사이에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주여”라고 한 반면 유다만 “랍비여”라고 합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주님 곧 ‘하나님’이 아니라 랍비 곧 ‘선생님’에 불과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도 24시간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돈궤를 맡을 만큼 신임을 받고 있었고 예수님 곁에서 식사할 만큼 친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는 결코 회개치 않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는 유다와 똑같았으나, 회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은밀히 숨겼던 죄를 지적하실 때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 앞에서 떨며 근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더 이상 배울 것 없는 무능한 선생님 정도로, 은 30에 팔아버릴 정도의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죄를 지적하셔도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곧 팔아치울 놈의 말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되어 예수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니이까” 반문했습니다. 배짱 좋은 유다의 반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25)고 대답하셨습니다. 참된 하나님 백성이라면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한 말씀이었지만, 유다에게는 전혀 회개케 하는 말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우리 모임에 발을 드려놓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너무나 진실해 보였던 것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세월을 보내면서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 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르고, 남모르는 허물과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보면 허물들이 보였습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100% 진실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100% 진실한 모습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 그리고 원수같이 행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더 이상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6,8,10).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심각한 죄인일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으로 당신님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 풍습에 따라 유월절 음식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 때마다 누룩 없는 빵과 양고기와 쓴 나물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그날 식사 자리에 양고기가 없었으나, 주님께서 친히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쓴 나물 대신 빵과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설명하심으로써 출애굽보다 더 위대한 사건인 ‘죄로부터의 구원’을 대대로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그날 제자들이 먹은 빵은 누룩을 넣지 않아 부풀어지지 않은 딱딱한 빵입니다. 주님은 그 빵을 ‘쪼개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이 찢기시게 될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찢어진 몸을 기념품으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영접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몸과 온전히 연합되게 해야 했습니다. 또 포도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주님의 피를 상징했습니다. 이 또한 상징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받아 마시고 소화해서 자신의 피와 완전히 연합되게 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4:8절을 보면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피로서 언약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식사 중에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행동들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지켜오던 유월절 절기의 연속선상에 있었지만, 숨겨져 있던 의미를 드러내고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빵과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매 식사 시간마다 그들은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 참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찢기시고 쏟으신 몸과 피임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식사기도 역시 매번 습관적으로 주신 음식에 대한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고백이 담기는 것이 의미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영접하는 것은 이제 그분과 연합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는 것은 밥과 국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셨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이 아니었다면, 인생 허무로 방황했던 저 역시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이때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피 흘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좀 더 생각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면 허물과 죄악 투성인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혜에 좀 더 연합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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