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온유한 자의 복 (마 5:5)

  • 잡초 잡초
  • 1587
  • 0

첨부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상산수훈의 말씀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신 8복의 말씀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 가지라도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복들이기 때문이다.

팔복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소망하기 바란다. 이 말씀으로 인해 천국을 소유할 뿐만아니라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한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 자신의 부족함, 무가치함, 무익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 -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가슴을 치는 자를 말한다. 오늘날과 같이 죄에 대하여 둔감하고 죄의식이 없는 시대에 자신의 죄악된 것을 애통해 하는 자 -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가 애통하는 모든 심령 속에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이다.
오늘은 세 번째로 온유한 자에게 예비된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한다.

1.온유라는 말의 의미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 본다면 4가지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1)겸손의 의미가 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빌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신의 높음을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지는 곳에 처하는 자세를 온유함이라 한다.

2)관용의 의미가 있다.
창13장, 아브라함의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 사이에 자주 다툼이 일어났다. 이유는 목초지는 좁은 데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창13:8,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서기로 마음 먹었다. 아브라함은 강자의 입장에 있었으나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롯은 기름진 요단 동쪽을 택하여 떠났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가나안 땅에 머물렀다.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투지 않고 타인에게 유익이 되도록 애쓰는 자세. 그것이 온유함이다. 아브라함의 양보하는 관용의 태도에서 온유함을 발견하게 된다.

3)절제의 의미가 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틀,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낼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정도로, 정당한 때, 정당한 목적으로, 화를 낼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라고 생각한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의 이미지는 결코 유약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매우 강한 이미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자신의 본능과 정욕대로 행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스림을 받으며 억제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이다.

4)공의의 의미가 있다.
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온유란 말을 유약함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온유란 부정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공의를 따라 행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온유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주석가 바비에리 - 온유한 자는, “진실로 겸허하고, 온순하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2.온유한 자의 받을 복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현세적 측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으로만 부요하고 현실적으로는 가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고전3:21-22,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러분, 땅 투기하는 사람들의 눈을 보았는가? 눈에 빛이 난다. 어떤 빛인가? 탐욕의 빛. 그들의 눈에서 결코 온유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땅을 소유할 소유할 자격이 있는가? 온유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다면 먼저 심령이 온유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탐욕이 없기 때문이다. 땅을 소유하고자 하기 전에 먼저 온유함을 구하라. 그러면 땅도 주실 것이다.

2)영적인 측면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심령은 그가 지상에서 소유한 것이 많든 적든지 간에 그것을 더욱 더 기쁘게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탐욕을 부리는 자는 자기 이름으로 땅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천국과 같이 꾸며 놓으려고 한다. 울타리 밖은 쓰레기 오물로 더렵혀져 있어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작은 자기 집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넓은 산과 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만물을 바라보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기뻐한다. 자기 소유가 작다 할지라도 결코 그 일로 인해 불평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은 온유함의 열매 중의 하나이다.

3)미래적인 측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 - 눈에 보이는 땅을 약속하셨고 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원 뜻은 영원한 나라, 완전한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상징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죄가 활동하는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살므로 죄가 있고, 질병이 있고, 전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악되고 불완전한 곳을 기업으로 주실 리가 없다.

미래의 어느 때에 죄악의 얼룩이 깨끗하게 지워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인들과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 될 완전하고 완성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3.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모든 소유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다. 교회를 처음 다니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걸림돌이 십일조헌금이다. 그러나 십일조헌금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십일조 헌금은 나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증표이다. 나의 살고 죽는 것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했기에 마음의 욕심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 고백 속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고 평화가 임하게 된다.

그러나 탐심과 이기심 속에는 평화와 기쁨과 감사가 없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이 내 돈을 빼앗는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나서 온유한 심령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대상 29: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의 모든 것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심령 속에 겸손과 관용과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2)기도해야 한다.
박윤선목사, 이 성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 믿어도 혈액형은 안 바뀌더라.” 예, 맞는 말이다. 혈액형은 안바뀌어도 성품은 바뀐다. 그 심령 속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면 바뀐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방향이 달라진 사람들이다. 좁은 문으로 이미 들어선 사람들이다.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소망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온유한 성품을 받기 원한다면 기도의 무릎을 꿇기 시작하라. “온유한 성품 주옵소서.”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다.

3)연단을 통해서 온유해진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격언이 있다. 예수 믿는다고 만사형통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어도 망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 믿어도 사고나는 수가 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암병이 피해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고와 실패를 통해서 신앙인격을 다듬어 가신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지금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만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실패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온유함 성품으로 만들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하여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고 하셨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쉽게 칼을 빼들고, 자신의 혈기를 누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40년의 망명생활을 통해 그는 온유함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

완벽하게 온유한 사람은 없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성도는 온유함을 위해 연단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할 때 온유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기도로 무릎 꿇을 때 온유함을 얻을 수 있고, 연단과 실패를 통해서 온유함 성품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취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세요. 여러분의 눈으로 보는 여러분의 얼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신앙은 얼굴로 나타난다.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어떤가? 부드럽고 친절한가? 아니면 사납고 날카로운가? 여러분의 언행을 통해서 여러분의 인격이 나타난다.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떤가? 욕심, 미움, 시기, 분노로 채워져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배우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소유하라. 그리하면 현세와 내세의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온유함을 나타내기 바란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함을 나타내는 기간이 되기를 바란다. (원영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