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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 것인가? (잠 1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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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란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훌륭한 부모와 유족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양육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도움 받지 못하는 환경적인 배경 속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삶은 매우 불공평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적 배경을 극복하여 오히려 역경을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하여 지경이 넓어지고 소망과 기쁨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또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진리는 <순환>과 <변화>라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쁜 환경이 오히려 투지와 의지를 더욱더 굳게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지경이든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우는 결국 정신세계건 물질세계건 그 자리조차 보존하지 못합니다. 어떤 지경에서건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 목표를 설정하고 나간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과 역사에 기여하고 공헌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의 어떤 지경이건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건 그것을 극복한 사람만이 역사에 공헌하고 귀한 발자취를 남기며 후세에까지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과연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정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인생관이나 아니면 삶의 목표가 지금 내게 무슨 의미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 살펴보면 우리의 현재라는 것은 물질세계가 됐던, 정신세계가 됐던, 이루어진 그의 삶을 바라보는 정신세계가 보는 태도와 마음자세에 따라 얻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의외의 사건과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결국 그의 사고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관점과 태도에 의해서 우리 삶은 결정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제, 즉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나눔의 정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회기를 맞이하여 특별히 교회 회기에 3기 사역 중 2년차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7년을 주기로 1기-교회 개척기, 2기-체제 정비기를 지나 3기-대사회 및 사회봉사 및 기여의 연습기라고 정했습니다.
즉 그 가운데 2년차를 보내면서 우리는 인물양성, 구제사역, 빵과 함께 전하는 선교의 사역이라는 문제를 깊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 마음을 먹고 실행하고 있는 구제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구제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기본적인 양식에 있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힘들고 어렵게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하나 살고 유지하기도 힘들어하며 그렇게 살다 이 세상을 마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대처방법은 이렇습니다.
나 하나만 생각하기에도 허겁지겁하니 늘 부족하고 쌓아두기에도 모자라고 늘 허덕거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참 잘 지내고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나만 왜 이렇게 어려울까하고 마음에 어려운 심정이 듭니다. 마음이 냉담합니다. 어떤 일을 잘할 것 같으나 의외로 큰일을 만나거나 결정적 순간에는 우유부단하거나 아니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결과적으로는 소유의 유무나 과다에 불과하고 늘 인생을 후회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와 같은 삶의 반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세상은 어려울 뿐입니다.
용서할 줄 모릅니다. 자신도 용서할 줄 모르고 늘 자책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도 용서할 줄 몰라서 늘 마음에 불만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승부의 개념에서만 생각하니 실패가 많은 세상에서 당연히 패배적인 의식에 사로잡혀있어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시각도 다른 사람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될 것이 없고 따라서 나도 그들에게 별 도움을 줄 것이 없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늘 본인은 피해 받고 있고, 따라서 욕구불만이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신의 노력보다 더 많은 것,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원하는 것 보다 적게 얻고 적게 이룸으로 말미암아 늘 패배와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이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 하나라도 잘 챙겨 피해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어려움을 겪는다고 스스로 자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인 경우, 다른 사람을 돕기는커녕 자기 자신 하나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족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내가 심지어는 빈궁에 처하나 풍부에 처하나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으니 내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삶에 자족할 수 있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따라서 내가 모든 것이 부족해도, 모든 것이 풍족해도, 어려운 경우도, 기쁜 경우도 다 대처할 수 있으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 삶에 대해서 만족이 없고 늘 불만이며 또 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이와 같이 불만 속에 나 하나 챙기기도 겁겁한 이와 같은 삶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힘들고 어려운 세상,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기쁘고 즐겁게 살며, 기쁘고 즐거운 삶으로 또 만들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고 또 주고 또 주어도 그것으로 오히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어 더 큰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혹은 좋은 일을 만났을 때 대처방법은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니 늘 줄 것이 없나 생각하고,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 주고 싶어서 잠이 안 올 정도로 무엇인가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참 가엾어 보이고 애처로워 보여 내가 그들을 꼭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이 생깁니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할 때는 의외로 결단력도 있고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의지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명이 주는 힘입니다. 이렇게 산 것 참 감사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만족할 줄 압니다. 남도 용서해 주고 자신도 스스로 용서할 줄 압니다. 모든 것을 승부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성취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돕는 사람이고 따라서 나는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기쁨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늘 본인은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이 세상이라는 것은 늘 그 감사의 빚을 갚아야 될 사랑과 아낌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난처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터전이요,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개념을 가지고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둘 사이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삶은 고통이라는 고정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삶은 한없이 피곤하고 나하나 챙기기 힘들지만, 삶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기쁨에 근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얻고 받고 쌓아둠이 행복이 아니라 성취와 나눔과 베풂이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룸이 성공이라는 분명한 성공의 개념에 대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기쁨과 은혜와 소망 속에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마음의 각오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와 같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이루며, 또 삶의 사명을 소유한 것에 대한 차이도 이와 같이 둘 사이에 차이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사명이 있어서 기쁘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명한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삶을 고무시키는 기쁨이 있으니 힘이 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사명이 있다면 자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없어지고 그릇된 집착적 사고에서 벗어나 삶을 수용할 줄 아는 여유가 생깁니다.
사명이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사명이 생기면 이전에 사명이 없었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삶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진행해 나가게 됩니다. 생의 목표가 달라지니 그의 행동은 당연히 다르고 그의 삶의 기쁨과 성취의 길도 달라집니다. 사명의 결과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생각해 봅니다. 사명이 있는 삶은 지극히 목표지양적인 삶 일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집착적인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자체를 즐기고 결과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기 때문에 목표 자체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끝까지 삶을 기쁨으로 완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루어도, 이루지 못해도 현재 여기까지 온 것이 기쁨의 완주요 완승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바로와 갖은 다툼 끝에 출애굽 시킵니다. 그리고 광야의 40년의 여정을 고초 끝에 거칩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요 그의 백성을 위한 그의 사명이라고 믿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불평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내 사명이 여기까지였음을 수납하여 오히려 수용적 태도를 가지고 그것을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 백성들을 손들어 축복하며 이제까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음에 대한 감사를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순간까지 오는 것이 우리의 성취라는 사실을 생각을 합니다.
엘리야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지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을 먹고 사르밧 과부 여인 집에서 식객으로 얹혀서 살면서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단 한 번의 때가 있을 때 갈멜산 상에서 대역사로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무어라고 얘기합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더러는 모세,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더이다.” 그러니까 유대인 사람 중에서 이름이 생각나는 두 사람이 누구예요? 모세나 또는 엘리야라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능력을 행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 엘리야가 이사벨이라는 악한 왕비의 암살 명령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무너졌어요. 이건 엘리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인데 갑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되니까 그 마음이 흐지부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도망하는 것도 지겨워 로뎀 나무 밑에서 “하나님 내가 너무 피곤하니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십시오.”하고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물과 떡을 주심으로 광야를 향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공적인 사역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임을 보지 않고 그는 하늘로 들려 올려지는 승천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것으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후계선지자 엘리사를 세워서 그 일을 감당하게 했고, 하나님 앞에 죽임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려가는 이와 같은 승천의 역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잘해도 마지막에 실패하면 그것을 가지고 실패자가 되는 것이 이세상의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한순간의 현상만 보시지 않고, 전체적인 통시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간들을 생각하여서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잘했는데 지금 당장 잘못하면 우리 인간들은 과거에 있었던 것은 잊어버리고 현재의 기분 나쁜 것 가지고 마음 상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어떤 일을 이루어도, 이루지 못해도 내가 이 순간으로 판단 받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그 지점까지 온 것이 내가 할 일이고 내 때였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근본적인 믿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내가 언제 힘이 나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이룰 때에 우리에겐 힘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내가 마음에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는 것이 합일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 즉 시각의 차이, 사명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가, 그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가 하는 근본적인 믿음의 역사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라고 자기 문제하나 생각해 그것에 집착해 사는가, 아니면 내 문제를 넘어서 다른 사람까지 돕고 세우고 기여하고 공헌하고 사는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세 번째 마지막으로 나 하나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사역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관한 내용이니 <구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구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성경은 구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구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실현방법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 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창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 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인간의 죄를 대신 구속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랑의 책입니다.

구약 성경의 가장 중심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관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의 부피가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위하여 대신 죽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하되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사랑의 아름다운 완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은 우리로서 어떻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 땅에 펼쳐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가 박수를 칩니까?
밥을 한 술 떠 놓습니까?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우리가 예배드리고 경배하면 찬양 드리는 거지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거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거지요. 또 한 가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성도님들을 보면 성도님들 자녀에 대해서 칭찬을 하면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 자녀들 칭찬하는데 기분 나빠하시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왜 그러죠?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면 부모를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지요.
여러분 어떤 때 보면 자녀들이 속상하게 해서 맘 상할 때가 있지요? 어떤 때는 속상하고 야단도 치고, 자식 야단치면 부모마음이 더 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옆집 사람이 와서 그 부모를 위로한다고 이렇게 말하지요.
“그 애 형편없어. 정말 못됐어.” 그렇게 얘기하면 여러분 기분 좋겠습니까?
그러면 “당신 자식은 어떻고.” 아마 이렇게 얘기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더 기분 나빠요.
자식 때문에 속상해 있는데 옆집 사람이 와서 “걔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보니까 인사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어떻게 그렇게 훌륭해.” 그렇게 얘기하면 갑자기 그 옆의 사람도 훌륭해 보이는 것이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죠.
왜죠? 내가 자식을 사랑하니까 그 자식에 대해서 조그만 말이라도 잘 해주면 그 사람이 나에게 고마운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세요.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요나야, 너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 그들을 구원하라.” 요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 니느웨가 어딥니까?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던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 아닙니까? 왜 우리를 괴롭히는 이방민족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합니까?” 요나는 딴 길로 갔어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요나가 다시 니느웨로 가지요.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니느웨는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시지요.
하나님은 심지어는 이방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에요.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존엄합니다. 왜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심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인간을 존중해야 되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사랑은, 마음의 가짐은 인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엄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인간들에 대한 모습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한 인간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지요.
구제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는데 구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내 생활 속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다른 것을 이룬 것보다 가장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는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의 천국의 복음을 가르칩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고,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치시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눈물 흘린 자의 눈물을 거두어주시며 마음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셨어요.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고, 상한 갈대 꺾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이와 같은 치유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과연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인가 생각하니까 그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사탕발림으로 병고쳐주고, 그들에게 먹을 것 주고, 아니면 그들에게 눈물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요즘 느끼고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병 고쳐주고, 그들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치료하시고, 먹이시고, 눈물을 거두어주시고,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설령 그 뒤에 있는 복음을 그들이 듣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어떤 사탕발림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들을 아끼는 건 그 자체 순수한 모습이요, 그 자체가 목적이요, 하나님의 기쁨이요, 은혜의 모습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가 전도하기 위하여 사람 밥 사주고, 아니면 전도하기 위하여 선을 베풀고 이게 아닌 거예요. 우리는 정말 그들에게 뭔가 아끼는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뭔가 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열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빵을 주고 병을 고쳐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가지고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는 것이 그들에게 복음까지라도 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말 주님께서 하셨던 일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훌륭한 사역이예요.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 이렇게 남을 돕는 사역이라는 것은 해도 좋고 안 도 좋고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 우리들에게 너무 귀한 우리의 삶의 목적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고, 주님을 따르는 주의 백성들이라면 우리도 주님이 하신 대로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하신대로 그대로는 못하더라도 하신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정말 마음이 답답해요. 제가 늘 기도하는 제목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압니까? 제가 우리 성도들, 아픈 성도들 위해서 기도하면 “정말 낫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아픈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도 안 나아요. 그럼 도대체 하나님 뭡니까? 나는 목사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부탁하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정말 이걸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마음이 안타까워요. 저는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우린 예수님이 아니에요. 죽은 사람 살릴 수도 없고 아픈 사람 그 자리에서 금방 일으킬 수도 없고 우리는 오천 명을 앞에 두고 기적을 일으켜서 그 사람에게 일시에 먹을 떡을 제공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해요. 그러나 그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주의 뜻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애 써보고 힘을 쓰면 그 나머지 부분을 주님께서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나머지 부분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을 다할 때 주님께서 나머지 부분을 채우셔서 우리 아픈 것을 낫게 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멎게 하시고, 우리의 배고픔을 면케 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능력 있어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 그 역사를 이룸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정말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거지요. 주님은 그냥 복음만 전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냥 우리는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구원받을 백성을 구원받게 해야 되니까 그냥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으면 우리도 주님이 하신대로 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이 하신대로 우리가 병을 고쳐줄 수 있으면 병도 고쳐줘야 돼요. 먹을 것을 줄 수 있으면 먹을 것도 줘야 돼요. 우리는 그들의 눈물에 거두어 줄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물을 거둘 수 있는 일을 해 주고요, 그들에게 슬픔이 있다면 슬픔가운데 동참하여 거두어주고,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해야 하는 거지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뭐든 좋은 것을 주었으니 참 기쁘고 감사하다 잘 됐다 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감사의 요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사명을 깨달음과 실행함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기쁨이 돼야 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면 <나눔의 권면과 그 축복>이죠.
‘흩어 구제하여도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한 것 보니까 사람이 이 구약시대에도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 돕는 것은 내 것이 뚝 떨어져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난 내꺼 하나도 손해 안 봤는데 남을 도와줬다 이건 아니에요. 이건 스스로 속는 겁니다. 내가 남을 도와줬으면 도와준 만큼 내가 소유한 것이 뚝 떨어져서 없어져야 남을 도와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떨어져서 없어져 나간 부분보다 더 큰 것을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거지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우리가 구제를 할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이죠? 배려하는 마음이에요.

<레위기 19장 9절>을 보면 너희가 땅의 곡물을 벨 때 밭모퉁이까지 베지 말라 떨어진 이삭 줍지 말고, 포도원 열매 다 따지 말고 좀 남겨 두고, 떨어진 열매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요? 가난한 자들과 타국인이 그것을 주우러 올 때 그들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정말 이 구절을 보면 우리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아요. 그냥 다 따서 창고에 딱 넣어두고 누가 오면 생색나게 “야, 이거 당신 가지쇼.” 이런 게 아니에요. 얻을 수 있죠. 거둘 수 있지만 일부러 남겨두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끝까지 빡빡 챙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일부러 때로는 느슨히 좀 그냥 두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그것을 주워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죠. 우리는 손해 안보고 빡빡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알면서도 슬며시 흘리는 사람, 그럼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그것을 가지고 그것 때문에 도움이 되겠지요.

여러분 ‘룻’ 아시죠? 나오미의 며느리로 나오미가 혼자되고 며느리 룻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가난하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서 그걸 가지고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보아스라는 사람이 룻을 보고 마음에 사랑의 감정이 생겼어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어떻게 하죠? 하인들에게 얘기하죠. 룻이 밀밭에 가서 이삭을 주우니까 너희는 이 밭에다가 곡식을 뿌려 놔라. 얼마나 배려하는 마음입니까? 인심 쓰듯이 그냥 곡물을 착 주고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준다.” 라고 얘기 할 수도 있겠죠.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룻이 주우러 오는 것을 알고 밭에다 일부러 그것을 주워서 아무런 자존심 상함이 없이 그저 그것을 주워서 가져갈 수 있게 이런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결국 둘을 사랑에 이르게 하고 둘이 가정을 이루게 되죠. 그리고 그 룻과 보아스의 가정에서 다윗이 나왔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나왔어요.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보아스가 룻과 아름답게 맺어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예수님의 계보에 서는 이런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배려라는 것은 필요해요. 저는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님은 생선 머리만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늘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나는 머리가 맛있어서 머리를 좋아한다. 너는 몸통을 먹어라.” 그래서 나는 ‘어머니는 머리만 좋아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제가 나이가 좀 드니까 생선을 먹을 때 늘 머리 부분에 이만큼 살을 붙여서 남겨놓고 나머지 살은 제가 먹어요. 여러분들도 그러셨죠? 여러분 안 그러셨어요? 우리 부모님들은 그러셨잖아요. 자식들 더 먹으라고 “나는 그거 좋아하지 않아. 나는 머리만 좋아해.” 자식들 몸통 부분 다 주시려고.

자식이 조금 철이 들고 나니까 이제 어떻게 하죠?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아, 아니에요. 몸통 드세요.” 하면 안 드실까봐 그 머리에다 살을 이만큼 붙여서 일부러 남겨두는 것 아닙니까? 그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배려하고, 자식은 철이 드니까 부모를 배려하는- 그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도 해주고 무엇인가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배려> 아니에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이 배려의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시혜 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됩니다. 또 다른 주종관계가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주종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진정한 베풂과 나눔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베풀고 구제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씀과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필수적인 사실입니다.
<신명기 15장 10절>을 보면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것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내 범사 내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반드시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삼 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드렸어요. 매년 십일조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그 십일조를 삼년에 한 번씩 더 드렸다고요. 두 번 드렸어요. 삼년 째 드리는 십일조는 구제를 위한 십일조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제라는 것은 언제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에게 구제 할 것이요 라는 필수적인 사항 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제할 때 우리 마음을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로 인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일에 네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잠언 28장 2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치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니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고 못 본체하는 자는 저주가 많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게 뭐죠? 너무나 날마다 하다보니까 이젠 그것이 우리들에게 통상적인 일이 되어서 내가 구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여쭤 볼께요.

여러분 3주 전의 설교제목 뭔지 아세요? 2주 전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3주 전 것까지 압니까? 2주 전 것은 뭔지 아세요? 제가 또 이렇게 생각 했어요. ‘우리 성도들이 설교를 또 듣고 잊어버린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새 은혜를 받으니 새 은혜가 덮어 이전 것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 했어요. 이게 굉장히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은데 과거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 은혜를 날마다 받기 때문에 과거의 은혜는 그냥 두어도 새롭게 은혜로 살 수 있다 생각해서 잊어버려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일 년에 한 번씩 예배드리는 사람은 작년에 예배드릴 때 뭐 드렸는지 다 알아요. 그죠? 이해가 돼요 안 돼요. 일 년에 한 번씩 예배드리는 사람은 일 년 전의 설교 제목도 기억해요. “목사님 전에 이런 말씀하셨는데......”하고 일 년 전 것도 기억해요.

여러분 일 년 전에 무슨 설교 했는지 기억나세요? 안 나요?
그건 여러분이 훌륭해서 그런 거예요. 매주 은혜를 받고 있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대로 또...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라는 것은 전 곰곰이 생각해도 그것밖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날마다 선행을 하니 이게 선행인지 아닌지 이거 내가 안하면 큰일 나는 것 같고 또 당연히 하는 거예요. 그래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지 않겠어요?
성가대 날마다 연습해도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4주전에 어떤 성가 불렀는지 아세요? 한 달 만에 나오면 4주전에 뭐 불렀는지 안다고요. 근데 매주 나오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는 것은 정말 그것이 날마다 우리의 기본 수준이 되는 것이에요.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아주 중요한 사람이 나옵니다. 백부장 고넬료인데요 이 고넬료가 왜 중요하냐면 사도행전은 쉽게 말해서 전반부는 베드로행전이고 후반부는 바울행전 이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전반부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유대주의의 틀을 깨지 못해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탈피해서 이방인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나오는데 누구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냐면 고넬료라는 사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를 모르는 지경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 맞아요. 그래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따라가서 고넬료 집에서 복음을 전하니 그것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담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넬료가 경건한데 그 경건에 대해서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면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경건한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 번째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세 번째는 하나님께 항상 기뻐하고-이건 뭡니까? 하나님을 온 집안으로 경외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그리고 구제를 많이 하고-이것이 경건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해도 구제가 많지 않으면 이것은 경건하지 못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속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고 하는 과정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쓰고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 늘 하기 때문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경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고 나서 참 감사하다 이렇게 살았음을 참 감사하다 라고 생각하는 삶은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베풀고 가는 삶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인생 망하고 나면 ‘그때 차라리 베풀기나 할 걸’ 그런 생각 들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남는 것은 베푼 게 남는 것 같아요. 남에게 준 게 남는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 갈 때 다 두고 가잖아요.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나는 데요, 내 마음에 안 들면 적을 만드는 것 같아요. 힘이 없으니까 꼭 승리하고 싶어요.
그러나 이제는 마음에 맞지 않아도 친구 삼을 수 있고, 꼭 승리 하지 않아도 기쁠 수 있고, 이제는 상대를 생각해서 슬쩍 한 번쯤 져 줄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지면 져 줄 수 있어요. 우리가 커지면 일부러 손해 봐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 손해 봐도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안 돼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런 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한 가지 얘기 드리고 말씀을 맺으려고 하는데요, 더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말씀을 드리는데 여러분들이 혹시 제 이야기이기 때문에 정말 오해하지 않고 그냥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분당에 온지 16년 되는데요, 그전에 제가 전에 있는 교회에서 청년들도 가르치고 어린아이들도 가르치고 또 고등학생들도 가르치고 했는데, 중학생도 가르치고, 고등부 가르치고 있었는데 애들 참 예쁘잖아요. 조그만 애들이 예수 잘 믿고 하면 참 예쁘잖아요. 그런데 한 아이가 아버님이 암으로 투병을 하셨는데, 너무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참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고등학교 2학년 아이였는데 그 과정 속에 아이가 많이 마음이 어두워지고 상처를 받잖아요. 공부도 곧 잘 했는데 한가지로 마음이 많이 어렵고 생활도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더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이 또 목사의 해야 될 일이니까요. 그 아버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갔는데,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됐는데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그의 어머니가 조그만 가게를 했는데 거기 가서 그 가게 일을 도와주고 그러더라고요.
대학을 갔는데 안타깝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갔어요. 그래서 참 안타깝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갔는데 대학을 가면 집에서 어른들이 양복도 사주고 또 이러저러한 선물도 하고 그러잖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아이가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그러는데 양복이라도 사 줄 사람이 있나 생각해 보니까 가족 중에 특별한 경우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아버지 대신 양복이라도 사줘야지.' 생각하고 아이를 데려가서 백화점에서 양복이고 셔츠고 넥타이 그런 거를 사줬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 들어가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 네가 엄마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하게 되면 그게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훈을 줬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관심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죠.
다행히 대학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좋은 학교로 가게 됐어요. 그리고 이러저러한 어려운 과정은 있죠. 물론.

그리고 아주 30대 초반, 서른한 살, 서른두 살 정도 됐는데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서 왔어요. 미국에서도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 한 2년 전인가 작년인가 와서 결혼해서 아내도 데리고 애도 하나 안고 인사를 하러 왔더라고요. 저한테 논문을 하나 가지고 왔더라고요. 그게 이공계논문인데 제가 보면 뭐 알겠어요? 보라고 가져온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 갖고 왔더라고요. ‘목사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글도 써서 이렇게 갖고 왔는데 참 마음이 기쁘더라고요.
저는 별로 준 것도 없는데 그 아이는 제 마음을 늘 기쁘게 했던 거 같아요. 정말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주는 것이 더 기쁜 것 같아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어서 정말 작은 것 하나라도 같이 나누어서 그게 잘 되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어요. 정말 우리는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주어서 더 기쁜 것 같아요. 그 아이는 그저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기도 부탁하고, 늘 저는 기도하고 그런 거지요. 참 감사한 것 같아요. 그 아이로서는 자신이 잘 돼서 이렇게 인사하러 오는 것이 보은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를 키우셨듯이 우리의 인물들을 키우는 겁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방 그 좁은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했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요.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무서워서 밖에도 못나가고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밖에 못했어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나니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그 작은 지역에서 전하였지만 제자들은 세계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키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셨듯이 인물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백성들을 지키는 아낌과 애정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시고, 또 심지어는 그들에게 있어서 눈물 흘릴 때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그들이 마음 아파할 때 그들 옆에 있어줬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셨으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문둥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셨는데 그중에 1명만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행한 것에 대하여 어떤 대가를 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마음만 상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나눔과 은혜를 베풀 뿐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만히 해 봤어요.

독이 있는데 그 밑이 구멍이 났어요. 물을 부으면 그 밑으로 쭉쭉 새죠. 그러면 독의 물이 하나도 안 남아 있겠죠? 그건 어떤 전제죠? 한 번 붓고 나서 하나도 다시 붓는 것이 없을 때 다 빠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독에 구멍이 나서 줄줄 다 흐르는 것보다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물을 더 많이 부으면 밑에 구멍 뚫어져서 흐르는 물보다 위에서 붓는 물이 더 많으면 결과적으로 그 물동이에는 물이 찰랑찰랑 차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나눔과 베풂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되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붓는 거예요. 아래는 새도 위에는 계속해서 찰랑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날, 우리의 호흡이 있는 날은 주님 앞에 귀한 아름다운 사역을 이루시고, 다 주님 앞에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셔서 주의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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