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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약속, 승리의 능력 (고전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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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약속, 승리의 능력

<고전15장>의 하반부, 오늘 본문은 질문 하나를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冒頭)에 툭 던져놓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35절>

이 질문은 두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도대체 죽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납니까?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라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때는 어떤 몸, 어떤 모양으로 살아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임종의 순간에 제자들과 이런 대화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 중의 하나가 “우리가 다시 살아날까?”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죽어가는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기를 바란다네. 그러나 누가 그 사실을 알겠는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말하기조차도 꺼려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음 이후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거해 줍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도 바울이 그 다음 구절에서 딱 잘라서 대답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36절>

어떻게 보면 사오정식 대답같기도 하지요? 쉽게 풀어쓰면 이런 대답입니다. “멍청하긴,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산 사람이 살아나는 것 봤냐? 꽃씨 봐라. 씨가 땅에 뿌려져 죽어야 싹이 나서 꽃이 피는 것이지, 안 죽고 살아나는 것 봤어? 꽃의 씨처럼 우리 사람도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질문, “다시 살아난다면 그러면 어떤 몸,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거냐?”에 대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42절> 했듯이, 사람의 몸의 부활은 앞에서 예를 든 식물의 씨앗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식물의 씨앗의 비유를 든 <37-41절>의 가르침은 이런 것입니다.

“밀이나 다른 곡식들을 보면, 뿌리는 것은 씨앗이지 장차 생겨날 나무가 아니지 않습니까? 씨앗은 죽어 없어지지만 그 씨가 죽어서 썩고 나면 곡식나무가 생겨나듯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땅에 속한 몸, 자연적 몸은 죽어 없어지지만, 하늘에 속한 몸, 신령한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의 모습 그대로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연적 몸은 씨앗처럼 죽어 없어지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수평적, 공간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에는 사람의 살도 있고, 짐승의 살도 있고, 새의 살도 있고, 물고기의 살도 있고 하지 않습니까? 수직적인, 시간적인 면에서도 땅에 속한 몸이 따로 있고 하늘에 속한 몸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첫 씨앗은 죽어 없어지고 큰 식물이 생겨나는 것처럼, 자연적 몸은 죽어 없어지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당시 세계에 만연해 있던 헬레니즘적 세계관과는 정면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 고린도교회도 헬레니즘의 문화, 세계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입니다. 헬레니즘적 내세관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죽음 너머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몸은 없고 영혼만 있는 것일 것이다.” 헬레니즘의 내세관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영혼이 없는 인간 존재를 부인할 뿐만이 아니라 몸이 없는 영혼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바른 사상은 인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라는 야고보의 지적처럼 죽은 사람에게나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지, 살아있는 사람을 영혼과 육신으로, 혹은 영, 혼, 육으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전인(whole-man)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떡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요? 살아있는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결합된 전인이기에 떡과 말씀, 둘 다 필요합니다.

성경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헬라사상고 달리, 몸의 부활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42-50절>까지에서는, 자연적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아담과 예수님을 대비하여서 설명을 합니다.

“자연적인 몸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유래하였고, 신령한 몸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합니다. 그 순서는 자연적인 몸이 먼저이고 신령한 몸이 나중이지만, 자연적인 몸은 땅에서 난 흙으로 되어 있으나 신령한 몸은 하늘에서 납니다. 자연적인 몸은 아담의 모습을 입었지만, 신령한 몸은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 예수님의 모습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자연적 몸이 그대로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을 입어서 부활됩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자연적 몸이 그대로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을 입어서 부활됨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지금의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50절>. 썩을 것, 지금의 자연적인 몸은 썩지 않을 것, 신령한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쩌라구요? 지금의 우리 몸뚱아리는 결국은 흙으로 다 돌아가는 것, 그렇게 연연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몸을 우상삼지 마십시오. 이쁜 것, 멋있는 것, 몸뚱아리 건강한 것에 목매지 마십시오.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의 하나가, 건강염려증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늙기는 마찬가지이고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인데, 그 몸뚱아리을 지나치게 애지중지하는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은 정작 목숨걸만한 가치를 모르니까 자기 몸뚱아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해프닝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왜 <막16:17,18>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하면서 몇 가지 표적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그 중에 하나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약속을 믿고 주장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는 게 병이라고, 요새 공해문제, GMO문제, 환경호르몬 문제 이런 것 다 따지면 안심하고 먹을만한 것,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암걸리면 어떡하나 벌벌 떨면서 살지 않고, 유기농, 무공해 이런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인명은 재천이라, 내 인생의 길은 하나님의 주관하신다 라는 믿음을 갖고 그냥 쉽게, 즐겁게 믿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라고 지적했듯이, 결국 썩어서 없어져버릴 몸뚱아리에 헌신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51절> 이후에는, <51절> 전에 이 질문을 하나 넣으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씨앗처럼 육신의 몸이 죽어야 신령한 몸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 사람들은 계속 자연적인 몸을 입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51절>부터입니다. 이것은 비밀이었는데, 하면서 설명을 합니다. 비밀은 새어나가라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미 주 안에서 죽었던 사람들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우리는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주 안에서 죽었던 사람들이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살았던 사람이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는 그 날은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날입니다. 부활의 날은 죽음을 완전히 무장 해제, 죽음의 최종적 패배를 의미합니다. 한 때 죽음은 죄를 자신의 공격무기로 삼아서 우리를 지배했었지만, 부활의 날은 죽음이 끝장나는 날입니다. 그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의 영광을 처음으로 누리고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은 곧 우리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요약하면, “부활은 반드시 있다, 우리의 부활은 지금 우리의 살과 피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 부활의 날은 죽음이 끝장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확실하다.” 이런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연스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57,58절>입니다.

  “이렇게 부활과 승리의 약속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렇게 확실하여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렇게 확실하므로, 괜히 쫄지 말고 의심으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힘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괜히 이상한 사변에 흔들리지 말고 부활의 날, 승리의 날의 소망을 안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이처럼 확실하므로 주님의 일에 더욱 매진하십시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성경본문이, 제가 풀어서 설명하는 가르침이 여러분에게는 익숙합니까, 아니면 낯섭니까? 오늘 본문이 여러분의 관심의 핵심을 건드린 것 같습니까, 아니면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는 것같습니까?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설명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부활의 날의 가르침이 낯선 것은 왜 그렇습니까?

첫째 이유는 단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현세의 일에만 온통 관심이 다 빼앗겨서 내세의 일에 대한 관심이 없지요. 그리고 사실 이런 내세에 대한 무관심은 시대의 흐름입니다.

소위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밥이 하늘이다”는 포이에르바하의 선언처럼, 현대인들의 사고와 마음의 바탕에는 자연주의 유물론의 시대 정신에 의하여 많이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온통 관심을 갖는 것은 돈 많이 버는 것, 인기 짱인 것, 신나는 것 등 현세적인 것들이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관심은 어떻게 예수 믿고 잘 살아볼까 이지, 영원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다수인 듯 보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관심의 전이(轉移)입니다. 현세에만 목매달고 있는 마음을 높이 들어서 영원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코 앞의 나무에 연연하는 마음눈을 높이 들어서 산을 바라봐야 합니다.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그냥 밀쳐두지 않고 끌어안고 고민하는 구도자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고 자극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투신할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에 진지한 직면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이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까?

<벧전3:15>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했듯이, 성경은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가,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정도로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예) 경임자매의 간증

여러분은 누가 당신에게 “너 왜 교회 다니니?” 그러면 속으로 “옳지, 너 딱 걸렸다. 고구마가 젓가락에 꽂힐려고 하네” 하며 대답해 줄 말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소망과 이유를 명확히 함이 없이, 소위 붐에 휩쓸리는 신앙은 당신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지 못합니다. “이게 좋더라, 요샌 이게 유행이더라” 해서 좇아다니는 신앙생활은 정작 당신의 인생에 환난의 홍수, 유혹의 바람이 불어올 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껍데기 신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묄새” 하였듯이, 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소망과 이유를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뿌리내렸을 때에야 그 신앙은 내 생활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그냥 하루하루 현세의 삶에 밀려다니지만 말고, 소망과 이유를 확실하게 세우십시오. 그럼으로써 영원에 잇대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 소망의 즐거움,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누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신앙훈련입문과정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정도로 준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나의 기분이나, 세상의 트렌드(=흐름)에 발맞취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에 따라서 삶을 드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트렌드를 따라갈 것이냐 성경말씀의 가치를 따라 갈 것이냐가 우리 신앙인들의 매일의 영적 전투입니다.
환희와 능력의 삶을 위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듯이, 당신의 부활의 신앙도 확실하게 세우십시오.

현세에 목매어 사는 현대인들이기에 내세에 대한 가르침이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죽음 이후,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이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현세의 일에 분주하여서 영원에 대한 것은 잊고 살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렇게 자다가 죽어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이 들면,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차를 타고 가다고 교통사고로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사람을 보게 되면,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운 질문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사람의 마음을 찔러 옵니다.

예) 공자의 제자 중 덕현이라는 제자가 하루는 공자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공자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일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죽은 다음의 일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쫓겨서 많은 시간들은 잊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영원에 대한 궁금증,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편한 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종교를 찾지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이 종교단체에 소속해 있다는 것, 가끔씩 절에 간다거나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것처럼 내가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위로를 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래서 교회를 다님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여전히 숱하게 많이 있습니다. 혹은 예수를 믿는 것을 죽음 이후에 대한 보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존 스토트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 오늘날 서구 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불행(two miserable)을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알지 못하여 마음 속에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둘째는, 자신이 사실은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혹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를 알고 있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의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감사, 열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열심의 마음이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형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겨우 하는 척 하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사람의 증거,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의 증거는 “열정”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위하여 살고 싶은 열정이 영생의 증거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는 멧세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께 내 삶의 주권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 마음의 중심입니다. 내 마음과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느냐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내 경험, 내 철학, 내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마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자리잡고 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온통 현세의 것에만 넋이 빠져있는 부초(浮草)인생들, 죄책감과 죽음의 두려움에 눌려지내는 가련한 영혼들, 종교적 수양을 열심히 쌓지만 불안의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는 어떤 사람들, 그리고 값싼 은혜(cheap grace)의 복음에 속고 있는 세속적 교인들... 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이들에게 복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뭐라고 권면합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주님의 일입니까? <고전15장>의 문맥에 의하여 해석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주님의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게, 여전히 죄의 수치감과 죽음의 두려움 아래 살고 있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십시오.
그 길이 확실한 영생의 길입니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일 아니겠습니까?

미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의 육신/ 여기에 잠들어 벌레의 먹이가 되다/ 그러나 그 작품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니/ 그것이 한번 더 등장할 것이로되/ 새롭고 우아하게 편집되어/ 저자의 손으로 개정되고 교정되어. 출간될 것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이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루어 놓으신 이 소망, 우리의 부활의 소망을 안고 오늘의 삶을 더욱 주님의 일에 힘쓰며 살아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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