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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자가 누구인가? (막 9: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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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딛1:16)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한자가 되지 말라”입니다. 즉,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지만 행위로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며,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많은 말을 하지만 행동과 차이가 날 때 외식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으며, 누가 진실 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서기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서기관의 외식하는 모습을 꾸짖으셨습니다. 신약시대의 서기관이라면 행정업무뿐 아니라 율법의 전문가요, 신앙인의 대표적인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서기관의 모습을 보니 권위의 상징인 긴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시장에서는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고, 회당이나 잔치의 자리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 염증을 느끼셨습니다.

서기관의 외식하는 모습을 꾸짖으신 후 예수님은 성전의 여인의 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는 사람들에게 이 과부가 비록 두렙돈을 헌금했지만 생활비의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장 1절로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낭독하겠습니다. (눅21:1-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역설적인 가치관’, 다른 말로 말하면 ‘역순의 복’ 혹은 ‘기독교적인 새로운 가치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관, 역설적인 가치관, 혹은 역순의 복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첫째가 되는 방법들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놀랍게도 모두가 역설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거든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살려고 하는 자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먼저 남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대접 받기를 원하시는 자는 먼저 남을 대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비판을 받지 않으시려거든 먼저 남을 비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1-3)

빌립보서 2장5절 이하에서 본이 되시는 주님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보이는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한집에서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집에 머물렀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희들이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토론한 내용을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자신들이 토론한 내용이 너무나도 세속적인 것이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자냐?’하고 토론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토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인간적 욕심에 그분의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모습과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유대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가르침은 ‘큰 자가 누구인가?’에 교훈입니다. 본문 9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죽음 후에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셨는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실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 누가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인지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가련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인간이 참으로 첫째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막9:35)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자만이 이러한 생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만이 이러한 모범을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위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있습니다.
찬송의 위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의 위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골수를 쪼개듯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은밀한 수고와 헌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상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부여할 때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건강하게 합니다. 보잘 것 없지만 작은일, 적은일, 보이지 않는 것에 충성을 다할 때 기적을 낳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을 믿는 믿음을 가지셔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3. 내 이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우리가 봉사나 헌신을 할 때, 또 무엇을 하든지 내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 불평을 없앨 수 있으며, 자신의 공로로 치부할 교만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일들을 할 때 나의 힘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해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 자신들의 이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을 예를 들어보면, 다윗이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거인장군과 대적할 때에 골리앗이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져왔느냐?” 라고 기선을 제압하려고 할 때에 다윗은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웠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자에게는 새로운 힘과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그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자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힘 있게 뛰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만나기전에는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큰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에는 ‘가장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복음을 가장 귀하게 여겼던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합당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겼던 다윗이나 사도바울은 결국에 있어서 그의 이름들이 존귀케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여겼던 다윗과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역순의 진리’와 ‘역순의 복’을 믿으셔야 합니다. 작다고 생각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십시오,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복음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살아가는 자를 큰자로 여기실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풍성하게 복 주실 것입니다. 더욱 겸손하시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요.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신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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