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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요 10:22-29)

  • 잡초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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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목자와 양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원래 유목민으로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목축을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목축을 했으며,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인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로 지냈고,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 역시 소시 적에 목동노릇을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주의 사자로부터 맨 먼저 전해들은 사람들도 다름 아닌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목자와 양은 공동운명체입니다. 목자는 철저한 사명감을 갖고 양을 쳤습니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자기가 외삼촌의 양떼를 치면서 한 고생에 대하여 “내가 20동안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간 형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말을 듣고는 의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가서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사울 왕이 다윗을 보니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인지라, 그 용기는 가상하지만 골리앗의 상대가 되지 못하므로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대답하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목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목자가 다 이 같이 헌신적인 목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삯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시라면 그를 믿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풀을 뜯어먹는 양들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이성이 없는 양처럼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의 관계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론에서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고 하셨습니다.

방금 소개한 말씀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 자신을 내세울 것이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는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사람의 행위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수양을 하고 도를 닦고 선을 쌓아서 그 공로로 부처가 되거나 신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언합니다(롬 3:20). 아무리 도를 닦아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죄인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 받지는 못합니다.

이사야서 64장 6절에 이르기를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빨랫감으로 던져진 옷이 자기가 다른 빨랫감에 비해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차이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양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할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양은 천성이 순해서 남을 해칠 줄을 모릅니다. 사자나 늑대와 같은 맹수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고, 힘도 세고 날렵하지만, 양은 무기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소나 양과 같은 초식동물의 치아는 풀을 갈아먹기에 좋게끔 어금니가 맷돌처럼 되어 있고 송곳니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이빨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뿔이 위협적이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초식동물 가운데도 노루나 사슴처럼 대단히 날렵한 동물도 있습니다 마는, 양은 달음질을 잘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격상 양은 공격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털을 깎기면서도 그저 잠잠한 것이 양입니다(사 53:7). 그러므로 양은 보호자가 없이 혼자서는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양이 잘 할 줄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이야말로 양이 가진 가장 유력한 생존 능력인 셈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서는 야산에 양을 방목해서 풀을 뜯어먹게 하고 해질녘이 되면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모아서 우리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수백 마리의 양이 섞여서 풀을 뜯고 있다가도 목자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소리를 발하면, 양들이 제 목자의 음성을 알아채고 제 목자에게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다른 목자의 음성은 들은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초원에 여러 목자가 자기들의 양들을 방목할지라도 저녁이 되면 남의 양과 섞이지 않고 자기 양들만 데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이 같은 특징을 아셨으므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다 함은,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에게 넘어가는 사람이 생겨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잘못을 말해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기어코 이단으로 가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제 목자의 음성을 분간할 줄 모르기 때문에 도적과 같은 마귀의 음성을 듣고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영적으로 어려서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면 혹 다시 돌아올 가망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 가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전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모여와서 주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합니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불신 이웃을 보고 무조건 ‘저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믿지 않더라도 그들 가운데는 언젠가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양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양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릅니다. “문지기는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주님의 이 말씀은 목축 현장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양 우리를 짓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서 우리를 짓고 자기들의 양들을 함께 넣고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우리에 가서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는 대로 문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고 도리어 도망하였습니다. 양은 자기를 방어할 무기를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간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선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다 아시고 불러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신 것 자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마귀는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택하신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합니다. 마귀는 마치 우리의 목자인양 양의 가죽을 쓰고 다가와서 속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그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에는 순종하고, 주님의 음성이 아니거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저희를 안다” 하신 것은, 선한목자로서 자기의 양들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다니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한 대로,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자기의 양들의 이름을 다 아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목자가 볼 때는 양들이 각기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양이 아무리 많아도,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다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그의 양들인 우리를 얼마나 알고 계실까요? 단지, 이름만 아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아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에 대하여 완전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였을 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 하셨을 때 그 아시는 수준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되, 우리의 성품과 장점과 약점을 다 아십니다. 또한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도 다 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아십니다. 목자들의 임무는 양의 형편을 늘 파악하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양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혹시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봅니다. 경험이 많은 목자는 양의 머리에 손을 한번 얹기만 하면 그 양의 건강상태를 즉시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목자가 평소에 양들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양들인 우리의 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을 지은 성도는 이 같이 고백했습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에 보니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고 말씀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사람들이 나의 약점을 악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의 약점을 알면 나를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악용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과 약함을 정확히 알수록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줍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버선 뒤집듯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더 큰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속은 답답하지만 자기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시므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아시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다 아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 때문에 불안 해 하는지 다 아십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도 아십니다. 우리 마음이 겸손한지 교만한지도 아십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우리 주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주님께서 모두 다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칠 것은 고치고, 다듬을 부분은 다듬고, 도려내야 할 것은 도려내실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상한 심령을 싸매시며, 우리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며, 연약한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셔서 당면한 시험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양들은 앞서 가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는 책임은 목자에게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줄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들인 성도들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선한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삶이 피곤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간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어느 초장으로 양떼를 이끌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양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목자에게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시편 23편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던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동노릇을 했으므로 이 시는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편을 보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만 지낸 것이 아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 적도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도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통과하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유익을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얼마나 고난이 극심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셨으므로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죽음에 직면하는 것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나 혼자 고아처럼 버려진 것이 아니라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라 자손이 지은 시편 46편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 7)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신 대로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다 보면 때로 핍박을 만나기도 하고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끝까지 따를 때, 다윗의 고백처럼 원수가 보는 앞에서 잔칫상을 베풀어주시는 승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기적을 보고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누군데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한단 말이냐?”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고 했습니다.

주님 곁을 떠나간 사람들은 주님을 목자로 알고 따른 것이 아니라 이해타산에 따라서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생각에 맞지 않자 미련 없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으므로 핍박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듯이, 우리도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며, 궁극적으로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즉 이 위대한 소망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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