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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어떤 청지기입니까?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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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베드로 전서 4장 7절에 “만물에 마지막이 가까워 왔으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은 종말의 시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종말에는 두 종류의 종말이 있습니다.
먼저 개인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의 종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병으로, 교통사고로, 나이가 많으셔서 세상을 떠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출근했는데 출근하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침은 함께 했지만 저녁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의 종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오는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역사는 정지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수많은 역사 속에 지나온 과거 속에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속에 찾아오신 그 성탄 그것을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역사속의 가장 위대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제 우리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인도해 가실 그 재림의 사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야 할 종말론적인 목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재림하셔서 오실 때 그것은 바로 불신자에게는 두려움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결산의 날이요 승리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은 수능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열심히 대학 입시를 위해서 준비합니다. 수능고사가 다가올 때 이제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시험에 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학생은 조금 덜 떨릴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학생들은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시험 후에 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그 반응은 다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기쁨이요 축복의 날이지만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은 학생들은 실망과 탄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이들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해서 갑절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주인이 오면 그들을 칭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마음이 서운해서 땅속에 그것을 숨겨두고 시간만 보내다가 주인이 왔을 때 그것을 내어놓으면 주인으로부터 징개와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들은 다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관리하다가 이제 주인 되신 주님이 올 때 이제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칭찬받는 청지기도 있을 것이고 책망 받는 청지기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너희는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청지기 입니까? 선한 청지기 입니까? 악한 청지기 입니까?
청지기는 두 종류가 있다고 누가복음 12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모든 가정의 문제를 맡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서 주인이 없는 그 상황에 더 열심히 일을 합니다. 때를 따라 그 양식을 종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정을 잘 관리합니다. 그럴 때 주인이 갑자기 오게 되면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상급을 받고 훌륭한 종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악하고 미련한 청지기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여 취하고, 방탕하고, 종들을 때리고, 무질서 한 삶을 삽니다. 그러다 생각지 않은 시간에 주인이 당도하면서 이 미련한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주인이 도착해서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못한 자의 법률에 처합니다. 우리는 어떤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까? 선한 청지기 입니까? 악한 청지기입니까? 지혜로운 청지기야 할까? 미련한 청지기여야 합니까?

청지기란 누구일까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을 청지기라 합니다. 주인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가정을 움직여 가는 사람입니다. 경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를 때에” 우리는 그가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자녀를 왜 안주십니까? 그러시다면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겠습니다.” 종을 그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엘리에셀을 신임 했습니다. 좀 지나서 아들 이삭이 성장하니까 자기 청지기 엘리에셀을 대신 보내 아들을 위한 배필을 구하라고 보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이 청지기가 리브가를 대리고 와서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게 했습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서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도 시위장 보디발을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라고 했습니다.  위임이라는 말이 참 중요한 말입니다.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담임목사가 그 교회의 목회를 맡을 때 담임목사 취임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이영무 목사에게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단에서는 담임목사 위임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를 그 목사에게 위임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다 위임받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부인이 그를 위협할 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 하지 않고 다 내손에 위임했으니 그러나 당신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청지기였습니다.
창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심으로 요셉이 청지기의 일을 잘 하게 되었고 그 집이 흥하게 되고, 부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지기는 중요합니다. 청지기가 지혜롭고 훌륭하면 그 집이 부요해집니다. 그러나 나태한 청지기가 있으면 그 집은 쇠퇴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교회를 맡기셨고 우리 가정을 맡기셨고 우리의 직장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지 우리는 선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고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충성하는 청지기 일 때 나를 통해서 그 가정에 놀라운 복이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청지기로 살아야 될까요? 선한 청지기의 삶은 어떠해야 될까요?

첫째는 청지기는 깨어서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하는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시대에 더 이상 우리가 잠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0절에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왔을 때 종이 깨어 있을 때 주인에게 큰 칭찬을 받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눅 12장에 보니까 “이름으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생각지 않은 시간에 도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깨어 있어야 됩니다. 선한 청지기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기도의 청지기로 부름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할 것이라.” 기도해야 될 청지기가 기도를 중단할 때 그것은 바로 범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명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습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경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함으로 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국회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를 놓고 의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이 처칠경을 보니까 처칠경이 눈을 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칠을 지적했습니다. 그때에 이 처칠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의원님 저는 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중대한 일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수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영국을 훌륭하게 이끌 수 있었습니다.

한 개척교회 목사님이 지하실에 개척을 했는데 교인이 찾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매일 성도가 없는 새벽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피곤해 하는 부인을 깨워서, 부인을 앉혀놓고 설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을 깨웠더니 사모가 “여보 나 지금 감기 몸살 나서, 오늘 만은 꼭 나가기 싫어 당신 혼자 나가서 기도하면 않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목사님 혼자 나갔습니다. 혼자 밖에 없으니 아예 불도 켜지 않고 혼자 기도하다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 중에 준비해온 새벽설교 말씀이 뜨거운 열정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설교 본문이 에베소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술 취하지 마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는 설교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소리에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불을 켜보니 술 취한 한 사람이 자기 집인 줄 알고 옷을 다 벗고 누워 자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소변을 누고 상황이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도 자다가 술 취하지 말라고 하니 깜짝 놀라 자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목사님께 빌기 시작했습니다. 재발 소문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뭐든지 시키는 것을 다 할 것이니 제발 없던 일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때 지혜가 떠올라 내가 모든 허물을 덮어 줄 것이니까 이번주일에 교회에 나오겠냐고 얼마든지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보내면 안 올 것 같아서 주민등록증을 받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식솔들을 다 대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6개월 만에 처음 교인이 왔습니다. 얼마나 신나서 설교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이 성도가 마음이 변해서 안 나올까봐 신문 한 장을 들고 그 집 문 앞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그 교회의 초대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놀라운 능력의 근원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한 차원 높여주십니다.

두 번째는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8절과 9절 말씀 “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여러분 선한 청지기는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되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달음박질 하는 사람이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해서 막 잡아당기듯 질주하는 모습이 열심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지 알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 사랑합니까? 사랑함으로 허물을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들어내고 약점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누구나 실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홍수 사건을 격은 노아가 포도농사 후에 긴장이 풀렸는지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취해서 옷을 다 벗고, 하체를 들어내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가 부끄러운 하체를 들어내서 자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 큰 아들과 셋째 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하체를 들어내고 주무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이불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하체를 잘 덮어드립니다. 노아가 술에 깨어났을 때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합니다. 그리고는 샘과 야벳을 축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허물과 약점을 덮어주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선대해야 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는 “원망 없이 대접하라.”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은 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접은 식사 대접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존경을 받고 싶으면 너희도 남을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원망 없이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접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대접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했더니 그것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어 이삭을 얻게 됩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을 대접했다가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됩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잘 대접했더니 여리고가 멸망할 때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아를 잘 대접했더니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의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잘 대접했더니 자녀를 얻게 되었고 그 아들이 병으로 죽었을 때 살리심을 입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대접하는 분이되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접할 때는 원망 없이 하십시오, 대접하고 나서 뒤에서 군소리 하지 말고, 기쁨으로 대접하십시오. 이는 봉사하는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아름다운 찬양으로 영광 돌렸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찬양하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은 아니한 것만 못합니다. “원망 없이 대접하라. 서로 사랑하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선한 청지기는 이 마지막 시대에 서로 봉사해야 됩니다.

본문 10절, 11절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슴으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오늘 성경 본문말씀에 선한 청지기는 서로 봉사해야 되는데 각기 은사를 받은 데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에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긍휼, 구제의 은사등 다양한 은사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는 방언, 영분별, 통역, 병고침의 은사 등 수십 가지의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형제와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애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두고 있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여러분 이 만물의 마지막 시대에 내게 받은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섬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11절에 “누구든지 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하는 것처럼 하라”고 합니다. 이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하는 것 같이 하지 말고 그 모든 은사를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함으로 내가 의를 받고 내 의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좀 물질의 여유가 있어서 다른 어려운 사람을 구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려운 상황 속에 도움을 받으니 너무 고마워서 도와주어서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한다면 그는 인사를 받지 않고 “저한테 인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저에게 물질을 맡기시면서 어려운 사람 있으면 구제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맡기신 주인의 뜻에 순종해서 저는 전달만 한 것이기에 감사는 하나님께 하세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고 맡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 받을 자가 아닙니다. 내가 감사 받을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남의 재산을 한 3년 동안 관리하다 보면 때로는 자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내서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니기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떠날 때는 모두 두고 떠나 가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 주신 힘과 능력으로 꼭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어릴 때에는 예배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큰 결단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면서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무언가 한 가지 남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카드를 보니 이런 시가 있었습니다.

한 곡의 노래가 순간의 활개를 불어 넣을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 울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의 시작일수도 있고,
한 마리 새가 봄을 알릴수가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의 기운을 줄 수가 있고,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 할 수 있다.
한 줄기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고,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두움을 몰아 낼 수 있으며,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여러분 우리의 작은 봉사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고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작은 수고가 교회의 부흥의 밑 그름이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여러분 은사에 따라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청지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가려 켜 성경은 그분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날에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늘 깨어있는 청지기가 될 때 우리 주님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남편들이 중동에 가서 일한 때가 있었습니다. 남편들이  한국생활이 어려워 중동에 자원해서 모래 바람과 싸워서 열심히 돈을 벌어 한국에 보냅니다. 지혜롭고 훌륭한 아내라면 남편이 열심히 벌어 보내준 돈을 잘 저축을 해서 부금도 넣고 집도 사고 남편이 올 때 기쁨을 줄 것입니다. 아이들을 잘 관리하고 공부를 잘 시켜서 남편에게 자랑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리석고 미련한 부인이었다면 남편이 떠나고 나서 시간이 지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남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가 사업자금이 필요하니까 남편이 보내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다 날려 버리고 자식들은 돌보지 않아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대학도 포기해 버리고 집안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남편이 귀국을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 부인이 남편을 만날 생각을 하면 두렵고 떨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지혜롭고 훌륭한 아내라면 남편이 보내준 돈을 잘 모아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했다면 남편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쁨이 될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기다려질까요? 아니면 그분 만나기가 두려울까요? 이 마지막 시기에 여러분은 선한 청지기가 되어 깨어서 기도하시고, 서로 사랑하시고, 서로 봉사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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