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극복의 결과에는... (눅 19:1-10)

  • 잡초 잡초
  • 188
  • 0

첨부 1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의사가 성형외과 의사라고 합니다. 예뻐 지고자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수술이 밀려 있답니다. 대부분 성형수술이란 좀 부족함 부분을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로 수술을 하는데 정작 이 성형수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람은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영국의[플래트경]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관절질환을 가진 불구의 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선천적인 질병을 극복하고 1백세까지 자신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의욕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준 교훈 한마디 덕분이었다고 합니다.『너의 상처를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라』하는 아버지의 이 말을 붙들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외에도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만의 성공 비결이 특징적으로 몇 가지 있습니다. 역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픔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눈물을 성공의 재료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소설<마지막 잎새>를 쓴 유명한[오 헨리]는 시골 은행원 출신인데, 재직 시에 부정 지출한 일 때문에 옥살이를 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입니다.[프랭크린 루즈벨트]대통령은 39세까지 소아마비 증세로 다리를 절고 고생했지만 은퇴하는 그날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사상 처음으로 4번이나 지낸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음악가[슈베르트라]는 어떻습니까? 가난에 지쳐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던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피아노 한 대 없는 음악가로<아베마리아>같은 유명한 곡을 남겼습니다. 그것도 오선지 한 장 없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서 말입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용기 있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사에는 늘 어려움과 재난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 맞는 성공과 명성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성공하며 살기를 원하시지 실패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현실이 아프게도 주어지고, 슬픈 현실이 주어지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우리를 실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성공하게 하기 위한 시험일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살려면 현실이 어떠하든지 몇 가지의 자기 극복의 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역시 소유에 대한 개념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유라고 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내가 번 돈만이 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공짜로 돈이 백만 원 생겼다고 합시다. 그건 누구의 것입니까? 공짜로 주어진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얼마를 가졌든지 땀 흘려서 내가 번 돈만이 내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소유의 조건은 관리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관리 할 수 있는 만큼만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질도, 능력도 내가 스스로 관리하고 조절 할 수 있는 만큼만이 내 것입니다. 내가 관리 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남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선한 대로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여러분의 은행 통장에 있는 돈은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미안하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까요? 누구 것인지... 오늘 저녁에 내가 죽는다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좋은 일에 쓴 것만 내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개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간은 소위 말하는<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의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여기에서 무슨 영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벗어나야 할 인간굴레의 틀은 열등감입니다. 이것 또한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망하게 하는 악성 종양입니다. 이 열등감이 때로는 나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가 이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이 열등감이 결혼의 선택에서부터 장애를 일으킵니다.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것을 가만히 보면 대개는 그 열등감을 보상해 줄 상대방을 찾게 됩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을 구합니다. 못 생긴 사람은 이왕이면 잘생긴 사람을 찾습니다. 집안 배경이 좋지 않은 사람은 같은 값이면 집안 배경이 좋은 사람을 찾습니다. 학력이 낮은 사람은 기왕이면 학력이 높은 사람을 원합니다.“이왕이면...기왕이면...같은 값이면...”합니다만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사실 열등감이 숨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뛰어 넘기가 너무 힘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이렇게 어렵다는 자기극복에 성공한 사람,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자기 결점 투성인 사람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 부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땀 흘려 모은 결실이라기보다 착취하고 불의를 저질러 가면서 부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소유에 대한 올바른 개념으로 본다면 자기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남의 행복을 만들어 준 대가로 받은 돈이 아니라 남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하고 모은 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 한 푼 두 푼 받아 모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다가 양심이란 게 있어서 마음이 무거워지거든요 그래서“어느 정도만 모으면 손을 떼야지”했는데 그 생각도 자꾸 무디어져갔고 어느 새 양심에 거리낌도 없고 마치 자기가 노력해서 모은 완전한 자기소유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삭개오의 직업인<세리장>정도이면 남의 것을 착취하는 것 이외에도 교제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먼저 찾아와서 무언가를 주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세리장이라는 지위자체가 돈을 벌게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높은 지위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삭개오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이런 사람들이고 그렇게 살다보니까 인간으로서의 양심에 한계가 온 것입니다. 자기를 경멸하며 쳐다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만 이제는 소유라는 개념에 대한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은 흔들리면서도 그 누구에게 단 한마디도 상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이 얼마나 인간답지 못한 일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슴 깊이 묻어두고 말도 하지 못하고, 실행도 하지 못하고 고민했는가를 8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얼마나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납니까?

본문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잘못을 추궁하는 장면이 나오지가 않습니다.“너는 왜 남의 것을 강도 짓 하듯이 빼앗았느냐"고 한 마디 하기를 했습니까?“너는 이제부터 그 더러운 세리장 노릇을 청산하라”고 하길 하셨습니까?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선 채로 예수님께 먼저 자기의 결심을 아뢰고 있습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고민한 흔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소유란 순수한 자기의 소유를 말합니다. 즉 정당한 대가로 받은 월급을 모아놓은 돈의 절반을 선한 일에 쓰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무슨 말입니까? 소유는 순수한 자기의 월급을 말하고 빼앗은 것은 빼앗은 것대로 따로 계산해서 갚겠다는 말이거든요. 자기의 행위를 부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남의 것을 빼앗았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되는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네 배로 하겠다고 자기결의를 보여 줍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 한 것에다 5분의 1을 더하여 보상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를 갚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회개, 자기극복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바로 앞장인 눅18장에는 경건한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한 부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던 경건 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수준 높게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 나왔다가 예수님께로부터“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처방을 듣고 심히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율법도 잘 지켰고, 영생에 대한 갈망도 있어 보이는 소위 신앙적 수준이 좀 있다고 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삭개오는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죄인 된 마음으로 누적된 죄책감을 가진 열악한 환경에서 나왔어도 자기의 단점을 극복한 얼마나 아름다운 자기극복 신앙입니까?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삭개오가 극복한 것은 열등감입니다. 삭개오의 키가 정확하게 얼마 만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성경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지나가는 주님을 볼 수 없을 정도의 키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작긴 작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뽕나무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부끄럽기 그지없고 더군다나 지금 그 곳에는 자기 지위에 아부하며 돈을 갖다 바치던 사람들도 숱하게 쳐다보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 하에서 뽕나무로 기어 올라가는 삭개오를 상상해 보십시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가 돈을 받고 토색 할 때는 키 작은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키 때문에 돈을 못 받은 적도 없었고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지위가 키 작다는 것으로 도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일이었고 자기극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는 키 작은 것이 열등감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 신가를 소문으로만 들었고 자기 삶에 어느 정도 회의를 느끼면서 마음으로만 만나고 싶었던 그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에 나서기는 했지만 길거리에 늘어 선 인파를 보면서 의기소침 할 수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기의 행위와 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할 자신의 처지가 이제는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밀려옵니다. 그러나 놀랍습니다. 지금 삭개오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키가 작은 열등감을 의식하지 않고 뽕나무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갈 만큼 어느 새 자기극복에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자기를 극복해야 할 사람은 삭개오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소유에 대한 착각>이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이는<열등감>이 우리를 진실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앞에<뽕나무>가 준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뽕나무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극복하고 올라가는 자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뽕나무가 주님을 만나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뽕나무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왜일까요? 바로<자기극복의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는 자기극복의 결과에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