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성탄의 경배자 (마 2:1~12)

  • 잡초 잡초
  • 172
  • 0

첨부 1


“집에 들어가 아기와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 2:11)

  성탄절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탄일의 그 당시, 분봉 왕이었던 헤롯은 아기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나실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동방박사들의 메시야 나심에 대한 말을 듣고 소동하였지만 예수님을 찾으려고 경배하려고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찾아오면 연말연시의 들뜬 기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흥취와 소란의 시간을 갖고, 장사꾼들은 매상을 오리고자 상술의 수단방법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는 성탄절의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경배를 받을 예수님은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설자리에 상품화된 싼타크로스가 서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될 자리에 만취와 소란만이 메아리치고, 탈선과 들뜬 흥취만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성탄의 감격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비밀을 깨닫는 탄일의 경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의 날을 주신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 베들레헴 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는 헤롯왕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천체의 별을 연구하던 동방의 박사들이 특별한 별의 출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탄일을 바로 맞이하고 참되게 축하한 경배 자들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박사들은 이름은 ‘카스칼’ ‘벨기올’ ‘발다살’이라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사막과 무서운 맹수가 도사리는 험난한 길을 지나 예루살렘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박사들은 헤롯 왕실에 들려 메시아의 출현의 징조를 설명하며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헤롯왕은 당시 유대종교의 전문가인 대제사장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예언자들의 예언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서인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는 말씀을 들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별이 멈추어선 곳의 아기예수를 찾아 준비해온 귀중한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인류를 죄악가운데서 구원하시고자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을 축하하는 참된 경배 자는 누구입니까? 구세주 예수님을 참되게 맞이하는 경배 자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일을 참되게 축하하며 우리를 찾아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바로 맞이하는 경배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동방의 박사들의 모습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위의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박사들은 하늘의 천체의 별들을 바라보며 하늘의 징조를 기다리며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징조를 찾고자 위의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아기예수의 탄일을 축하하며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바벨론 사람이라는 이론이 거의 지배적입니다. 고대 바벨론 사람들은 천문학 연구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 분야에 참여했습니다. 기원전 597년 바벨론의 침입을 받은 유다의 멸망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 유리된 그들은 그들의 고국을 그리며 그들의 고향 시온을 그리워하며 자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돌아갈 날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이일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가 나타나시면 자신들을 자유하게 하시리라는 믿음 속에 메시야의 오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야를 대망하는 신앙은 천체의 별을 연구하는 바벨론 젊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영향이 박사들에게 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이 전해들은 전승에 따라, 위대한 분이 이 땅에 태어나신다는 기다림 속에 위의 별들을 연구하며 징조를 찾았습니다. 그 징조가 나타나기를 끊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한별이 나타나자 그별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자리는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정황과 사건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삶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지라도 신령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의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 신령한 세계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깨닫는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며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은총을 베풀고자 징조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찾고 추구하는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을 경배하는 기쁨과 감격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위의 세계, 곧 영적세계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잎이 돋고 열매를 맺음을 보아서 시기를 분별하듯,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징조를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세계의 추구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찾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하나님의 징조가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고 분별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줄 아는 영적인 사람에겐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삶이 더욱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를 경배하는 기쁨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을 따라 갔습니다.

  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을 따라 예수님께서 나신 곳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역사는 특별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낮에는 광야의 뜨거운 길에서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보호하셨고, 밤에는 차가운 기온 중에 뜨거운 불기둥으로 춥지 않도록 돌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경배한 박사들에게는 특별한 별이 나타나 박사들을 인도하시고 안전한 길의 여행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말씀가운데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15: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돌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말씀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되게 만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만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하는 사람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예수님을 경배하는 기쁨의 삶을 누립니다.
  말씀에 따라가십시오. 그리고 순종 하십시오 그곳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곳에 참된 경배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여 아기예수께 드렸습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을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나라의 토산물 중에서 제일 값지고 귀한 예물을 가져다 드리며 경배하였습니다. 박사들의 예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황금은 왕을 표현하는 선물이며, 유향은 대제사장을 표하는 것이며, 몰약은 죽음을 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은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유향은 신께 드리는 제의적 용도로 드리는 물질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고 몰약은 시체에 발라 방부제로 쓰인다는 점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나의 예물은, 예수님을 향한 나의 고백을 어떻게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왕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분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경배자입니다.

  예물의 두 번째 의미는 선물로서의 기능입니다. 선물로서의 기능은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고 헌신입니다. 박사들은 자기의 최고의 것을 드리는 사랑을 드렸고 최고의 것을 희생하는 헌신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선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내게 있는 뜨거운 사랑, 간절한 믿음, 확신 있는 소망, 하나님 앞에서 적은 것이고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보잘 것 없는 것 일지라고 예수님을 위한 정성을 다하는 사랑과 희생이 될 때,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는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된 전설 가운데 아기 예수님이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던 길에 일어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헤롯왕의 예루살렘의 두 살 이하의 아기학살을 피하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가 천사의 지시를 받아 아기예수를 안고 피신하는 중 날이 저물어 쉴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쉴만한 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이도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와 함께 요셉과 마리아는 동굴로 들어가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난히도 세차게 바람이 불었기에 동굴 안에도 바람이 들어와 세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거미 한 마리가 이 광경을 보고는 “내가 이 추운 날 아기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미는 동굴입구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춥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드려야지,” 그리고 열심히 거미줄을 쳤습니다. 거미줄이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거미줄로는 아기예수님을 따뜻하게 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 예수를 잡아 죽이라는 헤롯왕의 명령을 받은 헤롯의 군대가 이 동굴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중 한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굴을 수색해 보도록 하지, 여기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자 그중 다른 병사가 동굴 입구까지 다가와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것 보게. 여기 거미줄 좀 봐. 사람이 들어갔다면 이 거미줄을 걷고 들어갔을 것 아닌가. 그런데 거미줄이 꽤나 겹겹이 쳐져 있지 않은가. 이 속에는 사람이 없는 게 분명해. 어서 가자구.” 결국 그들은 동굴 앞을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춥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보려고 했던 최선을 다한 거미의 사랑과 헌신은 아기 예수와 요셉과 마리아의 생명을 구하는 값진 예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가진 좁은 마음 또는 부족한 인격,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 보잘것없고 하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헌신으로 사용될 때,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올해도 온 누리에 성탄의 날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우리에게 오신 뜻 깊은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찬양하는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고자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탄일을 바르게 맞이하는 경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방박사와 같은 경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경배자의 모습 속에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과 평화가 우리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 경배하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변화와 승리의 축복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김성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