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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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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도 1월 영락교회 부목사가 되었을 때 그해 영락교회는 모든 부목사들에게 차량을 한대씩 지급해 주었습니다. 교회는 차량을 지급해 주면서 목회뿐만 아니라 사적인 용도로도 사용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넓은 의미의 목회라고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그 차를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다니곤 했었습니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차를 가지고 전국으로 휴가를 다닌 것이 평생의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좋은 추억이 되었을 뿐 아니라 덕분에 아이들과 많이 친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다 컸는데도 지금도 부모인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실제로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이제 쉽지 않아졌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강원도 설악산엘 주로 갔었습니다. 설악산에 영락교회 수양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인가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에서 주문진 쪽으로 내려가다가 북분리에 있는 아주 작은 해수욕장엘 가게 되었습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가족과 함께 지내기가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 종일 모래사장에 텐트를 쳐 놓고 지내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곳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그곳 아이들은 마치 자연 박사와 같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바닷가 바위에 돌아다니는 온갖 벌레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주 그 아이들 때문에 횡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그 해수욕장 바다에 조개가 많다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바다에 들어가 발뒤꿈치를 좌우로 돌려 비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조개들이 발에 닿았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잠수를 하여 그 조개들을 건져내었습니다. 잠수라고 해야 물이 가슴에 오는 정도에서의 잠수였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수영도 하지 않고 모든 식구들이 다 바다로 들어가 발뒤꿈치로 조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만 모래를 비벼도 금방 조개가 찾아졌습니다. 어른들이 발뒤꿈치로 조개를 찾아내면 아이들은 신나게 잠수를 하여 조개를 건져내었습니다. 그날 정말 엄청난 조개를 잡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정말 배가 터지도록 조개를 먹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낸 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서 조개를 잡으면서, 문득 그 엄청난 조개를 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셨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생각이었지만 그 평범한 생각이 엄청난 감동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 조개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 그리고 들과 하늘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그때 정말 처음 실감 있게 느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후 창세기를 보니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의 목적과 중심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인간은 어리석어 집니다. 죄로 말미암은 어리석음 중에 최고의 어리석음은 이 놀라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나 진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강당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올갠과 피아노,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음향기기, 강대상, 마이크, 의자, 시계, 조명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그 누구도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한번도 본 일이 없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런 것들이 제법 정교하게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져서 사용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 압니다. 만일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를 절대로 온전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이 강당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말 하이테크입니다. 품질이 다릅니다.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세상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면 보지 않아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자동차를 타면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탄복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전화를 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면. 특히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감탄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열 몇 시간씩 여행을 하면서, 정확하게 그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을 보며, 그 엄청난 무게의 비행기가 떠서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며 그것을 만든 인간의 능력을 가늠합니다.

똑같은 식으로 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며,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생명들을 보며,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조화하며 존재하는 것을 보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을 보며,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여름이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느낍니다. 두 자리 아이큐만 있어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한 분이시라는 것과 그 분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최선을 다하신 창조의 중심과 목적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중심과 목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중심과 존재목적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온 관심과 사역은 다 인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아담이 죄짓기 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와를 사랑했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와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 중에도 가장 소중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성령을 받아 가장 순수한 인간이 되었을 때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네 것과 내 것을 따지고 구별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남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됩니다. 사랑이 점점 식어지게 되면 자신의 삶의 중심이 점점 자기 자신이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중심은 언제나 우리이고 하나님의 존재목적은 언제나 우리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고, 안 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사탄도 할말이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탄이 송사도 하지 못합니다. (롬 8:33)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신가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존재중심과 존재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만큼이나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만큼이나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유산을 요구했던 패륜아의 말로는 돼지우리에서 돼지들이나 먹는 쥐엄열매를 건져먹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에서 하나님으로 비유되는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잊지 못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탄을 통하여 보여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와 한 차원 더 다릅니다. 성탄의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돼지우리에서 거하시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우리와 함께 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성탄의 사랑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사랑이며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 사랑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사탄도 감히 우리를 송사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합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ekl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면 도살 당 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라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롬 8:31-39)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 보면 천군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평화라는 말씀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란 무엇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평화를 ‘No Problem으로 폴었습니다. 평화를 그렇게 풀고 보니 평화가 한결 이해하기 쉽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풀려서 더 이상의 문제가 없는 ’no problem의 상태가 평화입니다.

문제가 없어서 no problem이 아닙니다. 아까 읽어 드린 로마서 8장에 봐도 문제투성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문제들을 대표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문제 상황이 아주 심각하게 꼬여서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마치 도살당할 양과 같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되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no problem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환난이십니까? 곤고함이십니까? 박해이십니까? 기근이십니까? 적신이십니까? 위험과 칼이십니까? 그것이 심하여 마치 도살당할 양과 같이 되셨습니까?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대하여, 도살당할 양과 같이 된 그 상황에 대하여 no problem을 외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외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외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다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을 격었습니다.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캄캄한 문제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정말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참 많이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 모든 문제들은 진정한 장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내 발목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그 일 때문에 꼭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오늘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우연히 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풀어 주신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그 결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그것을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라고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깊은 사랑에 빠져 그 존재의 의미와 중심과 목적이 우리 인간 즉 저와 여러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 함으로 세상이 망하게 되었고.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그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결국 이기고 해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고난 자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 자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 고난과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그 결박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는 하나님,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땅에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왜곡된 세상에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으면 우리의 삶은 평화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문제 많고 힘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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