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평화의 아기 (사 9:1~7)

  • 잡초 잡초
  • 450
  • 0

첨부 1


평화 없는 세상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언론에서 10대뉴스를 선정합니다. 아직 10대뉴스가 나오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하지만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사건들이 10대뉴스에 들어갈 것 같습니까? 북한의 핵실험이 빠질 수 없겠지요. 그리고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 사건도 꼭 들어가겠고, 사상 최악의 경제, 바다 이야기, 부동산 값 폭등과 반값 아파트, 한미 FTA협상, 동남아 쓰나미 해일이나 미국의 태풍 카트리나 등 기상이변, 조류독감, 건설노조에 의한 포스코 본사 점거,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UN 사무총장 당선, 월드컵 결승전 지단 박치기 사건도 들어갈지 모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가운에 우리 얼굴에 웃음을 피게 할 만한 좋은 소식은 몇 개나 됩니까? 겨우 하나나 둘쯤 될까요? 나머지는 모두 우리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아픈 소식들뿐입니다. 정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실감나고, 온통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어지럽고 힘들게 한 일들만 많았습니다. 정말 아무리 지난 한 해를 돌아보아도 우리 마음속에도 그리고 세상에도 평화는 찾아볼 수 없는 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안과 고통을, 이 평화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마음속의 곤고함이나 무거운 짐들을 해결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을 방법을 나름대로 찾습니다. 개인적인 평화를 위해 명상을 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분들이 있더군요. 그래서 요즈음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요가나 명상 프로그램이 대 인기라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가부좌를 틀고 동양적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이 사람들 말대로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보십시오. 마음이 편해질까요? 눈을 감으면 답답한 일들이 더 떠오르고 명상에 잠기면 잠길수록 점점 마음은 무거워질 뿐 결코 내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명상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속에 아픔이나 무거운 일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탄절과 연말마다 세상 사람들은 술 먹고 망년회(忘年會) 하며 지난 해 나쁜 기억을 잊으려 합니다만 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마음은 무겁고 괴로워집니다. 절대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습니다. 반기문 장관이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UN이나 여러 평화기구, 단체를 만든 것도 이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입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방법이 정말 인류에게,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어떤 기구로도,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이 세상에는 절대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샬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2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평화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 평화를 원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전쟁을 많이 겪었고 또 다른 민족의 압제를 많이 당했기에 이 평화를 누구보다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며 '샬롬'(평화)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9장에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러한 갈망이 잘 나타납니다. 1절부터 보면 그들이 당하던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는 낱말들이 너무도 많이 나옵니다. 함께 본문을 보며 찾아봅시다. 1절에만도 '고통'이라는 낱말이 나오고 또 '흑암'도 나오고 '멸시'라는 말도 나옵니다. 2절에는 '흑암' '사망' '그늘진 땅'이 나옵니다. 4절에는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가 나옵니다. 5절에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전쟁과 압제,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어디에서 희망이 없고 그들이 원한 샬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10대뉴스를 보고 절망하는 것과는 상대가 안 되는 크나큰 절망과 고통이 이스라엘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절부터 다시 봅니다. 이 고통과 흑암이 사라지고 멸시 당하던 땅이 영화롭게 됩니다. 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췹니다. 3절에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이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4절에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어집니다. 5절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집니다. 이 모든 표현은 진정한 평화가 샬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6절에 보니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날 때 가능해집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될 때 가능해집니다. 그 아기가, 그 아들이 우리에게 태어나시면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며, 그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이며, 특별히 '평화의 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진정한 평화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 아기'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한 아들'이라면 누구의 아들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님입니다. 바로 '한 아기'요 '한 아들'이 태어나 영원한 평화를 줄 것이라는 이 이사야의 예언이 신약에 와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누가복음 2:14에 보면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 천군과 천사들이 이렇게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예언과 성취처럼 아기 예수님은 성탄절 밤에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샬롬을 주기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태어난 아기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이 문제 많고 어지러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안아줌

첫째로, 진정한 평화는 '안아줌'에서 시작됩니다.

1995년 10월 미국의 한 마을에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몸무게가 채 1㎏도 안 나가는 조산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쌍둥이 가운데 언니 카이리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건강을 회복해 갔지만 동생 브리엘은 맥박, 혈압, 호흡 등이 모두 경고 수치를 넘길 정도로 위급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생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한 간호사가 이런 생각을 해냈습니다. 혹시 두 아이가 함께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것처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으면 건강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처럼 보였지만 놀랍게도 간호사가 언니를 데려와 동생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 동생의 몸 상태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언니가 가냘픈 손을 동생의 어깨에 얹자 의료진도 속수무책이던 동생의 몸 상태가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지난 12월 17일 주일 SBS 방송 스페셜에서 '백 마디 말보다 소중한 단 한 번의 포옹'이라는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호주 시드니 중심가 거리에서 2년 넘게 "안아주세요"(Free Hugs)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후안 만이라는 청년이 소개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이들과 수백, 수천 번 포옹을 나누는 그의 동영상이 인터넷으로 퍼져 나가면서 세계 각국에는 서로를 얼싸안는 '프리 허그' 캠페인이 번져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메마른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서로를 포옹하며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포옹은 인간의 독특한 애정의 표현방식이며 사랑을 전하고 공동체 의식을 퍼뜨리는 인사법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서로 만나면 포옹으로 인사를 했고, 슬라브족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서로를 끌어안아 줍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피부를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전하는 안아줌을 통해 고립감을 극복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합니다. 말기 암 환자들과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서로 포옹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는 장면도 나오고, 위기를 맞던 부부와 부모 자녀 사이가 포옹을 통해 회복되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여러분은 부부 간에 혹은 부모 자녀 간에 하루에 몇 번, 아니 1년에 몇 번이나 포옹을 하고 지내시나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자리에서는 좀 그렇고 집에 가서 꼭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을 안아 주십시오. 놀라서 도망갈까요? "이 사람이 미쳤나?" 할까요? 그래도 좋으니 꼭 안아 주십시오. 진정한 애정은 이렇게 작은 표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이렇게 체면도 내려놓고, 서로 간의 불신과 단절의 벽을 허무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아줌입니다. 안아줌으로 서로 간의 신뢰와 친밀한 관계가 회복됩니다. 내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안아주고 그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품어주고, 상처 받은 영혼들을 안아주고, 메마른 이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사람들을 안아주면 신뢰와 사랑이 회복되어 진정한 평화가 가능해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한 둘째아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후레자식을 품어주겠습니까? 다시 받아주겠습니까? 천만에요. 그런데 아들이 돌아올 때 아직 거리가 먼데 저 멀리 서서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그래서 둘째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눅 15:20). 배반당한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았다는 것은 이미 그 아들을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껴안으니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들을 안아주니 진정한 평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바로 우리를 용서하고 안아주신 하나님이요, 용서 받은 아들은 바로 죄인인 우리들 자신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죄인은 우리를 껴안고 용서하고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품어주고 안아주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눠줌

둘째로, 진정한 평화는 '나눠줌'에서 시작됩니다.

며칠 전 저 멀리 미국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의 주인공은 바로 '비밀 산타'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래리 스튜어트라는 58세 된 남자입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성공한 기업가로 알려진 사람인데 그가 지난 26년 동안이나 남들 몰래 선행을 계속해 온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26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익명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20달러, 100달러씩 돈을 나누어주어 자그마치 130만 달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백만장자가 되어 이렇게 남을 도와주고 있지만 1971년 겨울만 해도 그는 거지 신세였습니다.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회사가 망해 이틀 동안 굶은 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무작정 한 식당에 들어가 아침을 시켜먹고는 지갑을 잃어버린 척 했습니다. 그 때 식당주인이 자리로 와서는 바닥에서 20달러를 주운 척하며 "이 사람아, 자네가 떨어뜨린 돈일세."라며 곤경에서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돈으로 식사비를 계산하고 나오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처지만 된다면 꼭 돕겠습니다."고 하나님에게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그의 선행은 26년간 익명으로 계속되었는데 최근 식도암에 걸려 간까지 전이된 바람에 치료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과 선행이 공개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비밀 산타를 해 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합니다. 한 명의 식당 주인의 나눠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또 그 한 사람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도 또 다른 비밀 산타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암 때문에 언제 죽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 아닙니까?(히 9:27) 누구든지 다 죽습니다. 다만 오늘 죽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죽을 수만 있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 나눠줌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나누는 삶을 사셨고, 마지막에는 끝내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나눠줌으로 우리를 살리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돌아가신 지 2천 년이 넘게 지났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한 번 살다 죽을 인생,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내어줌

마지막 세 번째로, 진정한 평화는 '내어줌'에서 시작됩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국의 리처드슨 선교사입니다. 당시 자바 섬에는 아직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부족 간에 늘 전쟁을 하고 서로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식인종들이 싸우다가 서로 화해를 청할 때는 자기 마을의 갓난아기 하나를 적군에게 제물로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아기를 그들은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자바 섬에서 생활한 지 2년째 되던 해 다시 부족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싸움은 점점 심해져 도무지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가 한 살 난 자기 아기를 안고 언덕에 나타났습니다.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놀란 눈으로 이 서양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자기 아이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은 것입니다. "제 아이를 평화의 제물로 바칩니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악습과 서로를 증오하는 부질없는 싸움을 중단하십시오." 그러자 쌍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공격의 외침이 아니라 평화를 기뻐하는 소리였습니다. 기독교를 거부하던 자바 섬의 식인종 부족들은 이 일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악습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를 위해 무슨 거창한 구호를 외치거나 거창한 단체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평화를 위해 내 아이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그 외아들을 '평화의 아기'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기 위해 그 외아들을 죽게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아기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의 뜻대로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고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내 소중한 것을 내어줄 때 거기에서 참된 평화는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3가지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아줌,' '나눠줌,' '내어줌'입니다. 어려운 일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나의 작은 몸짓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 기쁘고 아름다운 성탄절에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이 세상 속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