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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빈방 있습니까?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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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명절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우주와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즉 자기 땅에 오신 날이 성탄일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7절 말씀에“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4~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눌 자리가 없어서 구유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옛날 임금님의 행차 때에는 수많은 수행원과 함께 앞서가는 사람들이“비켰거라. 임금님의 행차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서 베들레헴 동네에 외쳤다면 그래도 방이 없었겠습니까? 요즈음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어느 곳을 방문할 경우 몇 달 전부터 현지를 답사하고 숙소를 준비하게 됩니다. 이처럼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미리 준비했더라면 왜 방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방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 즉 낮아지신 모습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표시 없이 일반인의 출생처럼 오신 모습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귀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셔야 인간의 꾸며진 모습이 아닌 평소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때에 있었던 일화라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대통령이 각 시도를 연두 순시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전남 도청을 순시하고자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도청으로 들어가는 대로변에 전나무가 잘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본 대통령은 흐뭇해하면서 가로수를 잘 가꾸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대통령의 순시에 맞추어 전시효과를 내기 위해 한겨울에 나무를 잘라서 심은 나무였다고 합니다. 만일 대통령이 오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푸르게 서있지만 그 나무는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버릴 나무였습니다. 눈가림을 하려는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천사들의 호령과 나팔소리 속에 오셨다면 수많은 무리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며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사랑의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서로 먼저 방을 내어드리고자 소란을 피웠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순간을 위해 꾸며진 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만삭이 되었음을 알지만 나라의 명령을 따르고자 호적을 하기 위해 먼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홀몸이 아닌 아내와 함께 쉬어가면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착하고 보니 늦은 밤이었습니다. 이곳  저곳 방을 구하고자 다녀보았지만, 방은 이미 다 차버렸고 빈방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타깝게도 아내인 마리아가 산고를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남편 요셉은 이집 저집 뛰어다니며“빈방 있습니까?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해서요.”라고 애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없습니다. 다른데 가보세요.” 할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우선 찬바람이라도 막아줄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짐승의 밥통인 구유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물론 빈방은 없었습니다. 빈방 이전에 그들의 마음속에 인정이 자리하고 있을 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사람들을 돌아보려는 사랑이 있을 빈방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들의 안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열심히 섬겼습니다. 요즘의 주일과 같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일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바늘 하나를 옮기는 것까지도 노동으로 여겨서 안식일에는 바느질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철저히 드렸습니다. 기도생활에도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빠짐없이 기도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도 했습니다. 옷 술에는 성경을 꽂아 다녔습니다. 이들이 즐겨 암송한 성경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신명기 10:19)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19:18)

하신 사랑의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흠이 없어 보입니다. 일등신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지금 막 출산하려는 마리아 앞에 보여준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몰인정이었습니다.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있었던 것은 신앙의 껍데기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의 성경구절은 암송하지만 그것은 기억된 두뇌에서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일 뿐 가슴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중에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해산하는 여인에게 방 한 칸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유에 탄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훗날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시기를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외모는 천사 같았으나 내면은 사탄의 요소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이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 내면의 모습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집안을 장식하고, 예쁜 카드와 친한 이웃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구유에 누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그 당시로 돌아가서 내 자신을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따듯한 방을 차지하고 누워서 쉬고 있습니다.

밖에는 어떤 여인이 해산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방이 없나봅니다. 그의 남편은 다급하게 이집 저집 뛰어다니며“빈방 있습니까? 빈방 있습니까?”라고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의 빈자리만 있다면 방은 비워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구유에 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내 마음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내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시 오직 내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내어드릴 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구유에 누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수시로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님은 천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루한 옷을 입으시고 성탄절을 맞이한 어느 도시의 큰 교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배당 앞에는 예쁜 옷을 차려입은 젊은 여자 집사들이 안내를 맞아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모습의 예수님께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안내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여기에 들어가면 안돼요.”라고 박대를 했습니다. 쫓겨난 예수님은 다른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성탄절 이브행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늦게 뒷자리에라도 앉을까 하고 들어가서 앉았습니다. 남루한 거지였기에 그에게는 악취가 났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안내원이 달려와서 밖으로 내어쫓았습니다. 그날 밤 주님은 도시 내의 교회를 다 다녀 보았지만 같은 천대만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도시를 벗어나서 시골 어느 한적한 곳의 조그만 교회를 발견했습니다. 교회당은 작고 초라했습니다. 뒤늦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예배당 바닥은 흙으로 되어있었고, 의자는 통나무 의자였습니다.

그 안에는 난로를 피워두고 몇몇 성도들이 둘러앉아 즐겁게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밤에 찾아온 불청객 거지를 보자 그들은 반가이 맞았습니다. 난로 가까이 거지를 앉혀 불을 쪼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차와 음식을 가져와서 함께 먹자고 했습니다. 모두들 둘러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아멘”하고 눈을 떴을 때 거지는 보이지 않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은 빛난 흰옷을 입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모든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31-46)

심판의 기준이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접한 사람에게 답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기준이었습니다. 낯선 병자, 헐벗고 굶주린 낯선 거지를 사랑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너무 귀족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고 불리는 9세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나이로는 4학년이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해 성탄절이 가까워오자 교회에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윌리에게 여관집 주인 역을 맡겼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와 여관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이 나와 여관에 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서 왔습니다. 아내 는 출산할 날이 찾고 쉬어야 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도 없이 마리아를 오래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시를 읽어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윌리는 정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 없어요. 가요!”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듯이 뒤로 돌아 걸어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각본에 따르면 윌리는 방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윌리는 문간에 서서 걱정 스러운 듯 눈물을 흘리며 마리아와 요셉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와요.”

물론 각본에도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써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이로 인해 연극은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수많은 관중들은 가장 뜻깊은 성탄 연극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주위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작지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은 없습니까? 헐벗고 굶주린 이웃은 없습니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힘이 될만한 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지금 내 앞에 있는지 모릅니다.

“빈방 있습니까? 빈방 있습니까?”하고 다급하게 외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차지한 따뜻한 방, 그 기득권의 방을 내어줄 수 있는 빈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욕심을 비워야 주님께 내어드릴 방이 있게 됩니다. 나만을 위하는, 내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비워야 주님계실 방이 나게 됩니다. 내 자신의 생각만을 앞세우는 아집과 교만을 버려야 주님이 계실 화평과 사랑의 방이 마련됩니다.

“빈방 있습니까? 빈방 있습니까?”하고 안타깝게 외치는 요셉의 음성을 듣고, 내가 앉은 따뜻한 방을 내어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빈 마음의 소유자, 사랑의 소유자인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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