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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변방에 비추인 성탄의 빛 이야기 (사 9:1,2, 마 2:1,2, 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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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둔 성탄 전 주일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탄절에 비추인 성탄의 빛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탄절과 관련된 사건마다 빛이 등장합니다. 사9:2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마2:2에는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눅2:9에는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었다고 했습니다. 빛은 생명을 가리키고 사랑을 가리키고 구원을 가리키고 기쁨을 가리키고 영광을 가리킵니다. 아니 빛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생명이시고 사랑이시고 구원이시고 기쁨이시고 영광이시고 하나님이신 빛이 세상에 비추인 날이 성탄절입니다. 오늘 아침 이 빛이 어디에 비추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첫째, 성탄의 빛이 비추인 곳은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이었습니다.

  성탄의 빛이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 비추이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변방인 북쪽의 스블론과 납달리와 갈릴리에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이방으로는 가는 길목이었는데 그곳을 가리켜 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사9:1을 읽습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이방의 땅 갈릴리에 성탄의 빛이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유아 시절과 소년 시절의 고향이었습니다. 공생애 사역의 무대였고 부활 후 사역의 종착지였습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2,23). 유아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눅2:39). 소년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28:16,17).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행1:10,11). 부활 후 승천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성탄의 빛이 33년 동안 비추인 곳은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이었습니다. 이방이라고 불리던 갈릴리였습니다.

  둘째, 성탄의 빛이 비추인 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먼 변방인 동방이었습니다.

  성탄을 알리는 성탄의 빛이 제일 먼저 비추인 곳은 예루살렘도 아니었고 베들레헴도 아니었고 먼 동방인 갈대아나 파사였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 여기 동방은 갈대아나 파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성경 학자들이 말합니다. 저는 왜 성탄의 빛이 제일 먼저 먼 동방인 갈대아나 파사에 비추었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 그곳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경건한 박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오신 성탄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에 국한하시지 않고 온 세상에 널리 전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성탄의 빛이 이방에 비추었고 동방에 비추었습니다. 그 성탄의 빛이 2천여 년 후에는 동방의 동방인 조선땅에 까지 비추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지적하며 찬양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성탄의 빛이 물론 이스라엘에도 비추었지만 그러나 그곳에만 비추인 것이 아니라 만민과 이방에 비추인 사실을 시므온이 지적하며 노래했습니다. 성탄의 빛은 만민 앞에 비추었고 이방에 비추었고 동방에 비추었습니다.

  이 빛을 제일 먼저 보고 이 빛을 따라 와서 아기 예수께 무릎을 꿇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동방의 박사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들이었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래 이방인들이었던 저와 여러분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일상 생활을 다 제쳐놓고 시간과 정성을 다 바쳐 아기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탄의 빛이 비추인 곳은 베들레헴 도성 안이 아닌 도성 밖의 변방이었습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눅2:7-9). 저는 왜 성탄의 빛이 베들레헴 성밖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에게 비추었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 베들레헴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너무 바빠서 아기 예수를 맞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아기 예수를 맞을만한 장소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비록 사회에서는 소외된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경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오신 성탄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의 상류층에 국한하시지 않고 하류층에 널리 전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성탄의 빛이 도성 밖 들에서 양치던 천민 목자들에게 비추었습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성탄의 밤 자기들에게 나타난 영광의 빛을 보고 그리고 천사들의 지시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달려가서 아기 예수께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눅2:15-19). 그들 목자들은 동방 박사들과 함께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들이었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탄의 빛이 비추인 세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이었습니다. 북쪽의 스블론과 납달리와 갈릴리였고 동방의 갈대아나 파사였고 베들레헴 도성 밖이었습니다. 히브리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성탄의 밤과 새벽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아닌 동방에서 온 이방인 박사들에게 성탄의 빛이 먼저 비취었고 그래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멸시를 받던 천민들 목자들에게 성탄의 빛이 먼저 비취었고 그래서 목자들이 아기 예수에게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 

  이천여 년이 지난 2006년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 자세와 몸 가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첫째로는 동방 박사들이나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께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간과 정성을 드리며 아기 예수께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백부장 고넬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예수에 미쳤던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고통의 몸으로 수 천 개의 찬송시를 써서 부른 패니 크로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예수 그 이름'을 온 몸으로 노래한 송명희 시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흑암과 사망의 땅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천민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사랑과 생명과 소망의 손길을 펴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는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조선 땅에 찾아와 그 사랑의 빛을 비추이고 그 사랑을 전하며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아프칸에서 사역하고 있는 윤주홍 선교사는 오늘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느 곳으로 오실까 생각하다가 아프간으로 갔다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지난 추수 감사절 때 여러분들이 드린 감사 헌금이 1700여 만원이었습니다. 그 헌금으로 가야교회 등 17개의 개척 교회에 340만원을 보냈고, 중국과 우간다 등 5곳 선교지에 500만원을 보냈고, 조병만 목사 김치한 목사 손현기 목사 등 7곳에 구제비 260만원을 보냈고, 동북아 평화 연대와 한정협 등 5기관에 600만원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17일 저녁 “사랑의 음악회”를 열어 불우이웃 50여명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작은 몸짓을 했습니다. 내일 성탄절에 여러분들이 드리는 성탄 헌금도 북한 동포들이나 아프간의 어린이 등을 돕는 선교비와 구제비로 전부 사용할 것입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아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살지는 못해도, 모슬렘과 집시들과 북한의 병든 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돕지는 못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무릎 꿇고 주님께 경배하고 그리고 주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몸짓이라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보배합을 열거나 옥합을 깨트려 주님께 경배하는 일이 아득한 옛 추억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망과 위로와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할 불우한 이웃과 북한 동포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멸시와 증오와 정죄의 대상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드려 아기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우리들의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불우한 이웃과 이방을 향해 사랑의 몸짓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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