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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여자의 후손 (창 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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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없다'라는 구호는 실로 처절하면서도 뜨거운 외침입니다.
  적어도 이런 말을 하게 될 정도라면, 우선 그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 보통 비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좀 힘들고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누가 보아도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라야 이런 외침이 어울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분명히 절망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희망을 붙잡으려 하는 이 불굴의 자세는 인생의 모진 풍파를 직접 맛본 모든 사람의 심금을 뜨겁게 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로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과, 역설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희망이 있는 절망'은 천양지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원래는 '기쁜 소식'(good news)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무슨 '복을 내려주는 소리'라기보다는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에게 전해진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소식이야말로 최고의 복된 소식임이 틀림없으므로 그냥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복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의 첫 네 권을 '사복음서'(the four Gospels)라고 부르는 것은, 그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뚜렷하게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가 '원복음(原福音)'(the first Gospel)이라고 부르는 것이 또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무수히 많지만 그 첫 예언이 바로 이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사실상 이 창세기 3장은 '실낙원'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이 '완전타락'이라는 최저,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비극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절망스러운 상태에 빠진 인간을 그냥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창세기 3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놀라운 '기쁜 소식'으로 찾아와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여자의 후손'의 약속이 성취된 성탄의 절기를 맞이하면서 과연 이 '원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기쁜 소식'을 선포해주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범죄 타락 직후에도 즉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8절부터 10절의 말씀에 "8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절부터 7절까지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단 하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범죄하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단은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 전에 없던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2장 25절에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고 기록된 대로 그전에는 전혀 없었던 수치심이 이제 갑자기 생기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낯이 뜨겁게 되는 것은 지금도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서 곧바로 나타나게 되는 반응인데, 생전 처음 그런 창피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된 아담과 하와는 그 수치심을 어떻게 감추어보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부작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이제 하나님을 회피하려는 자세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의인화시켜서 묘사한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그 에덴동산에서 사람과 지극히 가깝게 교제하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일단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는 이전에 그처럼 친근하게 사귀던 하나님이 이제는 두려운 대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던가 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곧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무 사이에 숨으면 그 두려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 얼마나 유치한 생각이었습니까?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 쪽의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당신을 배반하고도 오히려 더 피하고 숨으려 하는 사람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아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단의 첫 번째 질문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을 피하려는 죄인을 오히려 찾아주시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부터 13절에 "11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먼저 찾아와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던지신 두 번째 질문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미 저지른 일을 몰라서 물으신 질문일 리가 없습니다.
  벌써 다 알고 계시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뱀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그냥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라고, 여기서처럼 '네가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질문 없이 곧장 저주를 내리신 것은, 사단에게는 그런 기회를 줄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런 선하신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아담은 하와를, 그리고 하와는 뱀을 비난하면서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했습니다.
  특히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라고 말함으로써 은근히 하나님께 책임 전가를 하기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죄의 유혹에 대하여 이렇게 쉽게 넘어갈 뿐 아니라, 범죄한 후에도 더욱 하나님 앞에서 뻔뻔스럽기만 한 이런 사람의 본성을 볼 때, 그처럼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와주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아니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오고 올 모든 인류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사람을 찾아주지 않으셨더라면, 범죄한 사람 편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아 그 관계를 회복하기란 완전히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려 하기는커녕 그저 감추고 피하려고만 했던 것을 보아서도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보여주었던 태도는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의 선천적인 본성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선악과' 하나 따먹는 정도가 아니라 온갖 악한 죄들을 매일 같이 저지르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치마' 하나만 두르면 죄의 부끄러움이 다 가리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담과 꼭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죄들도 그저 다른 사람의 눈에만 가리어지면 마치 하나님도 보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나무 사이'에 숨어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유치한 생각을 했던 아담처럼, 사람들은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만 있으면 자기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추궁을 당하거나 벌을 받게 되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턱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조차 사람들은 끝까지 뻔뻔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자 때문에,' '뱀 때문에'라는 핑계는 오늘날도 '무조건 남의 탓'(It's always other's fault.)이라는 철칙으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강간을 저질러놓고도 '어렸을 때 부모의 학대를 받고 자란 탓'으로만 돌리고 살인강도 죄로 기소되어도 '부조리한 사회 환경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요즘 법정에서 흔히 듣게 되는 소위 변호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죄를 쉽게 저지르는 타고난 죄인일 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숨기고 변명하고 남에게 그 책임과 비난을 떠넘기는 데에는 모두가 다 천재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편에서 그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길이 있겠습니까?
  죄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사람이 스스로 사죄의 길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 힘으로 어떻게 회복시킬 방도란 실로 전무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처럼 '완전타락'한 사람, 죄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에게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와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의 영적 현주소가 바로 죄의 한 가운데에 빠져 있음을 일깨워주시며,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우리가 범한 죄과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해주시는 말씀은 그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으며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자범죄들을 덧붙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우리의 죄를 일깨우시고 사죄의 기회를 베풀어주시는 이 놀라운 복음을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감사감격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미 저주 받은 죄인에게 오히려 구세주를 약속해주시는 것이 또한 복음입니다.

  본문 14절 이하 19절에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정확하게 다스리지 않고 대강 넘어 가실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뱀에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뱀이란 그 동물 자체가 아니라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단을 저주하셨습니다.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는 말씀은 바로 사단이야말로 그 어떤 존재보다 더욱 큰 저주를 받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며,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뱀이 흙을 먹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로 기어 다닐 때 먼지나 흙이 그 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사단은 가장 낮고 천한 존재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사단은 "여자와 원수가 되는" 관계, 하와뿐 아니라 그 하와를 통해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와 원수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싸울 뿐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죽이려 하는 실로 심각하고도 처절한 관계로서, 한 마디로 말해서 목숨을 건 적대관계입니다.
  그런 치열한 관계는 자연히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존재가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그 싸움에서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에게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타격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넘어뜨리려는 시도를 계속함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런 '발꿈치 공격'은 결코 '여자의 후손'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머리를 상하게 하다'라는 것은 단 한 방의 급소 일격으로 순식간에 완전승리를 거둠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실 메시아께서 치르실 사단과의 전쟁을 너무나도 멋있게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분적으로 '발꿈치를 상하는' 육체적 고통을 십자가상에서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고통은 결코 메시아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권세를 순식간에 깨뜨려버리는 카운터펀치와 같은 치명적인 급소일격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사단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끄는 최대의 무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미혹하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든 것입니다.
  불순종하여 죽게 된 사람의 죄값까지도 완전히 다 갚아 없애버리셨으니, 그야말로 사단의 머리가 십자가의 일격에 궤멸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어지는 16절 이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에 대한 복종'을, 그리고 남자에게는 '소산을 얻기 위한 땀과 수고'를 벌로 내리셨으며, 둘 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범죄에 대한 저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던 대로 사람이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결과였습니다.
  죄인이 벌과 저주를 받는 것은 아무 원망할 이유도, 항의할 일말의 여지도 없는 자업자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벌을 내리시면서도 여자에게는 "자식을 낳는" 생명의 은혜를 내려주셨고 남자에게는 "식물을 먹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런 지극히 당연한 저주를 내리시기 이전에 먼저 메시아부터 약속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용서해주더라도 일단 야단치고 벌줄 것은 주고 하는 것이 순서인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한 직후에 제일 먼저 그 저주로 마땅히 죽게 된 죄인을 살려주실 계획부터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선하신 구원 계획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20절과 21절에 "20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와"란 이름의 뜻은 '생명'인데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아담이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아담이 지금 조금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망의 저주를 받은 후에 자기 아내의 이름을 그처럼 긍정적으로 지은 것은 상당히 신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바로 15절의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 즉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기 이전에 미리 내려주신 메시아 소망의 약속을 믿고 의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즉 사람이 죄값으로 인하여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죽음은 당하게 되었지만, 하와의 후손으로 오시게 될 메시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벌어지게 될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담은 그처럼 자기 아내 이름 짓는 것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고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 메시아의 사역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전에는 옷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에덴동산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옷의 필요성이 생긴 이유는 이제는 전에 없던 '부끄러움'이 그들에게 생겼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까 언급했듯이 바로 죄로 인하여 생긴 수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옷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즉 사람은 스스로 죄의 수치를 감출 길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대신 가리어주실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가죽옷이란 어떤 짐승을 죽여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의 죄를 가리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해주실 놀라운 사역을 바로 이 가죽옷의 상징으로써 미리 예언해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희망과 승리를 선언하고 계셨습니다.
  오직 저주만 받아 마땅한 처지에 빠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구속사의 최고 정점이 될 메시아를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중죄를 짓고 체포된 범인이 법정에 서게 되면 그 다음에 예상되는 순서란 뻔합니다.
  검사의 구형이 있을 것이고 판사가 선고를 내릴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범죄자가 기대할 것이라고는, 종신형을 받았다면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감형 받을 수 있는 가망성이고 만약 사형언도가 내려졌다면 그것이 집행되기 전에 무슨 기적적인 특사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면 그 판결에 대하여 무슨 항소 따위를 해보았자 아무 쓸데없고 그저 판사가 그런 감형이나 특사의 가망성이나마 남겨주는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재판에서 그 정도가 아니셨습니다.
  사람이 받아 마땅한 저주의 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먼저 용서부터 선언해주셨습니다.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벌써 특사를 베풀어주실 것부터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차기에 누가 대통령이 되어서 반드시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하고 살려줄 것입니다.'라고, 세상 법정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사망의 영벌을 언도 받게 된 바로 그 자리에서 먼저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소식,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고맙고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바로 그 복음 때문에 원래 '사망의 두려움'에만 사로잡혀야 마땅했던 죄인인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의 기쁨'이 벌써부터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이 성취된 까닭에 원래는 그저 사단에게 이리 받히고 저리 치이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우리들이 그 사단의 '머리를 밟으신' 구세주를 따라서 '온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까닭에 자신의 죄를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전무하던 저와 여러분들까지도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감격적인 복을 누리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오직 저주만 받아 마땅했던 우리 죄인들에게 오히려 구세주를 먼저 약속해주셨던 그 복음이 바로 이 성탄을 통하여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깨닫고 더욱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실로 얼마나 엄청난 반전이었습니까?
  첫 사람은 변명의 여지없이 범죄하고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타락했습니다.
  그 완벽했던 낙원의 삶을 철저히 망쳐버리고 완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적인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버리셨습니다.
  당신 앞에서 죄를 짓고도 더욱 피하고 숨기만 하려는 사람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회개의 길, 속죄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저주는 하나님 당신께서도 취소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 대신에 모든 죄의 권세를 넉넉히 이기실 구세주를 미리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최악이 있어야 할 곳에서 오히려 복음이 시작되었으며, '저주의 장'이나 '절망의 장'이 되었어야 했던 창세기 3장은 오히려 '구원의 장'과 '소망의 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결정적인 죄가 저질러진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엄하고도 무서운 저주가 선포되기도 전에, 즉시 이 '첫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사단의 권세가 사람을 대적하여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사람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난 바로 그 순간에, 즉시 이 위대한 '여자의 후손'이 예언된 것은 그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이겠습니까?
  실로 죄인에게 '기쁜 소식'이며 '절망을 깨뜨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세주의 화육강생은 범죄한 사람의 구원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망설이시다가 늦게야 마음잡고 행하신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혹은 실락원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의 화가 저절로 좀 가라앉거나 풀리게 되어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여 죽게 된 바로 그 순간 즉시 그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각의 지체 없이 발동되었습니다.
  실로 우리는 '아직 연약하고 아직 죄인되었고 오히려 더욱 하나님과 원수가 되려고만 하던' 바로 그 자리,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와주시고 불러주셨을 뿐 아니라 대신 목숨을 버려주실 것까지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해주실 구세주의 강림이라는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이 이처럼 성경의 첫 권 첫 머리에서부터 예언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대하신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택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이 얼마나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단의 간계와 유혹이 아무리 극할지라도 택함 입은 신자를 결코 넘어뜨릴 수는 없으며,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자주 실족하고 범죄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그 죄가 우리를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해주시기로 한번 약속하신 자들은 그 어떤 죄에서도 반드시 건져내어주실 것을 이 '첫 복음'을 통하여 벌써부터 확실히 선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바로 그 '첫 복음'에서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복음의 성취'가 아니겠습니까?
  사단과의 초전에서 비참하게 망했던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다시는 패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실락원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여자의 후손'을 맞이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단에 대한 완전 승리가 될 것이라고 바로 이처럼 '첫 복음'에 예언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진 멋있는 사건입니다.
  이 약속대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다시는 죄 때문에 숨지 않아도 되는 속죄의 세마포를 받아 입고 다시는 죄로 인하여 절망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저주로부터 완전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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