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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떠오르는 해, 예수 그리스도 (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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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 일이 있어서 어느 성경 사전의 ‘그리스도의 명칭’이라는 항목을 잠깐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120개 가까이 적혀 있습니다. 
거룩한 종, 구원의 뿔, 독생자, 만유의 주, 산 돌, 새벽별, 생명의 떡, 어린 양, 참 포도나무…,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어서 이름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도들을 남자와 여자, 또는 왼쪽에 앉은 분들, 오른쪽에 앉은 분들,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씩 말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하는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일낮예배는 격식을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 나옵니다. 무엇일까요?
다섯 글자로 대답하기 쉬운데 우선 한 글자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해”입니다.

2절을 보세요. 오늘은 2절을 집중적으로 여러 번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여기 나오는 해는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공의로운 해”라고 대답하기 쉬운데 예수님은 공의로운 것 외에도 다른 성품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자로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84편 11절도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화나 조크는 기억하면서 중요한 메시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들을 때 재미있고 신이 나는 설교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더 많지요.
들을 때는 지루한 것 같은데 두고두고 생각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성도들이 설교 내용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예배의 모든 순서들을 설교에 집중시키고, 문답식을 사용하기도 하고, 설교를 끝내면서 요약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힘씁니다.
그래도 잊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은 해이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 하실까요?
“예수님은 해!”

사실은 예수님은 해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다. 그 해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서 해가 가장 위대해 보이니까 그렇게 비유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을 공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해입니까?
“공의로운 해”입니다.

2절을 다시 보세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그 다음, 어떤 해가 떠오른다고 했나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예수님은 공의의 왕으로, 공의 그 자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9장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 가운데 하나인데 예수님은 정의와 공의로 그의 나라를 보존하시는 분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과 7절의 말씀입니다.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서 11장도 메시아 탄생에 대한 중요한 예언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뤄지는 평화의 나라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공의를 행하는 분임이 강조됩니다.

이사야서 11장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예수님은 공의로  허리띠를 삼는 분입니다.
사람이 허리띠 없이는 활동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공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분입니다.

공의라고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5장 24절입니다.
이 말씀은 공의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압록강이나 한강 같이 큰 강도 발원하는 곳이 있습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고 한강은 태백산맥 한 곳에서 발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의라는 강의 발원지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해입니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입니다.
2절을 다시 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그렇습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비춘다고 하였습니다.

말라기서 4장 2절은 이렇게 반역되기도 합니다.
“그 날개에  치유의 능력을 지닌 의의 태양이 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 떠오를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세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전도입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육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치료하는 광선을 아끼지 않고 비추셨습니다.
지금도 비추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해이신데 이 해는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이 말씀은 해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떠오르는데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해가 공의로운 해가 되고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부족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함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공의로운 해, 치료의 광선을 비추는 해가 되는 것을 함께 감사하십시다.

예수님은 공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는 공의의 승리를 믿어야합니다.
감리교 신앙고백의 끝 항목,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이것을 힘 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을 보면 ‘공의가 어디 있나?’ 여겨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그런 일들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공의입니다.
정의로 오신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공의인 것 같은데 하나님은 저것이 공의라고 하는 것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라고 하는 것을 정의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고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공의이냐?’ 택하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에게 유리한 것들을 택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제는 공의였는데 오늘은 공의가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제는 공의가 아니었는데 오늘은 공의가 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그런 것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공의가 아닙니다. 변함없는 공의입니다.
세상이 불의하다고 느낄 때  불의한 세력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 예수님이 공의로운 해로  떠오르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힘을 얻는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공의로운 해, 그리고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는 오늘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믿어야합니다.

알파 코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데 알파 코스에서는 토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거기에서는 이야기 식으로 풀어하기 때문에 토크라고 합니다.
모두 열한 개 제목으로 토크를 하게 되었는데 아홉 번째 토크의 제목이 “하나님은 오늘도 치유하시는가?”입니다.
해가 오늘도 떠올라 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늘도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로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면서 이 질문에 대해서 ‘네!’ 하고 힘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치료하는 광선, 치료에 도움을 주는 광선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엑스 광선, 레이저 광선, 요즘은 태양열 전기히터가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그 히터도 건강에 좋은 광선을 낸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광선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인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십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인 예수님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인 예수님은 사회의 문제들도 치료해 주십니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는 것입니다.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인 예수님은 개인도 치료해 주시고 사회도 치료해 주십니다.
그 광선을 받아 나의 몸과 마음이 치료함을 받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져야 합니다.

해는 빛의 근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송했습니다(눅 2:31-32).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빛도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자신이 빛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장 5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오늘 예배에의 부름 시간에 읽은 말씀인데 여기에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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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찬송 가운데 126장 “천사 찬송하기를” 이 찬송의 3절은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세상 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며”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빛을 밝게 합니다.
예수님은 해로서 빛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의 마음이 밝아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시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았으면  마음을 열고 주님이 비취시는 빛을 받아 마음이 밝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3절 가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광명한 그 빛 마음에 받아 명랑한 천국 바라보고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날마다 빛에 걸어가리

광명한 그 빛을 마음에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비추고 있는데도 우리의 마음이 어둡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찬송가 414장은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이 비취는데 기쁘지 않은 것은 이것도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의 창을, 또는 커튼을 닫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 그 창을 여세요. 그 커튼을 여세요.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던 것들이 다 쫓겨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밝아져서 할렐루야를 힘차게 부르며 행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빛은 따뜻해야 합니다.
또 마음이 따뜻해져야 합니다.
겨울에 해가 비치면  따뜻해집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힘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주변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해이신 예수님이 발하는 빛을 받아 마음이 따뜻해져서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한이 햇볕 정책을 쓰고 있는데,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 많은 햇볕이 북에 쪼이도록 하고 있는데 북은 별로 변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해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있는데 우리가 밝아지지 않는다면, 따뜻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북한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할 때 우리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해라고 할 때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져야 합니다.

찬송가 85장은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해라는 사실만 생각해도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 해가 떠오르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뭡니까?
‘떠오르는 해 그리스도’입니다.
이 제목을 가지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떠오른다’ 하면 ‘인기가 높아진다’ ‘유명해진다’ ‘스타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떠오르는 해 그리스도’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공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 그리스도는 반드시 떠오른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누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기록하고 배열한 것이 아닙니다.
기획 책임자가 있어서 제일 앞에 창세기 놓고, 그 다음에는 출애굽기 놓고, 중간에 시편 놓고 제일 끝에는 말라기 놓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꼭 연대순으로 기록되거나 순서를 정한 것도 아닙니다.
연대는 그저 참고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질서정연하고 놀라운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퍼즐 퀴즈와 같습니다.
퍼즐을 가지고 여기 맞추고 저기 맞추고 하다보면 전체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퍼즐 다 맞췄을 때 참 통쾌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그런 통쾌함을 줍니다.

저희 교회가 있는 수지는 한동안 난개발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양약국 앞길, 동천동 사무소가 예전에 있던 길을 이용해서 교회에 오고 가는 분들은 그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고 교통량은 많아서 불편을 많이 겪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 안에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어서 폐기물 운반차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다니고 있어서 더 불편합니다.
성경은 여기서 불쑥 한 권이 기록되고, 저기에서 불쑥 한 권이 기록되고, 건축으로 말하면 난개발된 것 같은데 완성되고 나니까 잘 정리되고 살기에 더 없이 편리한 도시가 된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제일 끝에 말라기서가 놓이고 그 말라기서가 ‘해이신 그리스도가 떠올라서 이렇게 될 것이다’ 예언하고, 그 다음에 신약이 이어지는데 복음서들이 ‘해가 떠올랐다’ 선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신기한지 알 수 없습니다.
말라기 이후에는 말씀의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말라기의 마지막 예언에 의지해서 해이신 예수님이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믿음이 없었으면 그 사람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잔혹한 통치나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룹니다.
세례 요한이 탄생했을 때 그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의 끝부분은 이렇습니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 78-79)

여기에 나오는 “돋는 해”도 예수님을 말합니다.
말라기 이후의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 사가랴가 가졌던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빛을 사람들이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니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온단 말인가?’
어려워할 것 없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14절까지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을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라고, 말라기서에서 말하는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7:10-13 막 9:11-13 눅1:17  요1:2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라는 해가 잘 떠오르도록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라는 해가 잘 떠오르도록, 그 빛이 잘 퍼져나가도록, 사람들이 그 빛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빛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새해부터는 예배를 끝낼 때 찬송가 259장을 부르게 되었는데 이 찬송은 우리를 빛의 사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예수님이 해라면 우리는 달이 되어야 합니다. 달은 해의 빛을 받아 전합니다.
이사야서 60장 1절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이르렀으면 우리는 달처럼 그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신앙을 회복해야합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인 족장들의 믿음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에 순종해서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의 믿음,
조용히 순종하며 인내하며 평생을 보낸 이삭의 믿음,
처음에는 세속적인 욕망이 강했으나 점점 더 신앙적이 된 야곱의 믿음,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 앞에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는 요셉의 믿음,
이런 믿음이 회복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감격, 세례 받을 때의 감격, 직분 받을 때의 감격, 이와 같은 것들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적으로도 9년 전 부활절에 이곳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의 감격, 작년 부활절에 대 성전에 입당해서 예배드릴 때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새해 표어가 ‘희년을 바라보는 교회’인데 희년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단순히 숫자적으로 50년이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희년의 의미들 가운데 하나가 원년입니다. 원년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년이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첫 믿음, 첫 감격을 회복하고 거기에서 다시 출발하는 해가 되기 바랍니다.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어떤 날입니까?
해가 떠오른 날입니다.
공의로우신 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는 해이신 예수님이 떠오른 날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밝아진 날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따뜻해진 날입니다.
여러분, 오늘 좀 어둡더라도, 오늘 좀 춥더라도 참으세요. 
내일은 해가 뜹니다.
대중가요들 가운데는 해가 뜨는 것을 믿으면서 힘을 내자는 가사를 가진 것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대표적인 것을 들라고 하면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가요,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정도의 믿음이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여러분, 지금 어떤 외양간에 갇혀 있습니까?
걱정의 외양간에 갇혀 있습니까?
질병의 외양간에 갇혀 있습니까?
분노의 외양간에 갇혀 있습니까?
가난의 외양간에 갇혀 있습니까?
거기에서 뛰어나올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예수님은 해이십니다.
공의로운 해입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해입니다.
우리는 공의의 승리를 믿어야합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치유의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져야 합니다.
그 빛을 사람들이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빛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해가 떠오는 것을 믿으면서 외양간에서 뛰어나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2006년의 성탄절이 해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아기 예수를 두 팔 벌이고 맞이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역사를 체험하는 귀한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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