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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선물 (눅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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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선물 (눅 2:1-20)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월 6일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던 로마제국의 동방지역들도 4세기에 대부분 12월 25일을 기념일로 바꾸었습니다. 원래 로마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날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었습니다. 그들은 낮이 길어지고 태양이 높이 떠오르는 동지를 기념하여 정의의 태양 ‘미트라’신을 숭배했습니다. 이 찜찜한 날을 우리 구주 탄생 기념일로 삼은 이유는 명확치 않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성도들이 이교 축제에 대항해서 참으로 의로운 태양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기념했다는 설명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열정은 이교도의 축제일을 기독교의 축제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누구를 기념하는지 모호하게 되어갑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는 가위표 해버린 X-mas가 되고 있습니다. 이교신앙인들이나 불신자들이 이날에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산타클로스의 방문을 기다리며 그의 선물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배당에서조차 그 날에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을 대형 스크린으로 장식하는 모습이라면, 또한 성도들과 그 자녀들 역시 산타클로스를 더욱 기억하는 모습이라면 태연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교축제 분위기와 싸워서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했는데, 그 믿음의 후손들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산타를 더 기억한다면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대의 분위기에 맞서서 썰매를 끄는 할아버지 대신에 구유에 누인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은 아니지만, 그분의 탄생하신 날을 기억하면서 과연 무엇을 기념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약속에 신실하신 섭리의 주님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야 했습니다(미 5:2).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도 100km가 넘습니다. 산모인 마리아가 그 멀고 험한 거리를 여행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기묘하게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1절을 보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이사는 불신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이나 성경의 예언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군인들을 징집하려는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이사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 다윗의 후손이었던 요셉도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까지 임산부인 마리아를 데리고 가야했습니다. 그것은 모처럼의 즐거운 가족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는 열망으로 힘차게 도전하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애달픈 발걸음이었습니다.

누가 여행경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요셉은 앞으로 먹고 살 일에 대한 염려와 막막함 가운데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안 돼요. 험한 이 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이런 찬양을 부르는 사람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요셉이 생애 처음으로 받은 성탄선물은 ‘호적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 슬픈 선물 이면에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거기 있을 그 때에” 마침 “해산할 날이 차서”(6) 예수님이 탄생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욕심과 요셉의 슬픔까지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셨고 당신님께서 예정하셨던 일을 어김없이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요셉은 참으로 복된 성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슬픔의 길이었지만,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는 선물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가족여행 같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원통하고 애통한 나날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현재의 처량함과 장래의 막막함 속에서 성탄을 앞두고도 마음이 즐겁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걷는 그 걸음이 비록 지금은 슬프다 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는 길이며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성탄절에 섭리의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념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뿌리는 눈물의 씨앗들이 기쁨의 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길 바랍니다(시 126:5-6).

둘째로 천한 자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주님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밤에 베들레헴 부근에서 몇몇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8).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매우 천한 직업에 속했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탄 전야 조차 야간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히 넋두리처럼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허구한 날 이 짓 하는지 모르겠어.’ 그들은 참으로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천대받는 그들에게 ‘주의 영광’이 찬란하게 비취었습니다. 도무지 영광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주변으로 주의 영광이 두루 비취었습니다. 요셉이나 목자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자들, 마음이 슬픈 자들, 삶의 힘겨움 속에 있는 자들에게 먼저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27-29절이 이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심령이 부요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낮은 자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성탄을 그저 값싼 즐거움과 가벼운 시시덕거림으로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낮고 천한 자에게 임했던 주님의 한량없으신 은혜를 기억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 가운데 기념할 수 있기 바랍니다.

셋째로 은혜로우신 주님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너무 가난해서 말죽통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람 본적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이를 그런 환경에 누여놓고 기뻐하며 춤추고 노래해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그 일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10)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11) 나신 구주시기 때문입니다.

가이사 황제의 명령과 함께 로마 제국 전체의 대이동을 비추었던 카메라는 다윗의 동네로 점차 공간을 좁혀가다가 이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12)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강보는 기저귀 천과 같이 새하얀 세마포입니다. 반면 구유는 짐승들의 먹이를 담는 여물통입니다. 가장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 같은 구유에 가장 순결하고 거룩해 보이는 강보에 싸인 존재가 누웠습니다. 본문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두 번 강조합니다(7). 그것이 표적이라 했습니다. 그 표적은 온갖 탐욕과 정욕으로 더러운 우리 가운데 임하신 거룩하신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아지시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짐승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괴롭습니다. 욕이 입에 베인 사람과 함께 있어도 괴롭습니다. 눈에 음심이 가득한 사람이나 사기꾼과 같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저 역시 똥 묻은 개처럼 더러운 자이지만 저보다 더 악취를 풍긴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잠시라도 함께 있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주님께서 일점 흠이 없으시고 악도 없으신 그 분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평생을 죄인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미 고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허다한 천군 천사들이 이 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게 하셨습니다(13-14). 당신님의 거룩한 아드님이 말 밥통에 누였음에도 찬양의 소리를 드높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는 일이기에,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지극히 낮아지신 주님을 기억하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감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슬픔과 악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며 ‘우리를 위한’ 가장 은혜롭고 값진 선물이 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섭리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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