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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이야기 (사 9:2-9, 딛 2:11-14, 눅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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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성탄절을 앞두고 오늘은 대림 4번째 주일로 성탄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내일로 다가온 성탄절을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성탄이 안고 있는 모든 은혜와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주일날 한 교회에 술이 만취상태인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찾아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교회당 문을 두들겼습니다. 이것을 본 그 교회 관리집사가 달려와서 그 사람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여기는 교회요, 지금은 예배중인데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든지 아니면 나중에 오세요”. 그랬더니 술 취한 사람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관리집사를 노려보면서 “나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단 말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집사가 도대체 그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술 취한 사람은 “나? 예수라는 사람 만나러 왔다. 왜?”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관리 집사의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에이, 여보시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에 없으니 다른데 가서 알아보시오”. 그리고는 억지로 떠밀어서 내보냈습니다.

 오늘은 성탄주일이요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성탄(聖誕)”이란 말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뜻이 아닙니까? “성탄절(聖誕節)”은 이날에 나신 예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날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탄절의 주인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탄절에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제대로 대접을 받으십니까? 혹 저 관리집사처럼 “내게 그런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금년 같으면 연휴가 되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님 혼자 집 지키라 남겨두고 여행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에서 일년 중 가장 큰 축일인 이 성탄절 날만이라도, 이 절기만이라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관심과 삶의 중심에 계시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텔에 가보면 객실에 손님이 만원이 되면 프런트 데스크에 표지판을 내놓습니다. 거기 영어로는 "No Room" 즉 “빈방 없습니다”라는 표지판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그 호텔에 투숙하기위해 찾아왔던 손님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던 밤에 온 베들레헴, 아니 유대나라, 나아가서 전 세계에 주님을 향해 이런 팻말을 내걸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이 있는 누가복음2:7에 “첫 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이 말이 영어로는 "No Room"입니다. 찾아오기는 했는데 방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못 듣습니까? 하나는 아주 귀가 멀어버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안이 너무 소란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듣기는 들어도 그 소리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한 오늘 우리들도 어쩌면 이 3가지 중에 한 가지에 속하여 있지는 않은지 염려가 됩니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발길을 돌이키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손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어느 산간 오지에서 청년 두 사람이 눈 내리는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천신만고 끝에 집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하루 밤만 묵어가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예 내다보지도 않고 냉정하게 “다른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들은 할 수 없이 그 집을 나와서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을 한 끝에 겨우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밤에 그 청년들을 돌려보냈던 그 집 주인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밤 자기 집을 찾아와서 하루 밤 자고가기를 청했던 그 청년들이 다름 아닌 그 나라의 왕자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냉정하게 거절했던 자신의 처사를 후회했으나 그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습니다.

 오늘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는데 나는 문을 닫아 걸어놓고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다른데 가보라”고 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게서 발길을 돌리신 것은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7:23,25:41)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로마서에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라고 했습니다. 마25:에는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요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2. 첫 성탄절에 온 천지에 울려 퍼진 성탄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누가복음 본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말씀에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우리 주님의 성탄 그것이 진정한 영광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부터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성탄은 영광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사건이 이루어진 방법은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옥타비아누스인데 그는 모든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하여 로마군대의 총사령관, 로마 원로원의 수장, 그리고 로마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되었습니다. 최고 영광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신이 된 인간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 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집이 없어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사형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인간이 되신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주님의 탄생이 곧 영광의 사건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말구유까지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빌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이 되시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주님과 함께 그 영광을 나누시기를 소원하십니까? 주님의 그 영광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낮아지십시오. 더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거기서만 영광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우리 주님의 성탄이 진정한 평화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의 다른 번역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가 대답해 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시면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시고 즉각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샬롬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은 그 막강한 군사력에 의하여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 당시를 일컬어 “로마의 평화” 즉 "Pax Romana"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힘에 의하여 강요된 평화였습니다. 우리가 군사정권 때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면서 조용하게 살아야 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탄과 죄와 육신에 얽매인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고, 성령을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를 채워주시는 일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아지고 낮은 사람이 높아져서 함께 사랑하며 사는 상생의 평화 즉 샬롬의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성탄 절기를 맞이하여 이런 평화가 여러분 심령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평화는 말구유로 상징되는 성탄으로 시작되며 십자가로 나타난 자기희생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물론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나의 왕처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왕이시듯 나의 이웃도 역시 나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탄에서 평화를 선포하시고, 부활하신 후 역시 평화를 선포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평화를 주시고 우리를 이 땅의 평화의 도구로 들어 쓰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3) 주님은 성탄이 바로 섬김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2007년부터 계획하는 성인교육프로그램인 커리큘럼은 3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 신자가 되게 합니다. 둘째, 신자들을 훈련시켜 제자가 되게 합니다. 셋째, 제자들로 하여금 주를 위해 일하는 사역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목표가 어디입니까?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사건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옛날 욥과 같은 동방의 의인도 역시 귀로 듣기만 했었는데 친히 만나 뵙고 나서 재를 무릅쓰고 회개했습니다. 신앙은 연조가 아닙니다. 직분도 아닙니다. 업적도 아닙니다. 지식도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의 사건입니다. 벧엘에서의 야곱처럼 “여호와께서 여기 계신다”고 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이 이런 극적인 만남의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이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에게 경배하라고 목자들에게도, 동방박사들에게도 지시하셨습니다. 비천한 아기, 지극히 낮은 자리에 오신 갓난아기,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 아기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 냄새나는 마굿간으로 가서 코가 땅에 닿도록, 그래서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나는 그 자리에 가서 엎드려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나는 남에게 존경받기를 원했습니다. 남에게 받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즐겼습니다. 아니 그런 것을 끝없이 추구해 왔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구유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하십니다. 자존심 버리란 말씀입니다. 체면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굳은 목을 굽히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을 만나고 새 은혜 주시고 우리를 주님과 함께 높여주십니다. 이번 성탄절에 이런 은혜와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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