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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의 가치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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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뉴스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동물원에서 동물들에게 동전을 던지게 되니까, 동물이 그 동전을 받아 먹다가, 그것이 누적이 되고 몸에 쌓여서 나중에는 녹이 슬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죽었다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작은 것들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나 하나 쯤 괜찮겠지, 이깟 동전 하나 쯤이야 하고 동전을 던지고, 동물 한 마리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그런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 쯤이야가 아니라, 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한 어린아이가 드렸던 작은 도시락은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식사였습니다. 하찮은 도시락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한 작은 아이가 드린, 그 작은 도시락 하나가, 장년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만들어 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작은 하나라고 해서 하찮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 10살 난 어린 소년이 1페니의 헌금을 했습니다. 1페니는 250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정말 하찮은 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그 돈으로 신약성경을 한 권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헌금 봉투에 써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돈에 자신의 돈을 보태서 정말 성경을 사서 인도에 있는 선교사님에게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도 아이도 그 일을 잊어버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20년 후에 그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어떤 마을에 갔더니, 그 동네는 이미 복음이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새로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중에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시작되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한 선교사님이 와서 신약성경을 전해준 것이 복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면서 다 떨어진 성경책 한 권을 보여줬습니다. 누구의 성경이었겠습니까? 20년 전에 한 아이가 서명한 사인이 들어 있는 바로 그 성경이었습니다. 하나의 가치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바로 이 하나의 가치입니다. 하나는 가장 작은 수고, 하잘 것 없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가치는 결코 작지 않고, 매우 귀중하고 위대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를 잃은 손실입니다. 본문 말씀 4절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으면, 나머지 양들은 들에 그냥 두고, 그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수고하지 않느냐는 말씀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양 한 마리보다는 그래도 아흔 아홉 마리가 훨씬 소중한데,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들은 늑대들이 물고 가거나 말거나 그냥 들에 방치해 놓고, 하나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하잘 것 없는 하나에 집착하다가 오히려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양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가치관, 세상적인 경제 논리로 볼 때는 한 마리보다는 아흔 아홉 마리가 훨씬 더 큽니다.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그렇겠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귀중하고,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귀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준에서는 1도 99와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비록 그 한 명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명가치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그 생명이 소중하고, 거지라고 해서 그 생명은 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분명히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눈은 그렇지가 않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우리 역시 사람들을 같은 생명 가치로 대하지 않습니다.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정중하게 대하고, 경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그냥 무시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모습은, 영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그 소중한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세상 경제 논리로 계산하면서, 1보다는 99가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과 태도, 우리들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흔 아홉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소중하지만,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잃은 양 한 마리, 하나의 고귀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애타하시고, 그것을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전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를 가치 있게 여기면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애타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정말 천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한 영혼을 잃어버렸다면, 천하를 잃어버린 것처럼, 애타하고 마음 아파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한 영혼이 있다면, "저 사람 하나 정도야"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목자의 심정을 갖고, 그 하나가 천하보다 귀한 고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눌 두 번째는 하나를 찾는 수고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양을 잃어버렸을 때에, 그냥 마음 아파하고, 애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음 아파하고 애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목자는 그 하나를 찾아서 나섰습니다. 그리고, 조금 찾다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찾을 때까지 찾아서, 결국은 찾아냈습니다.

  저도 한 달 쯤 전에 잘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점심 먹으러 가서 잠시 안 잠그고 나뒀었는데, 점심 먹는 사이에 누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전거를 찾으러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의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단 없었고, 이제는 좀 탈만큼 탔다는 생각이 있어서, 별로 애타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나서지도 않았는데, 만약에 우리 병찬이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분명히 달랐을 겁니다. 아직 걷지도 못해서, 잃어버릴 염려는 없지만, 만약에 3-4살이 되어서 동네에서 애를 잃어버렸는데,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저녁에 잃어버렸으면, 당장에 직장인예배는 다른 목사님께 부탁을 하고, 경찰에 다 연락을 하고, 우리 청소년부 애들한테 다 전화해서 같이 찾자고 부탁을 해서 찾아 나서고, 저도 백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목숨 걸고 찾아나섰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가치 때문이죠. 별로 찾을 가치가 없는 것은 찾아나서지도 않고, 그래도 좀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찾기는 하다가, 찾기가 어려우면 포기할 것이고, 그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찾을 때까지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면서 나선 것은, 그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을 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찾을 때까지 찾아나섰던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물건은 잃어버렸으면 그 자리에 있지만, 이 양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헤매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그 양이 이미 늑대 밥이 됐을 수도 있고 한데,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는 수고를 다해서 찾아내고야 말았고,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애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잃어버렸으니까, 일단 그것을 찾고 싶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애타하는 마음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에 나오는 목자처럼,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까지 수고하는 그런 모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모습인 것이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해서,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잃어버렸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 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타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내 가족 식구 가운데서 잃은 양과 같은 분이 있다면, 그 가족 식구를 볼 때마다 애타하는 마음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혼이 돌아오기까지 적극적으로 애쓰고 수고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자의 그런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잃은 양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런 목자의 열심과 열정을 본 받아서 잃은 양 찾기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나눌 것은 하나를 찾는 기쁨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목자가 그렇게 찾을 때까지 애를 써서 마침내 양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양을 어깨에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양이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닐테고, 양이 그렇게 가벼운 것도 아닐텐데, 얼마나 좋았는지, 양을 메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까 함께 즐기자고 하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것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힘들게 양을 메고 왔는지도 이해가 안 되고, 양이 만약에 시장에 내다 팔면 20만원 밖에 못 받는데, 잔치를 하느라고 5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면, 참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양을 찾지 말고 그냥 놔뒀으면 그냥 20만원을 잃어버리고 말았을텐데, 양을 찾았다고 잔치를 하느라고, 오히려 돈을 더 손해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기쁨에 있습니다. 기쁨의 분량은 찾기 위해서 투자한 그 수고에 비례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잃어버렸다가, 1시간 후에 길에서 다시 찾은 것과, 천 만원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한 달 후에 경찰서에서 찾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찾느라고,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그렇게 잔치를 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큰 수고 후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아기를 낳고 나면, 그 기쁨이 또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 고통은 뒤로 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애쓰고 수고함이 있어야 기쁨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처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있어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수가 있고, 그런 기쁨은 그런 수고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고 적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가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시작이 되기 때문에, 하나를 소홀히 해서는 둘, 셋까지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가치, 그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를 잃게 될 때에 애타하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써서 수고하면서 찾을 때까지 찾아나서고, 그런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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