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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원할 자 (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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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어느 성탄 전날이었습니다. 아이는 마루에 장식해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에다가 커다란 양말을 매달아 놓고 설레이는 가슴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자리에 든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온 카드의 문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않았더라면?' 빨간 카드의 맨 아래에 그렇게 써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매우 인상적 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생각에 잠기다가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마루로 가 보았습니다. ‘스케이트일까? 책일까?’ 그러나 마에 있어야 할 트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구들도 보이지 않고 전날 장식했던 집안의 장식물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트리를 샀던 집에 가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수선화라든가 튜울립 따위의 꽃을 팔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주인아저씨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도 표정 없는 얼굴로 힐끔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어제 트리를 살 때는 놀러 오라고 하시며 친절하게 해주셨는데’ 아이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아저씨, 오늘 크리스마스기 때문에 쉰다고 하셨잖아요? 그러고 나서 제게 놀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아저씨는 “크리스마스가 뭐야? 크리스마스?' 하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곳을 나와 크리스마스 카드를 샀던 문방구와 칠면조를 샀던 고기 집에 가 보아도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하여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하고 의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이는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온데 간데 없었고 꽃집 아저씨에게 물으니 교회가 무엇이냐고 되묻고는 그 자리는 전부터 풀밭이라고 했습니다. 집에 와 성경을 펼쳐보니 구약만 있을 뿐 신약이 적혔던 곳은 백지였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루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아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꿈이었고 지금 식구들은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마루로 나갔을 때 아버지의 기도가 시작됐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하소서. 아멘'

  '아들을 낳으리니.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서 커다란 울음과 함께 탄생하셨으며, 보통 어린아이들과 같이 엄마의 젖과 따스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경탄하고 찬미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속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에서 미군 병사 하나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옆 좌석에 앉은 남자에게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민주적인 국가이죠. 일개 시민이라도 원한다면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 여려 가지 문제를 논의 할 수 있으니까요 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았던 스웨덴 사람이 말하기를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웨덴에서는 왕이 일반 평민들과 한 버스를 타고 다니니까요'하고 얼마 후 그 스웨덴사람이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미군 병사에게 방금 버스서 내린 그 남자는 바로 주스타브  아돌프 6세 스웨덴 국왕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름은 한 사회나 단체의 보이지 않는 얼굴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듣거나 떠올림으로써 그 단체의 성격이나 특징 등을 상상할 수도 있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작게 보아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하여 한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 능력, 얼굴 등을 상상해 낼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에게든지 단체에게든지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히 본문에서 이미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 이름이 지어지고 그 삶의 형태가 특징지어진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삶이 그렇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창 4:25).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로 임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온 것으로 '여호수아'라는 말은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에 어울리게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영도자 모세조차도 이룩하지 못했던 가나안 입성을 이룩하였으며 가나안을 점령하였던 인물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시되 여호수아와 같은 무력의 능력을 지니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여호수아와 같은 세상적인 무력을 매우 싫어하셨으며, 철저히 배격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해하셨던 힘에 대한 바른 개념과 사용하셨던 힘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힘이요 악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힘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국에는 반드시 이 힘이 승리 할 것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흉학한 죄를 지어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가 있었답니다. 그 사형수에게 교도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는 모두 사형수입니다. 하나님에게 사망의 형을 선고받은…. 사랑하는 이여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향해갑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사형수는 아니지만 죽음의 형이 그리 짧은 시간에 집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분명 죽음이 확정된 사형수와 같습니다. 그 사형수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변화되었답니다. 기쁨과 평안으로 후배 사형수들을 만나면 늘 이렇게 전도했답니다. '너 죽을 준비했니. 너 죽을 준비해라.' 죽을 준비. 성경은 오직 한가지의 준비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죽음이후에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영생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 그것은 예수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을.'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됩니다.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 어떠한 백성이 있다는 사실과 어떠한 왕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백성은 온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왕권에 관한 것인데 그의 왕권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적인 것과는 완전 별개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으로 질서를 세우고 통치하지만 예수님의 통치는 전적으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겸손하며, 자기를 회생하는 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모두 예수님의 통치권 안에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통치권을 세상에 확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니콜라스 2세가 구소련을 다스릴 때였습니다. 소련 경찰은 독일 히틀러 학정을 피하여 소련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을 잡아 독일로 넘기면서 짭짤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소련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과 도망 온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경찰에 들켰습니다. 잡히면 독일로 끌려가 죽을 판입니다.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힘껏 달아났습니다. 경찰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한참을 달린 후 섰습니다. 경찰이 영주권 제시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여유 있게 내밀었습니다. 경찰은 영주권을 갖고도 왜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의사가 약을 먹고 달리라고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경찰은 재차 도망쳤다고 다그치자 유대인은 “경찰관님도 나와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은 줄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덕분에 영주권 없는 유대인은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순간적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주십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저희 죄에서

어떤 흑인 신자가 성경을 읽는데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을 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목사가 이것을 보고 기특히 생각하여 그 뜻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당신의 지금 읽는 그 곳에 누구의 이름이 씌어져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 흑인은 말하기를 “예 이곳엔 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뜻을 모르고 읽는구나.’ 탄식하면서 “어느 것이 당신의 이름이요?” 물었습니다. 그 신자는“ 이것이 제 이름입니다.” 하며, 10절, 11절, 13절에 거듭 거듭 있는 죄인이란 말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본 목사는 참으로 감격했습니다.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말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 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심을 나타내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합니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근본적이고도 큰 목적은 바로 인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먼저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아담의 범죄 이후 영원한 생명과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떠났던 인류들이 이제는 사망의 통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격하고 기뻐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도 천군 천사와 함께 기뻐하였고, 들에서 양 치던 목자와 동방박사도 주를 찬양하고 즐겨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구원 할 자이심이라

구약에서 '구원'(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펜실베이니아에 피터 밀러라고 하는 목사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지역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았으나 목사님을 미워하고 모욕하는 한 사람이 교회 옆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밝혀져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는데, 밀러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걸어서 워싱턴 장군에게까지 가서 그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탄원했으나 워싱턴은 “죄송합니다만 나는 당신 친구를 위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라고요?” 하고 밀러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원수입니다.” “뭐라고요?” 워싱턴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60마일을 걸어왔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이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군요. 나는 당신 때문에 그를 용서합니다.” 그 사면은 워싱턴 장군에 의해 승인되었고 목사님은 그날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는 곳으로 15마일을 걸어갔습니다. 그가 도착하는 순간에 그 사람은 교수대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보자 “저기 늙은 피터 밀러가 있다. 그는 내가 교수형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에브라다에서 줄곧 걸어왔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목사님은 이 죄수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생명을 구할 사면장을 건네주었습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라는 이름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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