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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의 날이 오리니...(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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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이 오리니...(베드로후서 3:8-13)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 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육당 최선님의 시도입니다. 제목이 ‘혼자 앉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기다림’이라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이 시를 맡아서 시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온다고 한 사람은 없는데, 그럼에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아, 자꾸만 문을 바라본다는 겁니다.

용혜원목사님의 시 가운데 “기다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기다림이 있다.
우리네 삶은 시작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위로 받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하며 살아가네.
봄을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을 기다림이 탐스런 열매로 익어가듯,
삶의 계절은/ 기다림의 고통, 멋, 그리움이지 않는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이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기다림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게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시대의 백성들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 버렸을 때, 그 수많은 고통 속에 잠겨 있을 때, 도무지 빛이라고는 반딧불조차 없는 것 같은 캄캄함 속에서, 그 혼돈과 암흑을 비추고 들어오는 빛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이야기했고, 메시아의 오심을 가르쳤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메시아는 오시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들의 소망을 차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 1:11)
그렇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려고,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려고, 죄의 노예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려고, 그래서 당신 스스로 대속의 제물이 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완성하시려고, 그렇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오신 그날 곧 성탄절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찬양합니다.

강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다니요? 이미 오신 예수님을 왜 또 기다린단 말입니까?” “이미 오셔서 내 마음에 모신 예수님을 왜 또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래서 주님 오심을 기다림이 별로입니다.

우리,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던 다락방으로 가 보십시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무거워졌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그야말로 예수님이 그들의 희망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뭔가 큰일을 하실 거라는, 그런 기대로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런데 그 예수께서 당신은 죽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어찌 그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하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요 14:1-3)
예수님은 죽으시지만,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왜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까? 그래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련하시고,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게 좋으세요? 싫으세요? 아마 세상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게 싫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니 하나님 나라는 가야겠고, 그래서 “예수님, 좀 천천히 오세요.” 아니면 “나 죽은 뒤에 데려가세요.”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먼저 이걸 아셔야 합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아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8)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겁니다.
그것은 마치 밭에다 씨를 뿌리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구원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은 거기에서 구원의 열매를 거두실 것입니다.
계시록 14: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인자 같은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이 선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거두어들이십시오. 땅에 있는 곡식이 무르익어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둘러서, 땅에 있는 곡식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요.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두어들일 때도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께서 구원의 씨를 뿌리셨다면, 이제 곧 오실 예수님은 그 씨에서 자란 열매를 거두시게 될 것입니다.

우린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칠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는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했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주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 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러나 거둘 날이 온다는 겁니다. 구원 받을 알곡은 알곡대로 모으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모아서 불태워 버릴 때가 온다는 겁니다.

사실, 성경은 곳곳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저와 함께 감람산으로 가보십시다. 우리는 또 다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후의 작별인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과업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 1:11)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오시는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구원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신다고 성경은 곳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긴 뭘 와. 온다고 했지만 오지 않았잖아. 예수님이 다시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은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한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가슴막이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씁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살전 4:13-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치 밤에 도둑이 오듯이, 아기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듯이, 갑자기 그 날이 닥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라.’”(벧후 3:3-4)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무슨 소리냐? 봐라. 세상 모든 것이 다 옛날 그대로 있지 않느냐?” 사람들이 그런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초대교회의 사람들 같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벧후 3:8-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다는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 6:5-6) 그러나 그 중 단 한 사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라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산 위에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킬 계획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홍수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120년 동안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박했다고 경고했지만, 그래서 이렇게 산위에 배를 짓는 거라고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쾌락만 쫓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마침내 홍수가 퍼부어댔을 때 그들은 방주로 몰려왔을 겁니다. 방주의 문을 세게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닫으신 문을 사람이 열어주지 못함을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마 24:39)
또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평야에 위치한 악한 두 도시는 완전히 죄로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두 도시를 불과 유황불로 완전히 멸망시키던 때가 왔습니다. 두 도시는 사라졌습니다. 그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눅 17:30)

성탄절.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의 제물로 오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날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제 예수께서 오시면 다 끝나는 겁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구원이냐 멸망이냐 두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두게 된 답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랍니다.(마 24:40-41) 그것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입니다.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계 20:11-15)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설마 그런 일이 있을라고?”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와! 오늘 아침 설교는 완전히 겁주는구먼.” 그런 생각이십니까? 바라기는, 정말 바라기는, 겁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데 어찌 겁나지 않겠습니까?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 21:8) 그런데도 겁이 안 납니까?
겁을 내셔야 합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예수 믿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불과 유황불 속에 던져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오히려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3:18)
그래요. 아들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외아들을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심판 또한 없는 것을 믿으십시오. 누구든 주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칭송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으니까 구제 사업도 많이 했으니까. 그래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아닙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 많이 하고, 구제 사업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 없이 여러분의 인생을 걷게 되면, 그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여러분에게 비극과 영원한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얼굴 뵙기를 사모하십니까? 여러분의 소망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그 중심을 두고 있습니까?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고 외치고 싶습니까?

시인은 노래합니다.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과 저가 예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 때문에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다시 오실 때,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찬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다시 오심을 생각할 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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