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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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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사회에 매우 권위 있게 자리 잡아가는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교수 208명분이 올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를 풀이할 수 있는 말로 '밀운불우'를 택했다고 말합니다. 밀운불우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단어입니다. 이 말은 주역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비가 오기 전에 먹구름만 자욱하듯이 어떤 일의 여건은 마련됐지만 일이 이뤄지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가득한 상황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교수신문은 "체증에 걸린 듯이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 정치·경제와 동북아 정세가 이번 선정의 가장 큰 배경"이라며 "상생정치의 실종,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로 인해 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중심이 됐고 이에 사회 각층의 불만이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설명했습니다. 뭐 여기에 대해 누구나 동의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2006년도 한해를 되돌아볼 때 우리에게 답답함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때도 우리가 처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대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어수선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신문이 있었더라면 날마다 뉴스거리가 쏟아졌을 것입니다. "헤롯왕의 동생의 아내와 재혼한 사건이라든지, 로마 황제가 세금 인상 위해 인구조사 실시한 것이라든지, 당시 빈부의 차는 날로 심각해져갔고, 이곳 저곳도처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셀롯당원들이 로마 군인과 충돌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는 이런 일들이 자고 일어나 눈만 뜨면 자신들에게 다가오니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암울하고 답답한 이 땅에 오심을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도 엄청난 데 우리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구유에 나신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 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눅2:10절에 한밤에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주님은 이 높고 높은 곳에서 이 낮고 천한 곳에 골짜기를 넘어서 올 수 없는 환경을 넘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오셨듯이, 넘어져 있고, 지쳐있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나를 잊어버리는 이 세상 속에 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약속대로 나를 찾아오심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무와 저주 가운데 죽어갈 영원히 멸망할 우리 자신들을 주님은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죽여서까지라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지만, 아들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들이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죄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인데, 그 아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반응은 헤롯왕과 그 측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온 세상의 구세주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동방박사로부터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한 것 같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궁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메시야가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 물음은 한 순간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습니다. 헤롯왕은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로마의 권력에 편승하여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이 아닙니까? 헤룻은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도 짓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세금도 감면해 주었고, 자기의 금 접시를 녹여서 백성들의 식량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을 없애기 위해 300명의 법정 위원들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를 반대하는 장모나 아들들에게도 쉽게 칼을 휘둘러 서슴없이 죽이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10명의 아내를 거느리면서,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근친상간도 서슴없이 하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기 2절에 "소동했다"는 말은 불안하게 하다는 의미로 당시 그 누구보다 헤룻에게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빨리 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소문으로 해롯 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헤롯왕은 갑자기 박사들을 조용히 불러 말합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왕도 아기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예언되어 온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헤롯왕은 그분이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기 예수께 경배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왕은 겉으로는 '나도 아기 예수께 가서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환영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당시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성경학자들입니다. 헤롯은 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대답합니다. 4절과 5절에 보면"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의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당시 대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드릴 때 쓰는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 등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팔았습니다. 물론 시중보다 몇 배 비싼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로마 화폐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화폐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만 사용하는 거룩한 동전으로 바꾸어야만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을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을 바꾸어 줄 때 엄청난 폭리를 취하며 바꾸어 주었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판 재물이 아니면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는 이렇게 제사용 가축을 파는 가게가 많았습니다. 이 가게의 주인이 대 제사장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으신 것은 바로 이 제사장들의 짓거리들을 향한 주님의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또 서기관들은 누구였습니까? 율법의 해석자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판사, 변호사처럼 백성들에게 법관 대우를 받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특권을 누리던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제사장도 필요 없고 서기관도 필요 없게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게 되는데 좋아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저들은 아기 예수, 만왕의 왕이 오셨다고 했을 때, 예수를 찾아가기는 커녕 의도적으로 무관심했고 바로 이 사람들이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리에 서지 않습니까? .

성경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외면하고 반대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지식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이들 종교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허수아비처럼 무관심했던 저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가운데 하나가 무관심입니다. 습관적으로 예배하고 찬송하고, 습관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뭐, 회개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왔으니까요. 뭐, 반성도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으니까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흥분이 될리 없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다는 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한 번도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 믿은 오랜 경륜만 자랑합니다. 예배를 종교적 악세사리, 주일 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교회 생활의 전문가라고 착각합니다. 바로 그 제사장이 저 같은 목사의 얼굴일 수 있습니다. 그 서기관이 장로의 얼굴일 수 있고 집사의 얼굴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참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하여 진리를 찾아오는 동방 박사들입니다. 저들은 별을 따라 와야 했기에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무려 2,500Km나 떨어진 페르시아에서부터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오는 동안 사나운 맹수를 만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강도 떼를 만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비와 물건들을 다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들은 목숨걸고 별 따라 왔습니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왔습니까? 무슨 이유로 그들이 자신들을 헌신했습니까?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그 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들의 행동은 안일주의 신앙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신선한 도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편리해 졌습니까? 또 이 편리 때문에 놓친 영적인 보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 고난의 신앙을 잃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위해 당연히 치루어야 할 그 값을 치루려 하지 않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원수는 값싼 은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란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겐 이 결단이 있었습니다.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2절과 11절에 나타난 대로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래 전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생전에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셨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 생전에 내가 쓴 왕관을 그 발 앞에 벗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예배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복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서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가장 귀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어느 학자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예물들에 영적인 의미를 덧붙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황금은 보석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유향과 몰약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얻을 수 있는 향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여비가 부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예물을 팔기만 하면 얼마든지 넉넉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중한 예물을 절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왕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번 크리스마스를 맞는 다양한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셨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비극적인 삶의 행렬의 선두를 장식했던 헤룻이나, 서기관들처럼, 이 아침! 여러분 가운데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또 알 것은 다 알면서도 그 이상은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성경의 가장 슬픈 구절 중의 하나는 요1:11절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 계신 그분으로 인한 감동과 환희와 희열을 가지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어디 있습니까? 성탄의 종은 그들을 위해 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아직도 그 주님을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왜 아직도 그 분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욕심 때문입니까? 이기심 때문입니까? 무관심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재미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마스 메세지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영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성령의 인도가 감사합니까? 예수님 안에서 얻은 영원한 생명에 감사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존귀한 것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황금이 없으면 여러분의 몸을 드리십시오. 유황이 없으면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몰약이 없으면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의 인생을 그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아침! 여기 모인 우리 모두, 누구하나 예외 없이 어느 해인가 인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멧세지를 들으면서도 진정으로 그 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주님 앞에서야 한다면,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참으로 그 분을 경배하는 살자 못하고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그 분을 만나야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성탄절이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한 헌신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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