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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진정한 경배자 (미 5:2-5상, 마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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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미가5: 2-5상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신약 마태복음 2: 9-12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

유럽에서의 성탄 장식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은 ‘성탄 트리’와 ‘마구간 장식’입니다.

마구간 장식은 여러 모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가운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 그 곁에 양친이신 마리아와 요셉, 주위에 소, 양 등의 가축들과 그들이 먹을 짚더미, 천장에 매달려 있는 천사들, 막 나가려는 목동들, 그리고 화려한 복장으로 각기 황금, 유향, 몰약의 선물을 손에 들고 정중히 등장한 세 명의 동방박사들과 그들이 타고온 말들/낙타들 등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5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까지 크리스마스 구유를 장식하며 동방박사 방문사건을 예수성탄 사건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신앙적 고무의 기회로 삼아왔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맞이 하면서 우리 자신도 그들 속에 끼여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오늘 구유의 한편에서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며 솟구치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동방 박사들이 경배하러 온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페르시아에서 박사들은 철학자들이며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또한 아라비아에서 박사들은 학자이면서 점을 치고 마술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흔히 세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가져온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들이 세 명이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6세기 이후에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르(Caspar), 멜키올(Melchior), 그리고 발타잘(Balthasar)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난 왕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별은 천체로서의 연구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별은 미래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역사의 미래를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별은 희망입니다. 이들이 별을 따라 온 것은 메시야를 향한 희망을 따라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먼 곳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습니다. 주님이야 말로 먼길을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동방박사도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먼길을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천마일 이상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길을 먼 줄도 모르고 달려 왔습니다. 축복받은 자들은 멀리서 왔습니다. 사모함이 이들을 멀리서 오게했습니다. 멀리서 온 이방인들이 성탄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하던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관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불러 유다인의 왕을 찾아보게 하십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다인들을 가르쳤습니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텃세만 부리던 사람들입니다. 무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무관심이 큰 죄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돈바꾸고 장사하는데 바빴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전통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엉뚱한 곳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보다는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순박한 마음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던 3명의 동방의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오묘한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지도도 없던 그 당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밤에만, 그것도 맑은 날씨에만 뜨는 별을 보고서 그 별빛을 따라 각기 선물을 들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왕을 찾아 떠난 긴 여행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빨리 왕을 찾아뵙겠다는 들 뜬 마음에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일념으로 신앙의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의 표본입니다.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거둡니다. 소망의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은 소망을 이룹니다. 사랑의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신앙의 본질이 모든 것을 내 맡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약속에 내 맡겼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모두 한 가닥 별빛과 그 별이 의미하는 미지의 왕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박사들은 자기들의 남은 인생을, 자기들의 모든 것을 미지의 왕에게 내걸었던 것입니다.

별은 초월입니다. 다람뒤 쳇바퀴 돌듯이 도는 현실에 묻혀서 사는 사람은 별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구원할 메시야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무수한 별빛을 우리는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싸인/표식을 읽어야 합니다. 그 싸인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길을 걷는 동방박사들의 발걸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롭고 힘든 나날입니까? 그러나 하늘의 별빛은 이들의 발걸음에 의미를 주었습니다. 하늘의 별빛이 있기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목적을 향해서 별빛을 따라가는 삶은 고난의 삶이지만 희망의 삶입니다.

베들레헴

동방 박사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새로 나신 왕께 경배하려고 유대의 헤롯왕을 찾아와 ‘어디서 왕이 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즉시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어떤 곳입니까?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작은 고을입니다. 베들레헴은 야곱이 어렵게 맞은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게 되어 장사된 곳입니다. 그 앞에서 야곱이 슬피 울었다 하여 슬픔의 땅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베들레헴에는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 14장을 보면 이 곳은 약속의 땅이기도 합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여 약속대로 땅을 분할 받은 곳입니다. 동시에 이 곳은 다윗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그리고 이새가 낳게 된 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그곳에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다윗의 자손인 것일까요? 다윗의 여러 아들 중 솔로몬에게는 나중에 요셉이란 자손이 생기며 다른 아들인 나단을 통해서는 마리아라는 자손이 생겨 이 둘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됩니다. 결국 요셉도 마리아도 모두 다윗의 자손들인 것입니다.

아우구스트 황제의 명을 따라 조상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갔다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를 난 것입니다. 이 예언은 기원전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이후 다윗의 가계가 형편없이 기울어진 상황에서 충격적이었던 예언입니다. ‘때가 차매’(갈 4:4), 즉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미가서는 말합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이사야는 말합니다. ‘나실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사9:6-7)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입니다. 동시에 그 분은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죄에서 풀어주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명문 세도가에서 태어나시지도 않았으며 한산한 그리고 초라한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크고 유명하면 그것은 이미 베들레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큰 자리, 큰 일, 큰 성공만 찾는 허황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오신 왕 되신 주님을 모시려면 내가 낮아지고 가난해져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베들레헴처럼 죄를 슬퍼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믿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세 가지 예물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새로 나신 예수님께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칼 라너(Rahner)는 이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는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시자 바로 그 하나님 앞에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는 황금과 그들의 경배를 나타내는 유향과 그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몰약을 바쳤다.”

사실 황금은 왕에게 가장 적합한 예물이고, 유향은 신께 바치는 향이며, 몰약은 모든 인간의 장례 때 필요한 물품입니다.

황금 – 왕에게 드리는 선물

동방 박사들의 첫째 예물은 황금이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헤롯의 왕권과 예수님의 왕 되심의 의미를 비교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태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우주는 기대와 참 소망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60:1-6)와 시편 기자(72편)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나는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 왕권이 무너지며, 잘못된 지배의 옛 제도가 넘어가며, 옛 정치 제도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헤롯은 옛 왕권과 옛 제도 그리고 무너져야 할 옛 정치 제도를 보여 줍니다. 그는 뇌물(금)과 살육(몰약)과 사람들의 강제적인 경배(유향)를 통해 옛 왕권을 보여 줍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통해 옛 제도와 정치와 왕권의 무너지고 새로운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렇게도 사모하고 기다리던 분입니다. 그분은 독재와 폭압과 억압으로 얼룩진 이 세상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참 사랑과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왕권과 통치는 세상 나라의 왕권과 통치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습니다.

또한 우리의 옛 경제 제도를 말합니다. 황금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물질을 뜻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점점 더 황금 만능주의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돈을 사랑하고 황금을 섬깁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황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결국 무너져야 할 세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참 되신 왕이 오실 때 무너져 버릴 세상의  제도이며, 정치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롯 왕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새로운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황금을 바쳤다는 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황금 만능주의를 버리고 예수님만을 나의 왕으로, 나의 주님으로 섬기겠다고 작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벵겔 (Johann Bengel)은 황금은 믿는 이들의 마음을 뚯한다고 합니다.

유향 –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동방 박사들이 드린 두번째 예물은 유향입니다.

향기가 좋은 유향이 사용되는 곳은 성전 예배와 성전 희생 제사였습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드리는 정성어린 선물입니다. 요한 벵겔 (Johann Bengel)은 유향은 기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향을 사용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임무를 감당한 이들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라틴어는 폰티펙스 (pontifex)다. 이 말은 ‘다리를 세우는 자’ 라는 뜻입니다. 즉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순간에 제사장들이 자신의 위치를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고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드는 데 쓰임을 받으면 되는데, 때때로 자신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리에 섭니다. 그래서 자신이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에게 섬김을 강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위치를 착각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해 백성들을 섬기며 종으로서의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했고, 진정한 왕이 오셨을 때 그 왕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과 위치가 도전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방 박사가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자기 중심의 삶을 포기한다는 선언입니다.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섬김의 방법과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며 섬기겠다는 표현입니다.

몰약 – 사람에게 드리는 선물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세번째 예물은 몰약이었습니다.

당시에 몰약은 시체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몸에 바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몰약은 항상 죽음과 관련이 깊습니다.

헤롯은 피를 흘림으로써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왕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두 살이 안 된 아이들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마2:16). 이것이 바로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되 힘과 권력으로 무자비하게,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지배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며 무기를 가지고 죽음과 피와 폭력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2-3)

그분은 죽음으로써 진정한 승리를 거두셨고, 온 세상의 영원한 왕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므로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몰약을 바침은 곧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벵겔 (Johann Bengel)은 몰약은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살인과 전쟁, 폭력, 그리고 살인 등의 모든 사악한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포기하고 버려야 할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들은 무엇이 다릅니까? 과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한홍 목사가 쓴 ‘칼과 칼집’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칼은 콘텐츠나 지식과 노하우에 비유한다면, 칼집은 그 칼을 제대로 쓰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칼일수록 칼집도 좋습니다. 칼집이 없는 칼은 아무 곳이나 찌르고 마구 베는 골치거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권력은 작은 칼입니다. 큰 권력은 큰 칼입니다. 이것을 칼집에 넣어서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주님께 바치지 않으면 작은 칼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째르는 비수가 될 것이요, 큰 칼은 사람의 목을 치는 망나니의 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칼의 주인은 자객이 되고, 망나니가 되는 것입니다.

몰약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권력과 부와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자

이 아기 예수님께 우리는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한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이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경배해야 합니다.

사람들 마음 가운데 아기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다른 모습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에 어떤 사람은 죄인의 모습을, 어떤 사람은 원수의 모습을, 어떤 사람은 악마의 모습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자신과 타인의 모습 속에서 죄인만 보입니다. 원수만 보입니다. 악마만 보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마음에 어린 아기 예수를 모신 사람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은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왕으로 오셔서 황금을 받기에 합당하셨고, 우리를 위한 진정한 제사장으로서 유향을 받기에 합당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분으로서 몰약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경배자로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황금을 드림으로 가장 값진 귀한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유향을 드림으로 가장 경건한 경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몰약을 드림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헌신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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