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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과 임미엘 (사 41:8-10,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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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이사야 41:8-10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신약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기독교의 독특성

우리가 믿는 진리는 많은 진리 중의 하나인 상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독특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의 독특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성탄의 사건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는 네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성탄의 첫째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약혼을 하고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은 처녀였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를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 세상의 사건에 개입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기에 단순히 자연법칙에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셔야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 잉태되느냐에 따라서 누구의 아들인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섭니다. 사람이 신을 찾기에 열심입니다. 사람이 신적인 경지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찾아 오셨습니다. 복음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 되려고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 내가 사람이 되었노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성탄의 둘째 진리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와께서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삶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성탄의 셋째 진리는 “임마누엘”의 신비입니다.

히브리어로 ‘임마누’란 말은 ‘우리와 함께’(with us)라는 뜻입니다. ‘엘’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6-7장).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과 함께 계시는 사건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만나려면 선해지고, 고상하고, 도를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공을 드리고, 고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임미엘의 하나님
성탄의 넷째 진리는 ‘임미엘’의 하나님입니다.

‘임미’라는 히브리 말은 ‘나와 함께’(with m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엘’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임미엘’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네 번째 진리는 우리에게 앞의 세가지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믿을 수 있게 하시며 나에게 구원을 주시며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파묻힌 익명의 내가 아니요, 하나님께 알려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누추한 자리도 피하지 않으시고 내게 오셔서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8-10).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야곱이라는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두번째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라는 한 개인을 뜻합니다. 한 개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07년도의 성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함께 하시는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백화점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성탄 카드 속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주고 받는 상품권과 선물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성탄 캐롤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 깊이 함께 하시는 성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가?
그러면 누가 ‘임미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가난한 마음
먼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임미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탄은 가난하고 누추한 삶에 하나님께서 오시는 사건입니다.
미가는 일찍이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

미가는 베들레헴이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며, 보잘것없는 에브랏 집안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아무 것도 내 세울 것 없는 땅,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역사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들어 쓰서셔 당신의 구원 역사를 근본적으로 새로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할 때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는 가난할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상하고 찢긴 마음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나에게는 사방이 막혀있어. 나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하며 한탄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성공한 척하고 허세를 부려보아도 아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마음이 희망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오만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이 넘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좌절을 겪고서야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자신이 모든 것이 파산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업에서, 인생 계획에서, 건강에서, 인간관계에서, 도덕에서, 나의 모든 것에서 파산한 사람이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과 삶이 가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가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소박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궁전이 아닌 마굿간에서 평범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간이 겪는 온갖 고초를 겪으셨고, 가장 낮은 죄인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낮추시고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소유는 가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최대의 재산이 가난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집이 없고 방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집 한 칸 없이 떠돌이로 살았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집 없이 가난한 사람, 신분이 천한 사람, 창녀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예수님이 미리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났다면, 부자집에서 태어나셨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낮아진 마음
둘째, 낮아진 마음이 임미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 언제나 송구스러워서 가슴이 떨립니다. 예수님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가장 낮아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낮아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의 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물의 먹이통까지 낮아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목사인 제가 여러분의 집에 찾아가도 저를 상전 대접하십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자리로 마련해 주십니다 저 같은 죄인도 그렇게 대접을 받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어떻게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마음이 마구간에 있는 자
낮아진 마음은 그 마음이 마구간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동물의 먹이통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왕궁과 부자집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구유에 있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마음이 마구간과 구유에 있는 사람을 ‘마구간 정신’의 소유자, ‘구유 정신’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굿간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의 마굿간을 경험해본 사람은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상황이 어떤 것이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지거나 권력을 가졌다가 잃어버리면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살기 어렵습니다. 많은 권력을 가졌던 사람일수록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이 큽니다. 부유했다가 가난해지면 부유했을수록 상실감이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시작했기에 어떤 고난과 배고픔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도 마구간의 자리까지 낮아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높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굿간에 살아본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을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사느냐고 묻습니다. 또 병든 사람에게 왜 병들었느냐 고 합니다. 마치 병든 것이 무슨 잘못인 양 말합니다. 여러분은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십시오. 망하고 싶어 망하는 사람 없고, 못나고 싶어 못난 사람은 없습니다. 제 몸이 아파보아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제가 가난해 보아야 다른 사람의 가난을 이해합니다.

가장 밑바닥에 내려간 사람에게 설교가 필요없습니다. 충고가 필요없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와 용납과 사랑입니다. 이것이 마굿간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탄의 상징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카드와 트리, 캐롤은 성탄의 상징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굿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찾아가서 다독거리고 격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성탄이고 마굿간 정신입니다.

억울한 자, 갇힌 자, 병든 자, 돌봄을 받지 못한 자를 찾아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성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맞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신 곳이 마굿간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마구간까지 낮아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하고 부유한 곳에 가시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곳,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마굿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마음에서 마구간으로 내려 가는 것, 이것이 성탄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마굿간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겸허하고 가난하여질 때 좌절과 절망이 축복의 신호탄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마음
셋째, 고통당하는 사람이 임미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이 분이 아기로 오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환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반갑게 맞았던 사람들은 양을 지키는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는 낮에 일하는 목자보다도 더 낮은 사람입니다. 다른 아무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의 환영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당시에 태어난 아이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은 잔혹한 살육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마굿간에 태어난 예수님, 집 한 칸 없이 떠돌던 예수님, 죄 없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며 온 살이 다 패이신 예수님, 가시 면류관을 이마 쓰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 서른세 살의 푸르디 푸른 젊음의 나이에 십자가 위에서 두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옆구리에 창날을 깊이 박히신 예수,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이렇게 사시다 이렇게 돌아가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고 그 분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위로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수록 고통의 신비 속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온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바로 이것을 기다리고 기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간은 불행합니다 모든 기다림이 끝났다면 불행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위로와 동행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역전의 은혜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짐승 우리처럼 냄새나는 내 마음의 방에 오십니다. 낮은 자인 나에게 오십니다. 고통 당하는 나에게 오십니다. 세상의 것들에 의해서 포로된 나에게 오십니다. 재정적으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관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정신적으로 다른 돌파구가 없는 나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의 오신 기쁜 소식에 가난한 마음과 낮은 마음과 고통하는 마음, 그리고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성탄의 기쁨을 방해하는 너무 우울한 말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이런 비천하고 비참한 인생의 문제에 ‘역전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처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병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에게 병낫는 소식만큼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의 밤에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좌절 속에서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습관, 미워하는 마음의 습관 속에서 날마다 좌절하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예수님은 내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으로, 위로하시는 분으로 함께 하십니다. 넘어져서 상처 투성이닌 아픈 내 무릎을 감싸주시며, 내 몸을 붙잡아 들어 올려 주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날마다 패배하는 나에게 오셔서, 나와 함께 싸우시고, 나를 이기게 하시는 분으로 다가 오십니다.

이렇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임미엘’의 하나님은 ‘역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역전뿐만이 아니라, 속 사람의 역전을 이루어주십니다. 불순종을 순중으로 바꾸시며,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각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셔서 인생 역전의 큰 은혜를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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