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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 (사 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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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에 드디어 올해의 사자성어가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중국의 유교경전인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인데 그 뜻은 ‘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고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나타냅니다. 교수신문은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이번 선정의 가장 큰 배경’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사회는 그렇게 아쉬운 한해가 흘러갔지만, 우리 신앙생활의 한해는 어떠할까요? 연말연시와 성탄의 계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지금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야 할 신앙의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의 ‘임’은 함께, ‘마누’는 우리와, 그리고 '엘'은 하나님이란 뜻으로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뜻깊은 시점에 이것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확신을 갖고 이 단어를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임마누엘을 가장 처음 언급한 말씀입니다. 아울러 본문은 임마누엘이란 말이 어떤 배경가운데서 나오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욱 임마누엘의 신앙을 견고하게 다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과연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나온 말이었을까요? 여기에 보면 두 가지의 배경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르게 살지 못할 때 나온 말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왕 아하스에게 전한 말입니다. 아하스왕은 유다 왕정에서 2번째로 사악했던 사람입니다. 왕 가운데 북 이스라엘의 아합이나 여로보암, 그리고 남 유다의 므낫세와 아하스가 대표적으로 악한 자들입니다. 아하스 시대에 우상숭배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성전은 굳게 문을 닫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졌던 시대입니다. 우상숭배를 위해 투자한 재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던 시대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면서 사회에 극심한 타락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잘못은 자기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친 사건입니다. 생명은 온 천하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자녀를 우상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 시킨 것입니다. 아하스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책망하기 위해 이사야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임마누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아하스를 꿰뚫어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배경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어 공의와 정직과 바른 삶으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인지,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나타내시려고 임마누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의 그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바르고 참된 삶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나라와 공동체와 개인을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짚고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잘못된 삶과 모습에서 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종교적인 습관이나 행위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갖는 모든 신앙적인 행위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바른 삶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말씀의 가장 놀라운 가치는 실천과 행동에서 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은 지식의 습득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감정의 표현에서만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의지의 결단과 삶의 행동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믿음이 필요하고,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이것을 위해 주님은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탈리아의 신학자 지오반니 빠삐니 라는 사람이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상 넓은 천지에서 왜 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여러분, 구유는 짐승의 더러운 밥통입니다. 세상에 어떤 가난한 사람도 이 땅에 태어나는 자기의 소중한 아이를 짐승의 밥통에서 맞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첫 걸음을 더러운 구유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지오반니는 이 물음에 대해 스스로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그곳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은 더럽고 추악했던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우리를 빛으로 부르시어 바른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알려주시려고 임마누엘로 나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팝 가수 중에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60년대 그의 절정기를 구사하며 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혹적인 목소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부른 대표 곡이 있습니다. ‘마이 웨이(my way)’라는 노래입니다. 원래 이 노래는 프랑스가수가 이미 발표한 노래인데 폴 앵카 라는 사람이 영어가사로 번역하여 프랭크 시나트라가 은퇴를 발표하자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백발이 성한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 모든 사람은 더욱 열광했습니다. 마치 이 노래는 그의 노래인 것처럼, 그의 생애를 대변하는 것처럼, 그의 삶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And now the end is near, So I face th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졌군, 내 생애 마지막 순간을 대하고 있어, 사랑하는 친구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내가 확신하는 바대로 살았던 삶의 방식을 얘기해 볼게... 난 충만한 삶을 살았고, 난 항상 내 방식으로 살았다는 거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었고, 한치도 예외 없이 그것을 끝까지 해냈어, 내가 했던 모든 것 생각하니, 부끄러워하지 않는 투로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내 방식대로 살았다고, 세상이 내가 당당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세상이 나의 당당한 삶을 알고 있지, 그리고 내 방식으로 해왔다는 것을...”

  그의 노래로만 보면, 그는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당당해 보입니다. 누구 앞에서라도 부끄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이 그랬을까요? 프랭크 시나트라를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실제 그가 이 노래처럼 살았을까요? 그는 1998년 죽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성공과 출세의 야심으로 가득 찬 욕망의 사람이었고, 성격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생활은 문란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인간관계도 친구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당당하지 않았고, 충만하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래 따로 삶 따로였습니다. 감정 따로, 생활 따로였습니다. 노래만큼만 살았어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건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생활과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감정의 표현이 전부가 아니고, 지식의 습득만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절정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얼마나 주님처럼 바르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과 함께 바른 삶을 다시 굳게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힘들고 어려울 때 나온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임마누엘의 예언은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만을 배경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이스라엘의 위기와 고난과 절망에서 희망과 용기와 위로로 주신 징조요 선포요 예언입니다. 아하스왕의 불신앙과 잘못으로 이스라엘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웃나라인 아람과 동족인 이스라엘의 침공 소식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라는 점점 어려워졌고, 나중에 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무수한 인재들이 죽임을 당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형제와 부모와 가족을 잃고 그들은 낙심에 빠집니다.
가깝게는 이웃나라의 침공으로 위기를 맞고, 멀게는 나라의 멸망으로 어렵게 되는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한 징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메시야가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마다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를 예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다시 징조로 반복하심으로서 하나님은 유다를 택하셨고, 잘못했지만 여전히 사랑하시며, 어려울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궁극적으로 이들을 세워서 세계와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지금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배경을 갖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게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43:2)

  이 말씀의 예언은 마태복음 1장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이 끝나는 28장 마지막에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은 1세기를 살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들 삶에 혹독한 시련과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임했을 때 그들은 임마누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은 고난도, 아픔도, 시련도, 괴로움도, 눈물과 통곡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아신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바로 이것이 중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다윗일 것입니다. 다윗은 큰 영예와 축복을 얻은 사람이지만, 많은 고난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가 당면한 인생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위로가 컸지만,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너무도 컸습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기도했습니다. 지치고 눈물날 때는 더욱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일본의 여류 작가 중에 ‘미우라 아야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빙점’이라는 작품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입니다. 그는 24세 때에 폐결핵과 척추합병증으로 13년의 투병생활을 했고, 죽음의 위기를 넘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분명 고통은 참기 힘든 인생의 시련이었지만 그 가운데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처절한 고통의 순간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을 ‘임마누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간단한 고백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문득 쓸쓸해지면 곧잘 ’임마누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 마음에 스치는 때에도 고백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아주신다는 기쁨이 솟아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로 걸어갈 때에,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랑한다, 너의 눈물과 고통을 다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워주십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고, 나의 소중한 보배와 힘이 되시려고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주님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려고 임마누엘로 오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약해지지 마시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과 위로를 얻으며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한해의 끝자락에서, 성탄절 이브에 우리에게 들려주신 신앙의 사자성어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의 말씀으로, 실패하고 바르지 못할 때 나를 온전히 세우는 말씀으로 받아, 이번 한 주간도 믿음 안에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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