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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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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을 가진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비록 내 자신이 현재는 잘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간절한 열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저희 성도들을 만나면서 늘 느끼는 감정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일이 싫어서 잘 못하고, 안 한다 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상태가 잘 되지 않아서, 혹은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혹은 아직까지 믿음이 진보하지 못해서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잘 못함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좀 부족하고 온전치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제 오늘 이와 같은 간절함은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능력이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제 내일은 주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로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관하여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는 과정에 있었을 때 그의 제자들과 그 주변여건 속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해야 할 이러한 생각들과 여건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역을 앞두고 마음에 심히 많은 번민이 계셨습니다. 기도 가운데도 나타나지만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어려운 길을 면케 되기를 소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결국 그 일은 해야 된다라는 것을 마음에 이미 수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겟세마네로 가게 되는데 주변에 수많았던 많은 사람들을 다 물리치시고 열 두 명의 제자만을 데리고 갑니다. 그러다 또 아홉 명을 두고 세 명의 제자만을 데리고 갑니다. 그러다 또 그 세 명을 놔두고 혼자 마지막 기도의 자리에 갑니다. 그러면서 남은 세 명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요한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것 같이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고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정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가 여기 깨어 있으라는 말은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모든 것이 아버지께는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간절한 기도 끝에 예수님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음에 고통하고 고민하는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은 그들의 깊은 혼곤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잠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깨우며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다오” 하며 요청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자들은 잠에 못 이겨서 그냥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왔을 때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한 것을 보셨고, 세 번째 마지막으로 오셔서는 그들이 자는 모습을 보시고 “이제 마음대로 너희도 자고 쉬어라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 하고 그들에게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십자가의 수선을 밟으셔서 고통당하시고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른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주님의 길을 따르지 못하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은혜의 백성들이 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는 연약한 인간의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이루거나 그 뜻에 동참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 먹은 열심 있는 열정만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고 단언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본문위에 있는 <마가복음 14장 31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얘기 합니다.
예수님과 마지막 밤을 보내는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아니, 주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나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주님을 쫓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마가복음 14장 71절>에 보니 뭐라고 기록이 되어져 있냐 하면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너의 말하는 사람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여 가로되’ 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 한 번 얘기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막 욕을 하며 싸워요. 그러면 우리가 그 말을 전달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달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제가 무어라고 전달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러이러한 욕을 했습니다 하고 그 욕한 것을 제 입에 올려서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전달하려고 해도 차마 그게 너무 더러워서 입에 올려서 전달하지 못할 거예요.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저기 두 사람이 있는데 말도 못할 욕들을 하면서 싸워요’ 이렇게 표현 한다구요. 이게 문어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그 표현 이예요. ‘저주하여 맹세하여 가로되’ 라고 말씀하는데 베드로는 정말 입에도 못 올릴 막말로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어떤 지경입니까? 성경의 기자는 도저히 베드로가 어떤 욕을 했는지 여기에 기록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저주하여 맹세하여 가로되 이와 같이 객관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쫓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말로 욕하고 나는 모른다라고 부인할 때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베드로가 그러면 그 전날에 과연 예수님께 거짓말을 했을까요? 베드로는 거짓말 한 거 아닙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따르겠습니다 라고 한 것은 베드로의 진실이고, 그 때 뜨거운 열정이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마음의 진솔한 심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고 환경과 모든 여건이 바뀌었을 때 베드로가 그 마음의 결심과 뜨거웠던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정직하게 살려면 정직하게 살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말씀드리잖아요. 정직하게 살만한 능력을 못가지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환경과 상황 속에 끌려들어가고 거기에 굴절 돼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르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게 정말 마음은 그렇게 먹지 않았으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잠자는 제자들처럼 우리 삶 가운데 쉽게 굴절되고 넘어지고 마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가운데 하나는 자꾸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가 어렵고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자꾸 이전이 좋아 보이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도 그때는 꽤 괜찮았었는데.....’.‘아휴, 내가 조금 늦게 믿을 걸......’ 이런 생각도 들 수 있단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430년이나 애굽에서 종살이 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 고역의 탄식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져 하나님께서 권념하사, 굽어 살펴보시사 그들의 고역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애굽 백성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어요. 마지막 열 번째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는 재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사자가 건너갔고, 이 유월절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하는 대역사를 얻었어요. 출애굽 할 때 그냥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의 마음을 다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나오고 싶은 것 달라고 하면 다 줬어요. 마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수고한 후에 그 집에서 나오려고 할 때 라반이 꾀를 써서 한 푼도 안 주고 쫓아 버리려고 했을 때 야곱이 라반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 지혜로 말미암아 받을 삯을 다 받아가지고 거부가 되어가지고 나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는 순간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러니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그들은 보석이며 귀중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성막을 지었지요. 광야에서 그들이 무슨 보석을 가질 수 있었으며 종살이 하면서 무슨 그와 같은 귀한 것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나올 때 그들은 원하는 것 다 가지고 나왔어요. 이러한 아름답고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 광야에서 목마르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다시 우리에게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에서는 죽을 염려가 없었고 우리가 편안히 먹고 지냈는데 여기서 죽게 되는구나. 장사지낼 곳이 없어서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느냐? 하고 모세와 하나님께 항거했단 말입니다. 물론 광야길이라는 게 정말 성지순례 가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참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정말 이전의 애굽으로 돌아가자란 말이 나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약한 심정 때문에 당장 앞에 있는 것만 즉각적으로 반응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무지 졸리우면 참지 못하고 정말 기도해야 될 순간에 잘 수밖에 없는 성정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에 한 때의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는 그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정서적 설득은 한계가 있고 정서적 설득이 반복적 훈련에 의해 실제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우리가 결국 그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을 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인생은 근본적으로 져야할 인생의 기본적인 짐이 있습니다.
<40절>보니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내려와서 그들을 보니까 저희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했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연약함입니다. 그것도 인생의 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무슨 말하시면서 기도해 달라고 할 때 콧방귀도 안 뀌고 예수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하고 잔 게 아니에요. 그들도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졸려서 졸림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연약한 짐이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무엇 때문에 나옵니까? 너희가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따르라는 말씀 뒤에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냐면 “나는 장가가야 합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밭 갈러 가야 합니다. 나는 장례 치르러 가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하러 가야 합니다.” 전부 이런 핑계를 대고 다 가버렸어요.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든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생에는 누구나 져야 될 각자의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짐을 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짐에 치여서 주님 앞에 나왔다가도 곧 엎어지고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청년 한 사람이 저에게 와서 면담을 요청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제가 꼭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제가 그 일을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활하는 것, 의,식,주 문제, 기본적인 문제 신경만 안 쓰게 해주고 그 일만 한다면 저는 제 은사를 발휘해서 그 일을 잘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좀 애매하더군요. 세상에 의, 식, 주 문제 신경 안 쓰고 기본적인 것 다 해결되고 그리고도 선을 안 행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기본적인 문제 다 해결됐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것만 딱 해서 성공 못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 마음은 기특하니 기도는 또 해줘야 하죠.

우리 인생의 기본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기본적인 문제 해결하며 허덕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인생의 짐이 있어요.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주 예수 앞에 와서 짐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가는 것이지 우리 인생의 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 가운데 이런 학생들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이 흐트러지고 머리가 맑지 않아서 공부를 잘 못하겠는데 마음만 잡히고 머리만 맑아지면 공부 잘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잡히고 머리 맑아지면 공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문제는 마음 잡히고 머리 맑아지는데 까지 그게 어려운 거지요.
‘나에게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우리 인생에 나에게 이 문제만 해결되면......’ 이라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문제를 다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가운데 몸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아픈 거예요. 조금씩은 다 아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참을 만하니까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는 두 종류인 것 같아요. 한 종류는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기분 나쁜 일 한 가지 때문에 마음 전체가 다 상해서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 이예요.

두 번째는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아, 내가 기분 나쁜 일이 생겼는데 내가 다른 일까지 영향을 미치면 안 돼. 이건 이걸로 끝내야지.”하고 차단시키고 그 마음 한 구석에 놔두고 다른 마음의 부분 가지고 나가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사람 이예요.
여러분은 첫 번째 입니까, 두 번째 입니까?
두 번째 이고 싶은데 첫 번째죠.
대부분 우리는 아침에 기분 나쁘면 그 기분 나쁜 게 계속 연결돼서 저녁까지 전이되고 오염되는 경우가 많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은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내가 말 한마디 잘 못해서 실수했으면 그것으로 끊어야지 그 실수를 자꾸 반복해서 합리화시키려고 자꾸 하다보면 점점 더 나빠지거든요.

우리 인생은 어차피 짐이 있습니다. 그 짐 지고 가야 되요. 육신의 피곤한 짐도 있고 몸이 아픈 경우도 있고 주변의 모든 식구들이 내게 짐이 되기도 하고 주변에 내게 힘이 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내게 짐이 되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할 수없이 지고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지고가야 할 우리 인생이기에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기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지어진 육신적인 짐, 내게 있는 주변의 환경과 모든 어려운 짐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그나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깨어있는 때란 말입니다. 깨어있으면 기도를 좀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은 깨어있질 못 하는 것입니다. 깨는 것도 주님이 오실 때만 깬단 말입니다. 아차, 또 자고. 아차, 또 자고. 제자들도 주님의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육신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깨우고 나중에는 뭐라고 하죠? 제자들이 아무 할 말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없지요. 그런데 그나마 예수님이 깨워주시면 그 순간이라도 깨는 것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잠자는 것은 주님이 안 깨웠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자는 순간에도 주님이 와서 깨워주시도록 더욱 더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부족과 무지 때문에 그의 뜻에 동참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연약한 요소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또 한 가지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왜 주님이 깨어 기도해 달라고 했는데 못했을까요?
육신이 약하고 그리고 또 모든 연약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제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뭐 어부 출신이고 못 배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동가숙 서가식 하면서 머리 둘 곳 없이 가는 곳마다 하늘을 이불삼아 지내셨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내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많은 사람이 환호했지만 환호의 환성이 꺼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다 그 주변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의 떡을 먹이고 능력의 역사를 행하셨지만 그 기적 때문에 환호를 받는 순간 보다는 더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 많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이나 그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보통 의지가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제자들을 보면 대단히 목적지양이 강한 사람들이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3년 동안이나 꼬박 따라다녔겠습니까? 예수님도 아니면서 어떻게 꼬박 따라다녔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들이 지양하는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무지 때문에 그들은 그와 같은 수고를 했지만 예수님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를 지고 절규하면서 고통스러우면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해 내야 된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았다면 그들은 졸리다가도 깰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랐기에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육신적인 생각으로만 생각했기에 결국 육신에 지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면 이들은 예수님이 왜 괴로워하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그들은 이해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엉뚱하게 그들은 예수님,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가로막았던 이런 사람들이지요.

우리가 기초적인 내용을 습득하는 아주 초신자였을 때에는 어떠해도 괜찮습니다. 누구든지 초신자 때는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요. 여러분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자녀가 합격하기 위해서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어려운 문제 때문에, 어려운 경제 때문에 기도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게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돼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사역에 대한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이렇게 기도하지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구원해주셔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음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나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구하는 부분이 [일용할 양식]이어야 된단 말이에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의 사실이 나에게 제외되어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다 기복적인 사상이에요.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놀라운 은혜의 생명의 사역이 전제가 되면 그 모든 것은 당연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은혜의 사역인데, 만약에 이 생명의 역사가 빠져 있다면 이는 그냥 기복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신과 다른 게 뭐가 있어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원사역이 없으면 우리가 미신과 다른 게 뭐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이들이 육신의 성정에 연약하여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순간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속에 바로 동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 할 때도 십자가 사역을 이해할 때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을까? 못 박히셨고, 창에 허리 찔리셨고, 가시관 쓰시느라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감상적인 회의적인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는 믿음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해요. 여러분 세상에는 소위 말하는 정의와 의를 위해서 예수님보다 더 많은 고통을 오랫동안 고통 겪으며 예수님보다 더 많은 고문을 받으며 정말 더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의를 위하여 산 의인정도에 불과한 분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고,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이 고난스러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고난스러워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괴로워했던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죽으실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순간도 죄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끊임없는 죄악의 길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함성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님은 죄의 한계에 대하여 절규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본인이 죽어야 하며 죄 때문에 인간을 위해서 죽는 이 순간에도 저 사람들은 죄인으로써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말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절규하고 죄에 대하여 절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결국 고독한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사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그 아픔을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보아도 그들은 다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밀물같이 들어왔다가 썰물같이 다 빠져 나갔을 때 해질녘에 비감한 어조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모든 사람이 기적에 환호하고 모여 들었지만 그들은 해가 지면 다 떠났는데 과연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느냐. 그때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우리가 뉘게로 가겠나이까’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발견했기 때문에 우린 다른데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왔다가 가는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홀로선 단독자의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다 가고 아홉 명만 남기고, 세 명만 남기고, 마침내 혼자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의 장소에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독 속에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고독 속에 우리를 몰아가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고독 속에 외로움과 적막 속에 우리를 놓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어떤 계획과 우리를 통해서 이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은데 여러 소리를 내면 하나님의 소리가 구별돼서 들리지 않습니다. 자꾸 우리를 고독한 지경으로 몰고 가서 정말 들어야 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받아서 우리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에 묵혀져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모세야 네 백성을 구해라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는 할 수 없다고 핑계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기에 결국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독 속에 말씀하실 때 분명한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든 주변을 차단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죄송한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도 목사를 만나야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뭔가 성도에게 어떤 말씀을 드릴 때나, 어떤 가르침을 드릴 때나, 어떤 여러 가지 권면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심방을 가기도 하고 또 성도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약속해서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대부분 남하고 얘기할 때, 이 얘기는 내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겠다고 여러분 마음에 분명한 계획이 있다면 여러분 말 많이 합니까? 적게 합니까? 중요한 내용일수록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희석돼서 평범하게 들릴 것 같아서 중요한 얘기는 절대 길게 하지 않습니다. 정말 열 마디 할 말도 딱 한 마디로 요약해서 하는 것이지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요.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요. 일반적으로 만나는 것은 서로 대화도 많이 하지만 특별히 뭔가 분명한 메시지를 드려야 하겠다 하는 경우에는 말을 많이 안하고 주로 듣잖아요. 그리고 밥도 같이 먹고 헤어져 나오기 한 3분 전 쯤에 마지막으로 한마디 드리고 오지 않습니까?

“오늘 식사 잘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밥 먹으러 온 것 아닙니다.” 기껏 먹고 밥 먹으러 온 것 아니라고 하면 뭔가 비장한 말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럼 사람이 긴장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 한마디 드리면 들으시겠지요. 대부분 들으시잖아요. 여러 말 길게 했으면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정말 말을 아꼈다가 딱 한 마디 드리면 정말 이 말이 중요하구나. ‘목사님이 오늘 나에게 이 한마디 하기 위해서 이때까지 하실 말씀을 참고, 또 때론 한마디 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오셨구나!’ 라고 들으면 누구든지 그 말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인 고독 속에 놓으셨을 때,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을 때, 그건 우리들에게 축복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분명히 어떤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내가 왜 처량하게 이 말을 듣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나에게 분명히 맡겨주시기 위해서 날 이와 같은 상황에 놓으시고 나를 통해서 이 말씀을 들려주셔서 이렇게 행하시는군요 라고 우리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분명히 우리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 외롭고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요 은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렵고 적막한 고독한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극복의 과정입니다. 근원적으로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없는 내 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극복할 수 없는 내 마음의 갈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평생 내가 원했던 목표가 내 눈앞에서 무너져 갈 때 우리는 그 좌절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좌절을 딛고 일어서야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달려보고 그것이 합격될 때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성정 때문에,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짐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깨워주시고 빛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소원하며 우리는 우리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외롭고 고독한 적막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은혜를 주심을 마음에 깊이 새기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역사를 구하시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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