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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 (사 7:13~14, 롬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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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허영의 시장이 나옵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도시입니다. 죽은 것처럼 생기 없는 영혼, 인자함이 없으며 탐욕과 교만과 분노 등 온갖 진기한 것이 거래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흠 잡을 데 없이 좋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연구, 공동체를 위한 봉사, 종교 세미나, 초월적으로 산다는 자부심을 주는 취미활동, 교회 섬김, 외식 등 아름다운 삶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사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사회는 허영사회입니다. 우리는 인류 사상 가장 번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탄 장식도 어느 때보다 화려합니다. 최첨단 과학과 지식, 정보, 문화가 극도로 발달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살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세상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현대교회는 많은 모임이 있습니다. 봉사기관이 있습니다. 좋은 세미나가 끊임없이 열립니다. 화려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현대식 음향과 영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 생명이 없다면 모두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은 생명입니다. 잃은 생명을 찾아주시려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빌려 생명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가지시고, 인간의 생명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히브리 이름 ‘요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입니다. 요수아란 말의 뜻은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요수아, 예수아, 여호수아, 여호사밧이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1에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란 이름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시기 전에 지어준 이름입니다. 이전에는 많은 분들이 나기 전에 이름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리 남자의 이름을 지어두었는데 여자가 태어나도 남자 이름을 그대로 붙였습니다.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이 이름에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나시기 전에 이미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이름이 말합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예수님이 오실 때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이사야 7:14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를 향해 함께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23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성탄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신은 복수가 아닌 사랑입니다. 그분의 유일한 징벌은 사랑의 행위를 중단시킨 사람에게 그것을 계속 이어나가 완성하도록 강제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합니다. 배반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복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죄의 자손 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생명의 자손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탄의 의미는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하지 않고 예수를 통해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 계획입니다.

첫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로마서 5:17에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인 성탄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대로 사람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다 태풍을 만나 파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상 가운데서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이 구원을 받습니다. 배와 화물은 다 버리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이 보존됩니다. 바울 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져서 모두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구출을 받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지 못함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성탄을 통하여 이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생명이 없는 죄로 가득한 곳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불어넣어 생명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역사적 사건이 성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생기로,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아담은 사망의 원인 제공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공급자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아담의 자손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아무리 육체가 건장해도 생명이 없으면 그 육체는 더럽습니다. 시체는 모두가 피합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생명인 것을 증명합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10:10에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생명이신 것을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공급자인 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생명의 부여자이심을 보이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주린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도 다 생명 사건들입니다.

  성탄은 죽음의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신 사건입니다. 생명 없는 죽음의 땅에 생명이신 주님이 오셔서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오래 전 광부들에게 일종의 조기 경보 체계가 있었습니다. 카나리아 같은 작은 새를 광산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치명적인 무색 가스를 새들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광산 안에서 작고 귀여운 새 트위티가 죽으면 광산 밖으로 빠져 나가라는 신호입니다. 치명적 죄악과 서서히 죽이는 악 속에 묻혀 살던 인류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경보기로 오신 것입니다. 생명은 죄에 반응입니다. 도저히 죄와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는 힘입니다. 사도행전 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한 사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구원받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둘째, 작은 한 생명을 위하여 예수님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7:13에는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고 합니다. 작은 한 사람이라도 괴롭힘을 당하면 하나님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함께 당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가장 구체적인 괴롭힘이 무엇인지 아세요? 집단 괴롭힘을 왕따라고 하는데 하나님 편에서의 왕따가 무엇일까요? 그냥 인생이 괴롭다는 그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괴롭힘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괴롭힘을 당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죄를 일으키고 죽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7:8에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라고 합니다. 9절에는 “죄는 살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표현한 바대로 보면 죄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알겠지요?
  죄를 짓지 않은 사람 가운데 일부는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 나머지는 아직 죄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와 무관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필립 얀시는 “죄의 권세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중독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죄인인 인간은 온갖 중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탄이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첫째는 회개하지 못하게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인간을 구원받지 못하게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선하게 살지 못하게 온갖 유혹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일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절은 죄의 결과입니다. 단절은 무서운 일입니다. 단절은 범죄 행위입니다. 임마누엘은 회복입니다. 임마누엘은 성탄의 결과입니다. 임마누엘은 은혜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예수님은 중계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촉매가 되었고 땜쟁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 편이고 인간에게는 인간 편인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마지막 작은 한 생명이라도 다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최후의 유일한 수단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초등학생 책상 위에 적힌 글입니다. “놀면 형처럼 된다. 공부하자”. 형처럼 안 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간, 인간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전 언젠가는 천국에 가고 싶어요. 왜냐하면 제 형은 그 곳에 가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거든요”. 형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형도 가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가야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처럼 되지 않게, 성경의 악인들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헬레네라는 여인은 아주 예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원전 9세기 그리스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이었습니다. 대단한 미인인 이 여인 때문에 수천 명이 죽고, 수천 척의 배가 출항하였습니다. 그리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중해의 평화로운 왕국이었습니다. 파리스는 헬레네를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헬레네도 파리스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깊은 밤을 틈타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아가멤논은 그리스 각지에서 군대를 모아 적의 배로 트로이를 포위 공격하였습니다. 단지 헬레네를 찾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쟁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지막 한 생명을 찾기 위해 끝까지 마귀와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오심으로 이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사야 8:8에는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예수님의 임마누엘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게 임마누엘의 소식은 전파됩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받게 하십니다.

결론

  오스카 쉰들러는 700명의 유대인을 나치의 손에서 구출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쉰들러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서명한 편지를 전해주면서 반지 하나를 선물하였습니다. 반지 표면에는 탈무드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 자신의 공장 주임에게 쉰들러는 말했습니다. “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팔 수 있는 차를 가리키며 쉰들러는 말합니다. “저거면 열 사람은 더 풀어줄 수 있었는데”. “금으로 만든 넥타이핀으로 독일군을 매수하면 두 명은 더 풀어줄 수 있었는데”.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생명을 구하려는 그의 인도주의였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야드 바심’이란 유대인의 추모 성지가 있습니다. 600만 명의 나치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을 추모하는 장소입니다. ‘야드바심’이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을 추모하는 자리 그 가운데 쉰들러의 묘가 있습니다.

  마지막 한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한 사람의 생명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성탄은 생명이 오신 날입니다. 성탄은 생명을 주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탄을 맞이하여 생명 얻음을 감사합시다.

  이 생명을 기쁨으로 누리며 성탄을 맞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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