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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나그네 길의 한 지점을 지나다! (창 4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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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은 나그네 길 …

흘러간 대중가요 가운데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곡을 다 아시죠?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이 노래는 1960년대 중반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던 곡으로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노래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점에 섰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또 한 지점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사상이나 표현은 성경이나 우리의 믿음과는 다릅니다. 즉 “인생은 나그네 길”인 것은 맞으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 수 없다는 표현이나,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는 것 등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비록 이 세상이 죄 가운데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역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정과 미련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신자든 불신자든 인생이 나그네라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성경은 인생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말 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이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지혜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2. 나그네 인생을 사는 방법

오늘 본문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칠십인의 가족을 이끌고 팔레스틴을 떠나 이집트의 고센 땅에 이민을 한 다음, 이집트의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안내로 이집트의 통치자 바로 왕을 배알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왕은 요셉의 아비 야곱을 보고서 그에게 제일 먼저 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이 질문은 바로 왕이 요셉을 통하여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온 사연을 다 알고 있다는 것과, 그 가운데서 특히 부친 야곱의 요셉에 대한 애정을 알고서 아주 친밀하게 물어본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은 보는 사람들이 그의 나이를 물어 볼 만큼 대단히 나이가 많았습니다. 야곱의 나이를 물은 바로의 질문을 보면, “연세”라는 말에서 “연”은 ‘해/ 년’이라는 말이며, “세”는 ‘날, 하루 하루’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의 질문은 ‘당신이 살아온 햇수와 날수가 엄청나겠군요?’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냥 나이만 말해도 될 일인데, 야곱은 제법 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 속에는 그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인생을 어떻게 보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1) “험악하게” 살지 말아야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나그네”로 요약했습니다. “나그네”란 남의 나라에 잠시 머무는 사람, 즉 고국과 고향이 따로 있어서 언젠가를 그리로 돌아갈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통하여 야곱은 자신의 지나온 삶, 그 험악한 세월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인 에서와 다투었으며, 태어날 때도 서로 먼저 나서 형이 되겠다는 듯이 싸움을 했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싸움에 익숙한 야곱의 삶은 그 이후에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형을 이기기 위해 형과 싸웠고, 다음에는 장인을 이기기 위하여 장인과 싸우듯 살았고, 그 다음에는 주변 부족들을 이기기 위해 그들과 싸우면서 살았습니다. 정말 그에게는 삶 자체가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표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그 목적이 달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비단 야곱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싸우듯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싸움터에서 패배자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자신의 나그네 길의 형편이 “험악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험악했다”는 말의 의미는 ‘악하다, 나쁘다’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지난 삶이 ‘부끄럽다, 후회스럽다, 보잘 것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사악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야곱이 자신의 지난 삶을 “험악했다”고 표현하는 뜻은 살기 위하여, 아니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아온 지난 날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을 향하여 악한 것이었다,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야곱의 이 말은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형편없고 타락한 삶이었기에 “험악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늘 본향을 사모하지 않고 살았기에,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았기에, 세상의 성공과 부와 명예만 좇았기에, “악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돌아보실 때, 혹시 여러분들도 야곱처럼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부분, 아니 그보다 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악하다’고 표현할만한 것은 없습니까?

영국의 시인이자 풍자가였던 찰스 처칠이라는 사람은 아주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의 모든 작품도 대부분 아주 저질스럽고 타락한 내용이었습니다. 1964년, 그는 죽음을 앞두고 최후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재능을 추하게 사용한 것과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 것에 대해서 엄청난 후회를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참으로 바보였다”였습니다.
존 렌돌프는 초창기 미국의 정치가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거부한 채 무신론자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가 마지막 임종 시에 부르짖기를 “후회, 후회, 후회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해 달라! 성경 안에 있는 그 말씀을 보여 달라! 아, 후회! 너희는 이 말의 의미를 모르리라! 이제라도 나를 주 예수의 자비하심에 맡기노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후회 차원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악하게 살온 것에 대한 참회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일에 후회하는 것보다 미리 후회 없이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윌리엄 보덴’이라는 분은 1904년, 미국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엄청난 땅을 상속받아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 여행을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나의 일생을 전도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 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성경 뒷장에 “후퇴 없음(No Retreat)”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의 회교도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다가 잠시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뇌막염이 걸려 한 달도 못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런데 그에게서 발견된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그가 이집트에 병에 걸렸을 때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후회 없다(No Regret)!” 일을 얼마나 많이 했고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왔기에 그는 후회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올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날에 대해 후회와 아쉬움,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 여러분에게 생명과 삶의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악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지는 않습니까? 후회는 지난 날로 충분합니다. 이제부터라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나그네 길에 대해 후회가 없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사 지금까지 살게 하시고, 또 내년도 살게 하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후회없는 삶입니다.

2) 곧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두 번째로 야곱은 자신의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대답했으며,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는 말로서 인생을 나그네의 길로 묘사했습니다. 야곱은 왜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을까요?

어떤 공원의 벤치에 한 사람이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공원 청소부가 청소를 하던 중,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맨날 이러고 있는 당신은 누구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글쎄요 내가 누군지 나도 몰라서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에 이어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이 사람은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였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공원 청소부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은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부터 16절은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해 야곱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야곱이 자신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과 그 고향은 자신이 나온 팔레스틴, 가나안이 아니라 하늘 본향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 하늘 본향을 사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그네란 고향이나 집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나그네란 잠시 집을 떠나 여행하고 있으나 곧 그리로 돌아갈 사람을 말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이 아닌 이상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지나갈 뿐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들이 정착할 장소가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곳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자기 소유의 땅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100년 이상 그 땅에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 호화스러운 집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집에서 100년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자기 손안에 쥐고서 언제까지나 잡아두려는 욕심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욕쟁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덧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앙 좋은 며느리가 정신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할머니 머리맡에 앉아서 쉴 새 없이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시어머니를 권고했습니다.
“어머니, 예수님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잡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희미한 목소리로 “알았어, 알았어”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며느리가 다시 할머니에게 “어머니, 이 세상 떠나면 어디 가신다고 했죠?”라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는 큰 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지랄하고 있네! 아, 내가 예수님 덕분에 천국 가는 것을 잊어버렸을 줄 알아?”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해도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나그네 길은 종착역에 보다 더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본향에 들어가서 뵙게 될 주님을 기쁘게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주님을 만나 뵐 때 “잘했다”칭찬을 받을 수 있을만한 나그네 길이 되도록 이 땅에 머물기보다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는 자신이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삶을 회계할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 날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장차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지혜로운 나그네

성도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 즉 길손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성도의 삶을 출장을 간 회사원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대부분 출장의 경험이 있습니다. 출장을 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에 우선권을 둡니다. 그는 쉬거나 이동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도 자기가 할 일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장 중인 사람은 짐이 가볍습니다. 회사에서 출장을 온 사람이 여관방을 리모델링하고, 가재도구를 사들이는데 돈을 쓴다면 모두들 그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출장 중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호화스러운 호텔에 잘지라도 가족들과 을 잊지 못하며, 아무리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을지라도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그리워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천국에서 이 땅으로 잠시 출장 왔다가 곧 그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이 세상에 집착하고 세상의 방법대로 이 땅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거두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형편없고 타락한 삶이었기에 “험악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 본향을 사모하지 않고 살았기에,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았기에 “악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나그네는 세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이루는데 전념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반드시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삶을 회계할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 날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장차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상급을 받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그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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