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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구영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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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영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체의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고, 하나님이 '개념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기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으니까 자꾸 하나님이 개념화되는 것입니다. 개념은 실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개'라는 개념이 있다고 합시다. "저것이 개다"라고 하면, 그 순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습니다. 즉, 체험과 관찰을 생략해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개념으로 파악하고 맙니다. 하지만 실제로 개라고 불리는 대상을 관찰해보십시오. 큰 개, 작은 개, 털이 많은 개, 주둥이가 나온 개, 귀가 큰 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개라고 개념화하는 순간 더 이상 보지 않고, 개라는 범주에 모두 집어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념으로 안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리라고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개념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능력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습니다. 따라서 개념화된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십시오. 기도와 찬양,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십시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시오. 그 만남이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한 살아 있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사회에 역사 앞에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존재 이유에 합당하고 존재적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만원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수 억원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작고 초라한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만 크고 화려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도 있습니다. 2007년도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지난해보다는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분명히 달라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2007년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일합시다. 예배, 봉사, 전도, 교육, 가정, 직장, 교회… 하나님의 영광의 거룩한 도구가 됩시다. 교육관과 주차장 확장을 위한 계획도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게 합시다. 제자 만드는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살아 봅시다.

1. 남의 유익을 구합시다

  본문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합니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지켜야 할 원리이자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천사이고 그러한 공동체는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단순하지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한 부인이 한가한 오후 시간이 되면 응접실로 나와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자연히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 응접실에 시선이 자주 멈춰 서곤 했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응접실에서는 고상해 보이는 부인이 가끔 바느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서로 쳐다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은 여느 때와 같이 응접실에 나와서 무심코 건너편에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녀의 모습이 전처럼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대뜸 '원, 세상에 창문이나 제대로 닦고 책을 읽든지, 바느질을 하든지 할 것이지. 저렇게 게을러서 책만 읽으면 뭐하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습니다. 한 2주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봄을 맞아 유리창을 닦고, 집 안 구석구석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대청소를 했습니다. 마침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청소를 끝내고 피곤도 풀 겸 차 한 잔을 들고는 응접실의 포근한 의자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건너편 아파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 부인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부인이 창문을 닦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창문을 제대로 안 닦아서 희미하게 보였구나.' 그제야 그 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모든 원인과 책임을 나에게 돌려야 합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고 사과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눈 녹듯 녹습니다. 나의 유익만을 구하면 이기적이 되고 반드시 고립됩니다. 사막이 되고 황폐화됩니다. 모든 것이 죽는 사해가 됩니다. 그러나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갈릴리 바다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때로는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2007년 새해에 나의 유익을 버리고 남의 유익을 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비방을 받지 맙시다

  본문 30절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바울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원리적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사용한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로 인하여 남을 비방하지도 말고 비방 받아서도 안 됩니다. 비방을 하고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면 선교가 안 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와 교회가 비방거리가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모든 성도의 대표이며 교회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대표 선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vriel Garcia Marquez)의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Love in the Time of Cholera)>이라는 소설은 비누 한 장 때문에 깨진 결혼 생활을 그려놓았습니다. 소설에서 집 안을 정돈하는 것은 아내의 일이었습니다. 수건이나 휴지, 비누 등을 욕실에 챙겨 놓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비누를 미처 새것으로 갖다 놓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비누를 갖다 놓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누 한 장 때문에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뒤 7개월 간 두 부부는 각 방을 사용했고 식사 때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비누 한 장이 어떻게 결혼 생활을 망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양쪽 배우자 모두 "그만둡시다. 이렇게 계속해서는 안돼요. 미안해요. 용서해요."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로 평생의 관계가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용서만이 점점 벌어지는 틈을 메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용서란 부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 용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나는 비누 한 장의 에피소드를 읽고 웃었지만 이 웃음과 함께 나 역시 사소한 일을 문제삼았다는 내적인 경종을 듣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내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용서할까요 아니면 원망을 품고 있을까요?

  비방에 휘말리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꿈과 용기도 깨지고 선교와 감동도 사라집니다. 2007년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을 칭찬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성도가 됩시다. 작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 버리는 어리석은 삶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는 성숙한 성도가 됩시다. 칭찬으로 가득한 영광의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시다
  본문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모든 성도들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파괴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본을 보이고 희생하고 섬겨야 합니다. 성도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사명은 죄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성도와 교회는 2007년도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이 구원 사역을 위해 바울처럼 미쳐야 합니다.

  사탄의 진짜 전쟁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해칠 힘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합니다. 사탄은 하나님 백성이 불순종과 무관심으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도록 부추기는 광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탄의 또 다른 특징은 흉내를 잘 내는 모방자란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백성, 족속, 나라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모방자인 사탄은 '불법의 비밀'로 대응하는 데, 그것은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지만 죄 속에 살고,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영적 능력을 부인합니다. 사탄은 현재 공중 권세를 잡은 지배자입니다. 성경은 사탄이 이 세상 신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탄은 파리의 왕인 바알세불입니다. 파리가 어디에 꼬이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썩은 쓰레기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사탄은 무저갱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사탄 나라의 세력은 추락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잘못된 나라에 투자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지배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때는 짧고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교회에게 '인간 권력 배후의 영적 세력'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빛의 자녀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모든 제자에게 주신 능력의 비밀한 근원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200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건강, 자녀, 생업, 소원을 형통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적과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남의 유익을 구하고 비방을 받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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