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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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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메뚜기가 길을 가다가 어떤 하루살이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하루살이는 메뚜기한테 실컷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자 열 받은 메뚜기가 하루살이를 죽을만큼 두들겨 패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하루살이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형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동생의 부탁에 형 하루살이는 자기 부하 5000마리를 데리고 메뚜기한테로 갔습니다.  메뚜기를 중심으로 삥 둘러싼 뒤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1대 5000이라니.
도저히 승부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메뚜기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일로 미루자!"

이제 내일이면 2006년이라는 시간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2007년 새해가 시작이 됩니다.  금년 한해를 지나오면서 한국 교회와 특별히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다 준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지난 5월에 발표된 2005년 인구 주택 총 조사 결과였습니다.  이 조사 가운데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의 지난 10년 동안의 종교 인구 동향에 관한 변동 상황이 보고되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한국교회, 특별히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이 땅에서 천주교 인구는 219만 명이 증가하여 74.4%의 증가율을 보였고, 불교 인구도 40만 5천명이 증가하여 3.9%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만은 14만4천명이 감소하여 1.6%의 감소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1,200만 혹은 1,300만명을 자랑하던 개신교 인구는 사실상 860만 명에 불과하다는 통계 수치가 발표된 것입니다.

이 수치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실제로 이 수치가 발표된 후 그 원인을 분석하는 여러 보고서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더 이상 우리의 사회 속에서 매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소위 개신교 교회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들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차별화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이웃들이 교회를 찾아야 할 어떤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비슷한 정황을,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거의 유사한 상황을 문제 삼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엘리트들은 그들의 수도였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부심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삶의 스타일은 안 믿는 사람들, 특별히 이방의 사람들과 별로 차별화 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리고 그 도시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루살렘의 상태,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에스겔 선지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모습과 같다"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모습.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에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함께 생각하면서 지나온 우리의 시간들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실상을 직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비교했을 때에 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이 땅에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포도나무는 건축용으로는 결코 쓰일 수가 없습니다.  혹여 포도나무가 집을 짓는데 자재로 쓰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포도나무가 가구 제작으로 쓰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포도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열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포도나무가 이 땅에서 존재해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한마디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나무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무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가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실상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었을까요?
만약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열매가 없었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모습, 이스라엘의 실상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실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는 에스겔 선지자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에 대한 진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의 예언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그 나무의 유일한 효용 가치가 있다면 땔감 밖에는 쓰일 데가 없습니다.  그들을 불쏘시개로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적중되었고,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는 철저하게 유린되었고,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실상을 직면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을 갖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에는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교회를 나온다는 그 사실을 제외하고 저와 여러분이 불신자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불신자들보다 나은 것이 정말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이 없다구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불쏘시개로 던지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오던 동일한 심판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다가오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목사님, 마지막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하필이면 그런 소리를 하셔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한 해를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를 아시면서 좀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주시면 어디 덧나십니까?
구약 시대에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가 필요했지만 이런 은혜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언약의 시대에도 꼭 그런 심판의 메시지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약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메시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신약에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셨던 정확하게 동일한 메시지가 신약성경의 한 대목에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 찾아서 펴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보십시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어떻게 하시겠다고 했습니까?  제해 버리시고.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제해 버리시겠다'는 말은 '영원히 제거하겠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버리시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제해 버린다'는 말을 다른 말로 고친다면 이것은 가지치기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지를 다듬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을 만한 나무가 될 수 있도록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가지치기가 성도의 삶에서는 어떤 의도로 적용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신약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바로 징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때리십니다.  징계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고쳐서 다시 쓰시려고.

사랑하는 여러분, 가지치기는 가지치기를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아픔과 고통이 왜 필요할까요?  그렇게 해서 그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로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를 돌아볼 때, 금년 한 해 유달리 내게 아픔이 많았다, 고통이 많았다고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행여나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아니었을까요?

이 시간 옆 사람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을 건네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가지치기 당하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볼 때 절대 대답을 하지 않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이 가지치기의 주인공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가지치기를 당했을 때 가지치기를 잘 수용해서 그것을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삼았던 어느 하나님의 사람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19편 71절의 말씀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67절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그 고통이,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잘못하다가 이제는 그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고통이 허용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예수를 믿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축복만 전개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말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십니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에 마냥 풍요만 계속된다면 우리 모두는 인생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치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깊은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자리에 때로 이런 가지치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고통이, 이 아픔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다시 새로워질 수가 있었다면 이 고통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에게는 유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픔 속에라도 기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시간이 3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과 헤어질 시간이 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포도밭이 있는 옆길을 지나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마음에 담아 두셨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남기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들은 가지다.  왜 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줄을 아니?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열매를 맺기 위함이야.  얘들아, 너희도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간이 얼마쯤 경과되어서 그들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3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지하게 예수를 믿고 3년쯤이 지났다면 이제는 열매를 맺으셔야만 합니다.

그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셨다고요?
그런데도 평안하십니까?
별로 가지치기의 징조도 보이지 않고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혹시 내년이 가지치기 해일 수도 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그러면 마음을 바꾸십시오.  열매 맺는 해로 작정하십시오.  재생산하는 해로 작정하십시오.  내 어깨에 제자를 세우는 해로 작정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우리의 실상을 직면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이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비전입니까?  우리가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비전을 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다른 어떤 성경의 대목보다 이 대목에서 우리 주님은 열매 인생의 비전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인격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드러지게 강조하신 두 개의 단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라는 단어이고, 둘째는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로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은 사랑하며 살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열매라고 하면 제일 먼저 전도의 열매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전도의 열매를 먼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전도의 열매를 강조하기에 앞서서 먼저 인격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강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참된 사랑의 삶, 그리고 기쁨의 삶의 모습이 없이 전도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 전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여러분은 예상을 하십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그것은 결과가 없는 전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정확하게 그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서 있는 현 주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도를 말하자면 천주교 보다 우리가 훨씬 더 많이 전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불교보다 훨씬 더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에 열매가 없었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오히려 한국 교회 성장이 뒷걸음질을 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전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력이 없습니다.  솔직히 이웃들은 우리들에게서 사랑의 냄새도 맡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들에게서 어떤 인격적인 기쁨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한 번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옆에 있는 사람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십시오.  사랑의 냄새가 나십니까?  기쁨의 향기가 내게 전달되고 있습니까?  그 반응을 한 번 이야기해 주십시오.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말을 하자니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못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과 제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9절에 보면 주님의 제자됨의 진정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먼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면서 정말 내 사랑을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에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그분의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랑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내 이웃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사랑합니다.  목숨을 버릴 정도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랑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목숨을 걸고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으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랑의 냄새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사랑을 가득 안고 목숨을 걸고 이웃에게로 다가가셔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열매와 함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의 열매를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됩니다.  나는 이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기쁨을 모르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그들과는 뭔가 다르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우리들에게 이런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이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기쁨의 열매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인격이 믿지 않는 그들보다는 뭔가 확실히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모습들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나 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 빼놓고는 그들과 다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솔직히 그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볼 때,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함부로 내뱉는 말투를 볼 때, 남을 섬길 줄 모르고 뻣대는 모습을 볼 때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상적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사랑과 기쁨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가르치면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열매의 순서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과 기쁨은 세상적으로 기뻐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과 기쁨입니다.  성령의 사랑, 성령의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사모하고, 그리고 성령이 나를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사랑과 기쁨이 나타나고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매력이 없는 존재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를 통해서 영양과 수분을 공급받음으로 가지는 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다는 말을 '거한다'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 안에 잘 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거한다'는 말이 11번이나 등장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단순한 비결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열매 맺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새해 첫날부터 시작되는 새벽기도에 도전해 보십시오.  이것은 전도보다도, 새해를 향한 어떤 새로운 계획보다도, 어떤 위대한 결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말씀과 기도가 없는 성도의 삶은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와 같습
니다.  나무에 떨어진 가지가 스스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듯이 가지된 우리가 말씀과 기도가 없다면 결국에는 무미건조한 종교꾼의 자리에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사랑과 기쁨의 열매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는 삶의 비전과 이상을 위해서는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끊임없이 말씀에 순종하고 지속적인 기도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결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랑의 열매로 자녀가 태어납니다.  이것은 영적인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성도의 자연스러운 교제와 연합의 결과가 바로 영적인 열매, 주님을 닮은 인격의 탄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진정 열매 맺는 삶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 사랑의 자리에로 돌아가십시오.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고 어우러지는 대신에 주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은혜, 성령의 임재를 갈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유럽의 한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한때는 성령 충만했으나 사업과 씨름하다가 제대로 신앙생활도 못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수도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수도사 친구를 만나 자기 사업을 운영하며 당하고 있는 심적 고통을 고백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수도사는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마른땅에서 죽듯이 자네도 세상에 뒤엉키면 파멸하게 되어 있네.  고기가 물로 돌아가야 하듯 자네도 다시 성령께 돌아가야 하네"

그러자 사업가 친구가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자네처럼 나도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수도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닐세. 사업은 그대로 붙들고 있고 이젠 자네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거기서 자네는 자네의 인생의 주인을 새롭게 만나 그분과 사업만이 아닌 자네 인생 전부를 그분과 의논해 보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로 우리가 아니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당장 당신의 마음의 지성소로 들어가 거기 당신을 기다리는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가득 안고 세상을 향해 시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의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한다면 최소한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차별화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딘가 다른 매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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