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구영신] 항상 기뻐하라 (빌 4:4-9)

  • 잡초 잡초
  • 363
  • 0

첨부 1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숫자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새 출발의 시작점으로 삼는 분들이 많습니다.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성도는 이 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좀 더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기를 소망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0절에 의하면 하나님 백성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참 성도는 인생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망년회의 한잔 술과 함께 지난 삶의 허물들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는 사람도 아닙니다. 지난 삶의 죄와 허물을 진지하게 애통해하는 사람이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이고, 죄악 된 세상에서 좀 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9-11)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기도 합니다(살전 5:16-18). “항상”이라는 말 속에는 슬플 때나 괴로울 때도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도 괴롭고 힘든 순간이 있고 살 소망조차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까지도 기뻐하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됩니다. 순교자들이 죽음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 그 일은 두고두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극한 고난 속에서조차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환경과 조건 안에서’는 항상 기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환경과 조건은 수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집장만한 사람은 집값 오르면 기쁘지만 집값 내리면 슬퍼할 것입니다. 결혼하고 취직하면 기쁨이 되겠으나, 그 후의 삶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기쁨이 되나, 아이를 먹여 살릴 일은 근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지난주 성탄말씀에서, 우리는 가이사의 호적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삭 된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야하는 요셉의 무거운 발걸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현실을 생각하면 처량하고 장래를 생각하면 막막한 환경과 조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한걸음 한걸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던 우리로서는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만약 요셉이 그 순간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다면 그는 분명 근심 하는 것 같으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분께서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하신다 할지라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삼손은 허물 많은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실패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도록 두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두신 뜻을 남김없이 성취하시며 그를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조금도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것을 알기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17세의 꿈 많은 한 여인이 1967년 여름에 목 위만 빼고 전신이 마비되는 다이빙 사고를 겪었습니다. 그녀는 38년 된 병자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자기에게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기를 간절한 기도했지만 휠체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베데스다에 여행 갔던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보다 훨씬 나은 응답을 주셨음을 깨닫고 “휠체어야, 너를 축복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조니와 친구들’(Joni & Friends)의 설립자(1979년 설립)이자 회장이며, 미국장애인협회를 섬기면서 세계 장애인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는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입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38 병자보다 더 중한 병자인 것 같았던 그녀는 이제 입으로 그림은 그리는 성공적인 화가이면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를 써낸 저술가이기도 하고 강연자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은 ‘조니’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전도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휠체어도 기도의자를 주신 것으로 여기고 감사할 수 있게 되며, 내가 기도한 대로 원하는 때에 응답되지 않아도, 더 적합한 시간에 더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지금 주시는 고난의 의미를 다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주님의 깊으신 뜻과 계획이 있는 줄로 믿고 ‘근심하는 것 같으나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영광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지 말합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드러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관용’(ejpieikhv")이라는 단어는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용납하며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다보면, 마음이 좁아져 인색해지고 옹졸해지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시시비비를 따져야 속이 시원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억울해서 잠을 잘 수 없고, ‘어찌 그럴 수가 있나’를 연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사는 성도까지도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같은 땅을 디디고 살지만 참으로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항상 기뻐하는 마음 때문에 아무래도 더 관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으로 이 땅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좀 손해 보면 어때’라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장 오셔도 용서 못할 것 같은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주안에 있는 참 성도는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의 방향까지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다.

함석헌(1901-1989) 선생님이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문제 있는 한 교사 때문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교무실로 쳐들어 온 일이 있습니다. 모두 허급지급 피했는데 함 선생님만 고개를 숙인 채 있었습니다. 흥분한 학생들은 함 선생님을 문제교사로 착각하고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서야 잘못을 알게 된 학생들은 왜 고개를 숙이고 계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함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맞았다면 내 사랑하는 제자들 중 누가 나를 때렸는지 알 것이 아닌가. 또 자네들도 알 것이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강단에 서겠으며 또 자네들도 어떻게 나를 보겠는가?” 이 말에 학생들이 크게 감동을 받고 엎드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말로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지만, 때때로 관용하는 태도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킵니다.

둘째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나, 해결하려는 마음이 없는 ‘나태’를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성도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란 용어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되는 태도이며, ‘간구’는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 안에 있는 성도의 문제 해결 방법은 염려가 아니라 기도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염려가 많아지면 기도가 줄어들고, 기도가 많아지면 염려가 줄어듭니다. 염려하면 염려하는 대로 되는 경향이 있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대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염려하기시작하면 오만가지 근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지고, 불신으로 모든 의욕은 꽁꽁 묶여 무기력하게 되고, 온갖 탐욕과 정욕의 세력에 여지없이 무너질 만큼 연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하면 염려의 먹구름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롬 1:17, 갈 3:11)는 의연함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9)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는 근심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기뻐하는 자로 삽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순교 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기쁨의 서신인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셋째로 생각과 행동을 철저하게 성경에 의존하는 모습입니다. 8절이 언급한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표준새번역)은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9절에서 언급한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 역시 성경입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는 성경을 “골똘히 생각”해야 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참으로 주 안에 있는 참 성도는 성경을 골똘히 생각해보지 않은 채, 다른 성도들 생각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생각해서도 안되고, 다른 교회들이 그렇게 한다고 무작정 따라 행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매우 유능하고 똑똑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철저히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합리적인 자유주의 사상가가 되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사는 하나님 백성답게 항상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모든 생각과 행동이 철저히 성경에 의존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