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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이 날이 마지막 날이라면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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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5분을 어디에 쓸까?>
1849년 12월 22일, 영하 50도까지 내려간 혹한의 날씨에
사형수 몇 사람이 형장에 끌려 나왔습니다.
한 청년이 형장의 세 번째 기둥에 묶였습니다.
이제 사형 집행까지는 단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이 5분을 어디에 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옆에 함께 묶인 사형수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2분을 쓰고,
오늘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 2분을, 그리고
나머지 1분은 자연을 한 번 쭉 둘러보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거총!" 사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이 총을 들었습니다.
이 때 이 청년은 조금만, 조금만이라도 더 살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꿈틀거리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황제의 전령이 소리쳤습니다.
"사형 중지! 황제께서 특별 사면령을 내리셨다!"

28세의 나이로 총살 직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 사나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했던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였습니다. 
『죄와 벌』,『카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긴 문학가이지요.
처형 일보 직전에 간신히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극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인지 유난히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투쟁을 뛰어나게 묘사했습니다. 

여러분, 도스토예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이 5분 후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 그 5분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 5분보다 훨씬 더 긴, 하루 24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2006년도의 마지막 날, 저는 이렇게 좀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도 "이 날이 마지막 날이라면" 이렇게 정해 봤습니다.
"오늘 2006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지요.

<무엇을 위해 정신 없이 살아왔던가?>
작년과 마찬가지로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 모두 열심히 살아왔을 것입니다.
먹고살기 위하여 생존 경쟁에 시달리며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다는 사실을 아마 다 피부로 느꼈을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세상이 점점 더 강퍅해지고 살벌해진다는 사실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뱉는 말은 "올해도 참 힘들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올해만 힘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또 10년 전에도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고달프고 힘든 것,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게 한 해를 살아왔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던가를 조용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 기분이 중요하지만 내 기분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은 상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고 참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이기심만 고집하고 참지 못했습니다.
돈이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때로 피해를 준 적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양심까지 속일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내 기분은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의 기분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절대로 손해 안 보겠다는 생각 때문에 내게 유익은 좀
있었을지 모르지만 무언가 마음에 기쁨은 없었습니다. 
1분을 참으면 1년이 편할 수 있다는데 그 1분을 참지 못해
가족들을 비롯한 이웃과의 관계가 냉랭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돈은 좀 벌었는데 인심은 잃을 때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가기는 했는데 영 마음이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구멍이 뻥 뚫린 것과도 같은 공허함이 있습니다.
언제나 금년 한 해는 후회 없이 살아야지 하지만, 연말이 되면
이렇게 어김없이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손아귀에 쥘 때, 즉 자기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성취하게 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돈 벌기를 바라는 사람은 원했던 돈이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 승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칭찬이나 좋은 평판이나 명예를 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전까지 행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일단 우리 손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부자 되기를 갈망해서 돈을 왕창 벌었는데
어느 순간 그 돈이 우리 수중에서 떠날 날이 옵니다.
그래서 '돈'은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 아닐까요?
어떤 자리에 올라가도 그 자리에 내려올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칭찬을 받고 좋은 평판을 얻고 높은 명예도 얻었지만
어느 순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행복하지 않지만 막상 얻었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쉽게 우리 수중으로부터 떠나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상(無常)함,' '덧없음,'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하는 그 어떠한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지위나 학위나 권세나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까지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해서 미친 듯이
그것을 얻고자 하지만 막상 얻은 다음에도 행복감은 잠시
잠깐 뿐, 얻은 다음에는 또 다른 욕심이 찾아올 뿐 아니라,
더욱이 힘겹게 온갖 고생을 다해서 쟁취한 그 목표물이
우리 손에서 떠나 갈까봐 전전긍긍, 좌불안석이 됩니다.
우리가 어렵사리 얻은 소유를 다시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제가 그랬습니다.
1990년에 미국에 유학 가서 저에게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표가 있었다면
오로지 박사 학위 받는 것 하나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100년 가까운 역사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단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묘한 오기심도 발동했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박사 학위를 얻기 위해 밤잠을 설쳐 가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박사 학위가 제 손안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는 도저히 행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고생시켜가며 정말 많은 고생을 해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타고난 둔재였기에 다른 사람이 1시간 공부하는 동안 2시간, 3시간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정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더니
드디어 학위를 얻기 위한 논문 심사날이 찾아왔습니다.
3년 동안 고생해서 쓴 논문에 대한 oral defense, 즉 구두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지요.
두 시간 정도 교수님들로부터 예리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대답을 잘했습니다.
마침내 제 논문에 대한 구두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일제히 교수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Congratulations! Dr. Kim!"
악수하면서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장장 8년 동안이나 'Dr. Kim'이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하여 정신 없이
달려왔는데 막상 'Dr. Kim'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습니다. 
참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이것 하나에 목숨을 걸고 8년을 고생했는데
'허무한 느낌'이라니, 제 자신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서 제 허전한 기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임산부가 옥동자를
분만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 것이라고 대꾸하셨습니다. 
저는 아이를 해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그 때 그렇게 고생해서 박사 학위를 얻지 못했다면
저는 아주 참담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학위를 얻은 다음에 저에게 이내 또 다른
소원이 찾아왔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박사 학위도 별 것 아니라는, 뭔가 까닭 모를 허전함, 무상함이 찾아왔던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탐하는 대상들은 우리에게 참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이 덧없기 때문이지요.
열흘 동안 피었다가 흔적도 없이 떨어지고 마는 꽃잎과도 같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진짜 행복은 아무 잃어버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을 찾고 소유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생해서 얻었으나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전하지 못합니다.
어렵사리 얻은 것을 또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사 40: 8절은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벧전 1: 24-25절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자>
2006년도를 보내면서 우리는 잃어버릴 염려나 두려움이 없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을 늘 모시고 살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지만 오랫동안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도 모시고 이런저런 세상의 욕심과 우상들을 함께 모십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향유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종말론적인 의식입니다.
오늘 2006년도의 마지막 날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이 날이 마지막이고 2007년도는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누구나 다 진지하고 숭고하게 인생을 살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고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세상에 큰 미련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벧전 4: 2절 말씀처럼 남은 시간을 인간의 정욕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벧전 4: 3절 말씀처럼 지난 날 이방 사람들이 하듯이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2006년도의 끝자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본문 말씀이라고 생각하시고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여기 보세요.
베드로 사도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임박한 종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인 의식 속에 사는 이들은
첫째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삼가 모든 일에 조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을 떠나 죄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사탄 마귀(벧전 5: 8)를 경계하며 정신을 차리고 항상 근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근신하는 최고의 방법은 깨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여러분은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둘째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로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논리보다 앞서서 우선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은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 해요.
그 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알게 되죠."
이 책에서 나오는 또 다른 주인공 조시마 장로는
'지옥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랑 없는 지옥에서 헤매기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면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가져갈 죄를 다 없애준다는 뜻입니다.

요 1서 4: 7-8절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러분, 이 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시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갈 모든 허물과 죄악이 가리워 질 것입니다.

셋째로,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친할수록 귀한 손님 대접하듯이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고객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간이나 쓸개는 다 내던지고 극진히 모십니다.
만일 그런 정신으로 남편을 대하고 자식들을 대한다면 우리 가정은 금방 천국이 될 것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아이들이 왔는데 손님처럼 잘 대접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귀한 손님 대하듯이 이웃을 다정하게 대접하십시오.

넷째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각양 은사를 선한
청지기처럼 잘 관리하고 활용해서 봉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지가지 은사(恩賜), 즉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에 보면 두 가지 대표적인 은사를 소개합니다.
'말하는 은사'와 '봉사하는 은사'입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나 전도사
혹은 속회 시간에 속도들을 가르치는 속장도 이 경우에 속합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는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접 위원으로 헌금 위원으로 주방에서 식사 대접하는 분으로,
찬양대원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공급받아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할 때, 즉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하고 봉사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도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2006년도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워하고 아무리 후회해도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은 황금과도 같이 귀합니다.
시간을 허비할 겨를이 없습니다.
무의미한 곳에 낭비할 새가 없습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이 날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이제부터는 하루 하루의 삶이 후회 없는 축복의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開眼의 새날을 바라보며>
이제 신문에 난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전남 담양군에서 농사를 짓는 김인찬 씨는 각막 이식
수술을 받고 잃었던 오른쪽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7살 때 작은 형과 놀다 왼쪽 눈을 다친 뒤 오른쪽 눈에도 하얗게 안개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김씨는 14살 때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는데
작년 7월에 꼭 27년 만에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김인찬 씨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뒀고
그 어떤 병원도 자기 눈을 고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꼬박 10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자포자기하고 절망하던 김씨가 2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사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쇠뿔에 받히고 뒷발에 차여가며
힘들게 송아지를 돌봤더니 이 놈이 자라서 새끼를 쳤습니다.
그 때부터 김씨는 두 가지 소망을 간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김씨는 중국 교포 처녀와 결혼해서 아이를 셋이나
두게 되었고 그토록 염원했던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김씨는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결혼해서 아이들을 셋이나 낳았는데
눈을 뜬 뒤 아내와 아이들의 피부가 너무 뽀얗고 고와서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눈을 뜨니 마음이 열렸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해가 구름에 가려 빨갛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예쁜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도, 날아가는 새도,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달과 별들도 마냥 아름답고 신기하고 보기 좋다고 했습니다.

물론 세상을 알아갈수록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목격했지만
"그래도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희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날로 시끄럽고 살벌하다 하지만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을 알아요.
제가 두 가지 소망을 얘기했을 때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둘 다 거짓말처럼 이뤄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믿어요.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걸."

오늘 한 해를 마무리짓는 여러분에게도 개안(開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희망에 가득찬 모습으로,
전과는 달라진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2007년도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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