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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구영신] 이반 일리치의 죽음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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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좋은 스승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새롭게 합니다.
오늘 2006년도를 보내고 2007년도를 막 맞이한
이 뜻 깊은 시간에 저는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금년에도 참 좋은 책들을 읽어서 기쁨이 있었는데
한 해의 끝자락에 참 감동적인 책 한 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평화』로 유명한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i, 1828-1910)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이라는 소설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정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이 책이 하이데거의 실존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게 없는 중년의 고위 법조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능하고 아주 공정한 판사로서 예의도 바르고 친절해서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의 삶을 열심히 모방했습니다.
그 당시 상류층 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즐겁고 편안하고 법도에 맞는 삶'을 추구하며
고위급 인사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우아하고 점잖게 보이려고 자기의 권력 앞에
벌벌 떠는 사람들에게도 마치 친구처럼 겸손하고 다정하게 대합니다.
재판을 하더라도 사심을 버리고 아주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장래가 촉망되는 이반 일리치는 아주
상냥하고 어여쁜 양갓집 처녀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신혼초에는 참 행복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한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이유 없이 질투를 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반 일리치는 일에 더욱 몰두하면서 가정의 문제를 비껴나가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아내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일을 핑계삼아 가정보다는 공무에 힘을 더 쏟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부간에 애정은 점점 식어지고 증오만 쌓여가던
차에 연봉 5천 루블의 고위 관직 자리에 승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위 법조인 자리에 수직상승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부부관계는 예전처럼 화목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권태가 찾아왔고 그는 그 공허감을
새로운 상류층 인사들을 사귀고 그들의 관습을 배우는 것으로 메우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장밋빛 희망으로 충만하던 차에 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일을 하다가 옆구리를 다치게 됩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중상으로 발전해서 이반 일리치는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소설은 그가 죽을병을 얻어 지나온 삶을 성찰하는 과정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아주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그는 수시로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자주 신경질을 부립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항의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도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의, 죽어 가는 그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빨리 죽었으면 하지만 막상
그가 죽으면 봉급이 끊어지기 때문에 마음을 바꿉니다.
의사도 이반 일리치의 생명이 아닌 그가 앓는 병이
신장염인지 맹장염인지 하는 극히 사무적인 관심만 보입니다.
믿었던 친구들도 이반 일리치가 죽으면 과연 그 자리에
누가 꿰차고 올라갈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습니다.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자 아내와 자식들, 친구들, 의사,
성직자, 등등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동정하기보다는
빨리 죽어서 자기의 고통으로부터도 벗어나고 또 산 자들의
고통도 덜어주기를 기대하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주변 사람들의 이와 같은
위선과 기만을 알아차리고서는 기가 질리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젊은 하인 게라심만큼은 달랐습니다.
항상 명랑하고 평온한 표정의 게라심은 진심으로 이반 일리치를 동정하고 사랑했습니다.
게라심은 인간이 결국 다 죽는다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었기에 참 마음으로 주인을 돌봅니다.

이렇게 죽음이 점점 더 가까운 현실로 다가오게 되자 주인공은 비로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이 혹시 잘못된 삶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는 전에 논리학의 유명한 삼단논법을 알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주인공은 이 명제가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믿었지만
한 번도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인간 일반이 죽는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이 인간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라는 사실 때문에 증오와 공포로 떨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최고로 여기며 살아왔던 '쉽고 편하고 점잖은 삶'이
사실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거짓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옳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들, 친구들, 의사, 성직자, 등등의
주변 인물들도 자기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기심과 위선과 기만을
벗어 던지지 못한 속물들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자각(自覺), 즉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자
자신의 지나온 삶을 회개하기 시작했으며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되자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대신에 광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나이 45세에 이반 일리치는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문제는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기보다는 정부로부터 더 많은 연금을 받아낼 방도가 없는지,
이반 일리치의 자리에 누가 올라갈 것인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가 아닐 경우, 누군가 세상을 떠날 때
조문해야 할 번거로움, 이 일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빼앗길 일부터 먼저 계산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가족들인 경우에도 연금에다 보험에다
장례비부터 먼저 계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엄숙하지 못하고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왕왕 있지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기주의와 위선과 기만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주제는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까?"하는 질문뿐 아니라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인 이상 누구나 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보편 타당한 진실 앞에 인간이 보이는 위선과 기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그지, 나는 아니야." 하면서 안도합니다.
죽음이 그에게만 닥쳐 온 사건일 뿐, 자기에게는 아주 먼 일로 치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일시에 무(無), 절대 무로 돌릴 수 있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심각하고 진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에 직면하기 전까지 그는
더 높은 승진, 더 많은 보수, 어여쁜 아내와 상류층 사회에로의
계층 상승 등을 통해 행복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니 그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이었습니다.

사실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도 무의미성, 권태, 불안, 우울, 등의 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솔직한 기분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일에 몰두하고 오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그 불길한 기분들을 회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체감했을 때
과거의 삶이 얼마나 허황되고 그릇되었는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린다면 이반 일리치가 이렇게
좋은 평판과 높은 관직, 많은 보수와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제와 오락에 인생의 행복을 건 것은 비본래적인 삶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진정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간 것이지요!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삶을 모방하며 따라 산 것이지요!

이제 죽음에 직면해서야 이반 일리치는 그동안 자신의 고유한 삶은 없었고,
사회가 요구한 대로 꼭두각시의 인생, 즉 세상 사람들의 삶을 산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참다운 인격 존재, 즉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목적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와 행복을 위한 사닥다리요 수단과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을 참다운 인격 존재요 목적 그 자체로서의 존경이나 신뢰 없이
나의 승진과 보수라는 이기주의의 차원에서의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관계로서만 대할 때 인간의 삶은 허위와 기만으로 황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그 인격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나의 승진과 보수 때문에, 즉 그 사람이 떠맡고 있는 자리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할 때 이 때의 관계는 수단적이요 도구적인 관계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사실 죽음에 직면하기 전까지 이반 일리치는 생존의 수단, 즉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의미를 가져야 마땅한 재산이나 명성이나 높은 관직을
근본 목표로 삼고 그것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는 도착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착된 삶, 왜곡되고 전도된 삶을 제자리로 돌려준 사건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삶이 비본래적인 삶, 즉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 점철된 이기주의적 관계였다는, 자기 인생의
적나라한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죽음 앞에서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 대신에 죽어줄 수 없습니다.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와는 상관없이 먼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알았던 죽음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처절하게 다가왔을 때 비로소 자기 인생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기만성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비본래적인 삶으로부터 본래적인 삶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고 도착되었는데 다시 바로 찾은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교통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 그 모습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리하여 비본래적인 삶, 즉 하나님 품을 떠나
우리의 고집과 이기심을 따라 왜곡된 삶을 사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다가 죽음과 같이 충격적인 실존 체험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뒤틀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자, 이런 맥락에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씀을 흔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밭에 소출이 풍부했습니다.
이 사람이 사악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 없기에 아마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열매를 거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반 일리치가 타고난 성실성과 공정함, 그리고
빼어난 매너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처럼, 적어도 이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부자가 될만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부자는 엄청난 추수를 거두어들이자 곡식을 쌓아 둘 곡간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재 있는 곡간도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헐어버리고 더 크게 짓고자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넓고 큰 곡간을 지어서 더 많은 곡식을 쌓아두면 여러 해 동안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평안히 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이렇게 독백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정도로 많은 곡식을 넓은 곡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오랫동안 '평안히 쉬고'(relax), '먹고'(eat), '마시고'(drink),
'즐거워'(be merry)할 수 있다면서 흡족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부자의 태도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0절을 보세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부자가 죽어버리면 그 모든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부자가 오늘 밤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잘 나가던 이반 일리치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이
이 부자에게도 어김없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일 오늘밤 네가 죽는다면 그 많던 재산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부자의 위선과 기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금 부자의 삶이 본래적인 삶이 아닌,
비본래적인 삶으로 도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부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있다해도
우리의 죽음 앞에 그 모든 것은 무, 절대 무로 되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눅 9: 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17-19절 말씀을 보면 전부다 '내,' 즉 나의 행복과 쾌락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웃의 안전과 행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와 자신의 필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할 뿐입니다.
이런 부자를 향하여 주님이 주시는 경고는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 많던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그냥 일상성 속에 묻혀 위선과 기만 한 가운데 죽어갈 것이냐,
아니면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초극할 것이냐의 선택을
요청 받은 것처럼 이 부자 역시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죽음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청됩니다.
우리는 일차적인 것이 아닌 이차적인 것에 인생의 목표를 둘 때가 많습니다.
이웃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유익과 행복과 출세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삶은 우리가 죽음과 같이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 직면하게 될 때에만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은폐된 모습입니다.
문제는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살아 있을 때에 이런 문제를 깨닫는 사람은 아주 적다는 사실입니다!

다사다난했던 2006년도가 지나고 2007년도 새해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금년 한 해 동안 우리 내리 교우들이 다 건강하고 밝고 환하고
감사하고 희망에 가득찬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답고 진실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기만과 허위에 가득찬 도착된
인생이 아니라 진실과 성실로 무장한 바른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죽음에 직면하기 전 이반 일리치가 살았던 삶이나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같이 허황된 삶을 살아서 안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자기 자신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과 경이감과 보람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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