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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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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긍휼”에 대한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바로 떠오르는 비유의 말씀이 있었다. 눅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다. 그때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후 한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다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다. 레위인은 요즘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그곳을 지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불신자나 타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응급조치를 취하고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잘 회복하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는 율법사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당신 의견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여기서 율법사가 사용한 “자비”라는 단어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긍휼”이란 단어가 같다. “엘레오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비”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상대적으로 “긍휼”이란 단어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긍휼”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의 행동 속에서 “긍휼”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긍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1.긍휼이란 무엇인가?

1)관심이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행동에서 나타난 차이는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다. 긍휼이란 관심을 갖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곳을 지나가던 세 사람이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관심을 가졌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긍휼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긍휼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섬김(희생)이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을 뿐만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동으로 옮겼다. 1단계로, 응급처지(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를 취했다. 그리고 2단계로 강도 만난 사람의 회복을 위해 자기 나귀에 싣고 주막으로 옮겨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고 자기의 돈을 들여 숙식을 제공하였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수고를 자청했다. 이것이 긍휼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긍휼이란?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을 그 불행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자기가 수고하고 고통 받는 것이다.”


2.누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가?

1)긍휼을 입은 자가 베풀 수 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긍휼은 앞서의 4가지 복과 관련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악하고, 무정하고, 무가치함을 알기에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이와같은 고백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기를 미워하고 버렸던 형들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았다. 도리어 형들의 불쌍한 처지를 위로하고 양식을 주어 형제들을 구원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이었다.

2)믿음에 부요한 자가 베풀 수 있다.
눅16:19 - ,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 죽었다. 부자는 지옥으로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긍휼을 부탁한다.
눅16: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는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도리어 인색할 때가 많다. 누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가? 믿음에 부요한 자가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고후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박윤선 목사,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천하를 소유한 것 보다 큰 부자다.”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부자 교회인 고린도교회는 인색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었던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넘치는 연보로 지체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했다. 부자가 긍휼의 마음이 있으면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함이 긍휼을 낳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긍휼을 낳는 것이다.

3)믿음도 있고 물질도 있는 사람이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있다. 다비다라는 여성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믿음과 물질이 부요한 사람이었다.
(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누구에게 긍휼을 베풀 것인가?

1)긍휼의 대상은 육체적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눅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을 죄인과 세리를 무시 멸시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은 누구인가? - 세리 창기 과부 병자 아이.., 주로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떡과 건강과 자유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의 고통을 벗겨 주셨다. 배고파 하는 자의 굶주림을 채워 주셨다.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 주셨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셨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함께 식사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구체적인 대상들과 일들
1.대상: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대상들을 우선 순위로 함이 옳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 소외당한 자, 곤경에 처한 자.

2.일:고통받는 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긍휼을 베풀라. 긍휼을 베푸는 일에 일반적 원칙을 제시한다면, 많은 것을 주려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베푸는 것이 좋다.

3.방법:정기적으로 적은 돈이라도 매달 구제 기관에 후원을 해라. 가능하면 교회를 통해서 하는 것이 좋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2)긍휼의 대상은 영적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신학자 아더 핑크는 이런 말을 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자연인의 마음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게도 때때로 많은 친절한 성품과 고난에 대한 동정심과 잘못에 대한 용서하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것일 뿐이며, 비록 그들이 친절하다 할지라도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된 긍휼은 육체적 필요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버림받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도 긍휼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긍휼은 육체적 차원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참된 긍휼의 궁극적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의 핵심 메시지이다. 육신적인 불행과 고통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과 함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의 궁극적 대상은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주님께서 복 있는 자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비신자들과 타종교인들에 대하여 적대시 하는 것을 옳지 않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4.긍휼을 베푸는 자의 상급은 무엇인가?

1)내적 은혜가 충만해진다
(잠 11: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동정과 자비를 베풂으로 개인적인 만족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람이 갖는 가장 큰 만족과 비교되지 않는다.
(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긍휼을 받는다,
시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신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인색한 사람들이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3)자손이 복을 받는다.
(시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긍휼의 시작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높은 뜻 숭의교회 김동호목사의 설교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구걸하는 걸인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백원 동전 한닢이라도 주라. 그리고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지 말고 그냥 받으라. 그리고 매달 정기적으로 구제하는 생활을 하라. 형통할 때 많이 내놓고, 어려우면 도움을 받으라.”

(레 19: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 19: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받은 사람들이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받았으면 마땅히 긍휼을 베풂이 옳다.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라.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 것인가?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할 상대가 누구인가? 영적인 긍휼이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를 시행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길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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