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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식어진 가슴에 뜨거움을 (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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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진 가슴에 뜨거움을
(말1:1-5) 2006. 12. 31(주일낮)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길은 각기 다르지만 그 사명에 살아가기에 떳떳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하든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떳떳하게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사명감이 우리를 성실하게 하며, 우리를 위대하게 합니다. 사명에 눈을 뜬 사람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할 사자이며, 사명의 명(命)자는 목숨 명입니다. 사명이란 심부름 받은 목숨, 심부름 받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라의 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대사(大使)라고 합니다. 또한 심부름꾼을 특사(特使), 몰래 보낸 심부름꾼을 밀사(密使),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천사(天使)라고 합니다. 심부름하는 제자를 사도(使徒)라고 합니다. 즉, 사명이란? 심부름 시킨 자의 목적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심부름을 갖고 태어난 사명적(使命的) 존재이기에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합니다. 목적을 가진 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힘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릭 워렌>은 목적을 가지고 삶에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멋진 변화가 일어나며 다섯 가지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둘째, 목적을 알면 분별 있는 계획을 갖게 합니다. 셋째, 노력과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집중합니다. 넷째, 목적은 열정을 낳기에 삶의 동기가 유발됩니다. 다섯째, 영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딤전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복음찬양 사명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 과거의 아쉬움과 세상의 집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며 과거 집착적인 소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지향하기 위한 뒤의 돌아봄은 창조적인 삶을 계획하는 것이며,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사는 크리스천의 준비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년의 마지막 주간을 통해 처음의 열정과 처음의 다짐을 잊은체 우리의 마음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식어진 마음이 뜨거워 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불을 붙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의 가슴에 감사의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1:2).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주님이 사랑하셨다고요? 무슨소리입니까? 사랑의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단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은 바벨론과 지금의 이스라엘의 삶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대단한 문화속에서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비록 그들은 종의 생활은 하였지만 지금처럼, 답답하게는 살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포로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슴에 뜨거운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지금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 하면서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명심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가장 큰 증거는 무엇입니까? 내 믿음이 무너진 증거는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입술과 삶속에서 감사가 사라졌을때는 “내 신앙이 무너졌구나”하고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2.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반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증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2,3).

이 내용을 우리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 증거를 보라는 것입니다. “에돔의 백성들은 열심히 뛰어 다녔고 잘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까 완전히 황폐한 모습이 되었고, 야곱의 백성인 너희들은 여러가지 시험도 있었고 포로가 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여전히 나의 보호 가운데 살아 남지 않았느냐?” 는 말씀입니다.

순간 순간의 모습을 볼 때 에서가 더 번창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지금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져가는 불꽃같았지만 여전히 살아 남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현재 이 순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셔야 합니다.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사랑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속에서 가장 큰 계명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시기에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요구를 사람들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이 그 예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놀라울 정도로 무조건적인 방법으로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셨고,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을을 갖게 한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사랑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반되어야 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속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도 분명히 포함됩니다(마5:43-44).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요일4:8,16)과 기독교인의 가장 큰 덕목(고전13:13)으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중심에 위치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필수적입니다(마22:37-40, 막12:28-31, 요13:34,35, 롬13:8-1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그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마22:37-39). 그리스도인은 적을 이웃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마5:43-48, 롬12:19,20, 요일3:14).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고 한 것처럼, 사랑은 모든 율법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여 “울법중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입니까?” 물었을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22:34-40)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은 사랑을 제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3. 우리의 가슴에 사명의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말라기 1장1절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에서 “경고”의 원어뜻은 “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한다면 “부담” 또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만이 가지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에게 주신 사명의 부담감이었습니다. 선지자만이 느끼는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각 개인의 “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명은 즐거움으로 감당하여야 합니다.

사명자는 가슴에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미래를 아는 자들의 마음속에 부담감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아덴 곧 아테네에서 가서 우상숭배가 만연한 것을 보고 마음 가운데 부담을 느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럴수 있느냐?”하는 마음의 부담을 가졌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마음의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사명의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한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을때 오랬동안 영혼의 갈증을 느끼던 백성들은 이 외침을 듣기 위하여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외침의 소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는 말씁입니다. 요한의 외침은 그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결심과 새로운 신앙의 출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을 통하여 새롭게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할 사명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많은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무리들이 묻습니다.“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세리들도 묻습니다.“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군인들도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요한의 메세지는 무서운 경고와 진노의 외침인 동시에 무슨일을 해야 할줄 모르는 준비된 일꾼들에게 사명의식을 깨닫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 6:17-18).

우리 모든 성도들은 가슴에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식어진 가슴에 사라의 불이, 식어진 가슴에 사명의 불이, 식어진 가슴에 사랑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식어진 가슴에 불타오르는 뜨거움이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실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신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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