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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과 존재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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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존재(롬8;1217)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어디인가? 방글라데시이다. 그러나 저는 이런 평가는 기독교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방글라데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방글라데시의 종교분포도를 보면, 88%가 이슬람이고 나머지가 힌두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나 힌두교는 운명론을 믿는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제적인 운명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러분! 이슬람이나 힌두교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의 종교는 우상이다. 비현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행복지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행복지수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행복지수는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행복지수가 소유에 있다면 미국이나 선진국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아야 한다. 그러나 후진국들에 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러분! 왜? 많은 것을 소유한 선진국들의 자살율이 높은가?  그것은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의 주어는 ‘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이란 단어를 강조하다 보면, ‘나’는 소외되어 버린다. ‘나’를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하나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라는 자기 정체성은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나(I am what I have)’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고, 기쁨을 찾고, 성공을 찾는다. 어느 순간에 무엇을 잃어버리면 결국 ‘나’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쉽게 목숨을 끊는 것이다.
여러분! ‘무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 중요하다.
우리는 소유가치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가치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소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 가치에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소유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기 원하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여 살기를 바란다.
작가 케네스 힐데브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종종 행복이란 것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 속에 숨어 있다고 믿곤 하지요. 우리는 큰 집, 멋진 옷, 비싼 자동차, 혹은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는 저금통장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버리지요.
  우리는 비싼 돈을 지불한 휴가, 많은 돈이 들어가는 여가 생활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물질이나 돈을 가지게 되면 어느 정도의 위안을 받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우리 자신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의 존재가치를 아는데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양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라는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의 양자는 법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변화된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양자는 처음부터 그 집의 자녀가 아니라 중간에 아들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양자가 되는 과정도 어떤 시험이나 치르거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부모가 그냥 자격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아원에 가서 여러 아이들 중에 한명을 선택하여 ‘내가 이 아이를 양자로 삼겠소 하면 양자가 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잘나서, 어떤 시험을 거쳐서가 아니라 양자로 삼는 자의 일방적인 호의이다. 이것은 은혜이다.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양자가 되었다는 것을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가졌던 옛 가정의 권리를 이제는 다 포기하고 새 가정, 새 질서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다고 시인하는것은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권리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새 질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새 아버지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이든, 양반이든 상관없다. 귀족의 양자가 들어가면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귀족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물을 필요가 없다. 원래 네로 황제는 클라디우스 황제의 양자이다. 그는 양자로 들어가서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죄의 종이라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 양자가 되면 이제 옛 가정의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V12). 여기에 보면, ‘빚진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빛을 지고 살다가 죽으면 그 빚을 자식이 대를 이어 갚아야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의 다른 집의 양자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이것이 양자의 제도이다. 우리는 죄의 빚을 지고 매여사는 자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넷째, 양자는 새 아버지와 살면서 이제 새 의무에 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고 자신을 양자로 삼은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요, 존재의 가치이며, 하나님의 양자의 당연한 도리이다.

두 번째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은 가족관계의 측면에서 우리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뢰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아바 아버지’는 ‘아빠’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아빠’라는 말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신감이 들어있다.
‘아버지’와 ‘아빠’라는 호칭은 다가오는 느낌이 틀리다. 아버지는 웬지 거리가 있어보이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지지만 ‘아빠’ 친근감이 느껴진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으나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왜냐하면 남편은 무신론자였고, 아들은 아직 종교와 신앙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일요일.
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려갔고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어쩌구~ 저쩌구~"
그러자 남편도 부인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장인어른, 이러쿵~저러쿵~"
아들도 얼떨결에 아버지를 따라 기도했다.
"사랑하는 외할아버지, 아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라는 단어대신 가끔씩은 ‘하나님 아빠’라는 표현을 써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것에서 우리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

세 번째 표현은 ‘후사’이다.

이것은 미래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후사’는 곧 상속자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상속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잘 실감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재벌 집에서 때어난 외동아들이 느끼는 감정과 똑같다. 이 아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기위해서는 먼저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실 유업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광을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인식과 표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많은 시인들이 ,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영광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모든 표현들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광을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할렐루야’말밖에 할 말이 없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치를 성령이 친히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내가 때로 연약하여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며 괴로워할 때, 성령이 친히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는 가? 하나님의 양자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에 있다. 하나님의 후사에 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실제가치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실제가치란 ‘유용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치에 맞게 살면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달란트 비유를 보라.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공평한 가치를 주었다. 그중에 5달란트를 받은 종과 2달란트를 받는 종은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실제가치를 올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을 칭찬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치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가치를 삶에 증명하고 하나님께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실제가치를 높여야 한다. 바로 우리들의 영적 몸값을 올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존재 가치를 실제가치를 올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vv12-14),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쫓아 사는 삶을 말한다. step by step으로 따라가는 것이다.(DDR)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양자는 자기가 들어간 집의 형편대로 사는 것이다. 집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고난이 곧 나의 고난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해야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자이다. 우리의 존재가치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근원이다. 이 행복을 누리며 살자. 자신의 존재를 가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실제가치로 높이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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