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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지막 한 시간 동안을 (단 12:9~10, 마 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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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목사, 랍비 세 성직자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밥상에는 먹음직한 생선이 올라왔습니다. 세 성직자는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먼저 신부가 입을 열었습니다. “교황이 교회의 머리이시므로 나는 머리부분을 먹겠습니다”. 목사가 말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최후의 진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꼬리 부분을 먹겠습니다”. 그 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우리 유대교는 양 극단을 싫어합니다. 몸통을 먹겠습니다”. 사실은 중요치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생선에 맛없는 부분이 있습니까? ‘어두일미’라고 하지만 시간에 있어서는 꼬리가 제일 맛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승패가 나누어지고 생사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인저리 타임’에 골이 터지고 승패가 바뀌기도 합니다. 농구경기에서는 ‘버즈비터’라는게 있습니다.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공이 손을 벗어나 그물이 출렁이며 경기가 완전히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축구경기에서는 ‘서든 데스’가 있습니다.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할 경우, 한골로 승부가 납니다. 골프경기에서도 연장전에 한 홀에서 승부를 가리기도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의 승패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승리를 뒤집기하기도 합니다.

  나는 인생을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 살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도 나에 대하여 끝까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독생자를 포기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은 포기하기로 하는 결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은 포기를 물리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합니다.

  6세기 팔레스타인의 수도사인 클리마쿠스는 “우리가 세상을 포기한 후에 우리를 공격하는 귀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포기하면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포기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면 결코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이클의 최강자이며 인간 승리의 표본인 랜스 암스트롱이 있습니다. 그는 운동선수로 치명적인 암을 극복하고 2003년까지 세계 최악의 자전거 경주인 ‘뚜르 드 프랑스’를 5연패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암스트롱입니다. 암에 대해 스트롱한 사람입니다. 그는 병이 있었지만 병에게 굴복하지 않고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포도원 품꾼 비유’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 일했습니다. 주인은 다시 제 3시, 제 6시, 제 9시, 그리고 제 11시에 나가서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합니다. 11시는 요즘 시간으로는 오후 5시입니다. 이 비유에서 나타내는 것은 주인의 부지런함입니다. 끊임없이 일꾼을 찾으시는 주인의 인내심입니다. 주인은 포기하지 않고 11시까지 찾으시는데 일꾼이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공평함에 대한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이 주어집니다. 일찍 온 사람이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1시간이나 10시간이나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시간에 비해보면 우리의 일과 시간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포도원에 들어와 일꾼이 되었다는 존재 자체가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최후의 한 사람이 포기한 지점에서 나는 시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발명가의 본색을 확실하게 드러낸 말입니다. “승자는 최후에 웃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웃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울 때도 아닙니다. 끝까지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한 시간까지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매튜 헨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인류의 마지막인 종말을 준비하는 것도 그래야 합니다. 매일은 ‘남은 인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입니다. 이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날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종말적 신앙으로 연말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마지막 한 시간까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6절에는 말합니다.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이 또 있는지라”. 포도원의 문은 아침 6시에 열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문이 닫히는 시간인 6시보다 한 시간 전에 주인에게 선택되어 포도원에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므로 포도원의 일꾼이 되었고 종일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면 얼마든지 포기할만한데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만약에 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침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거의 포기하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끈기 있게 기다린 것입니다.

  기다림은 신앙이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을 가르칩니다. 인생 자체가 기다림입니다. 지혜가 기다림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를 보세요. 아버지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찾으러가지 않고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느니 종들을 풀어서 잡아오는 게 훨씬 속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을 택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기다리지 못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집안에 가장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이삭이 태어나기까지는 25년이 걸렸습니다.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꼬박 백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총알 같은 속도로 오지 않고 빙하처럼 느리고 완만하게 다가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성경번역자이며 설교가인 필립 브룩스 목사님이 하루는 안절부절하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분이 목사님께 “브룩스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나는 급해 죽겠는데 하나님 도무지 급하지 않은가 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급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12:13에는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열 처녀 비유’에 나타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왜 미련하다고 합니까? 신랑이 올 것을 준비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헬라어에서 ‘보다’를 묘사하는 단어 가운데 ‘누군가 오기를 바라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로 시므온의 행동을 묘사했습니다. ‘프로스테코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다음 성전에서 만나 안고 축복한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불만이나 초조함이 없이 기다림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인생에서 배워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힘겨운 교훈입니다. 아기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배고프면 울고, 마려우면 그냥 싸고, 졸리면 참지 않고 잡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유아기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웨일스 시인 토마스는 “의미는 기다림 속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속담에는 “기다림,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패는 성공하기 직전에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흔히 기다림을 지체라고 여깁니다. 우리 모두에게 부름 받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란 믿음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커집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란 책에 보면 실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끈기라는 설명을 위하여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탁월한 세일즈맨 해리 콜린스에게 “당신도 고객에게 거절당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있죠. 아주 많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하면 당신은 몇 번 만에 포기합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기 전까지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세일즈의 탁월성의 비결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사학법이 개정될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말고 삭발 상태로 지내자고 했습니다. 저도 빨리 다시 머리를 기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머리 자른 것이 헛되게 할 수는 없다는 마음입니다. 지금 머리를 다시 길러버리면 웃음꺼리가 될 것입니다. 곧 다시 사학법 재개정에 대한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의 긴 머리를 보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므로 결과를 보겠다는 심정입니다.

둘째, 마지막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야 합니다.

  6절 하반절은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합니다. 7절에는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 일꾼이 늦잠을 잤을까요? 그날따라 다른 일거리가 없었을까요? 그런데 주인은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9절에는 다시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이라고 합니다. 많든 적든 일한 자는 똑 같은 보상을 받습니다. 마지막 한 시간이라도 일을 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1에서 2까지의 거리보다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훨씬 멉니다. 일을 안 한 것과 일을 조금이라도 한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1시간 한 것과 12시간 한 것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일의 양보다 일꾼 된 존재 자체입니다. 노동한 시간의 양보다 일하는 그 자체를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점입니다.

  요한복음 5:17에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꾼입니다. 요한복음 15:1에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농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가운데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는 일꾼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90%를 평범한 노동자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적은 시간만 제자들과 함께 공적 사역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30년은 일꾼으로 사셨고, 공생애는 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처럼 일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일해야 합니다. 사막의 수도사 카를로 카레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와 노를 주시지만 대신 ‘노를 젓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존재로서의 인간’(human being)은 동시에 ‘일하는 인간’(human doing)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에서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바울도 일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일 하고픈데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은 일거리가 없는 백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속히 젊은이들에게 할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일도 많고 일하는 사람도 많은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직업 수는 수천수만 가지나 됩니다. 1964년에 약 1,300개였던 직업이 현재는 12,400개로 증가하였습니다. 지식의 양도 늘어났고 전문화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일의 양은 늘어나는데 일이 없습니다. 일에 게으르지 않고 할 일도 많아야 합니다.

  저의 소박한 소원은 일하다가, 설교하다가, 글 쓰다가 죽고 싶습니다. 설교하다가 다 못 끝나고 죽어도 죽음이 설교가 될 것입니다. 글을 쓰다가 다 못 써서 글이 책으로 출판되지 않아도 죽음이 좋은 책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여러분, TGIF가 뭔지 아시지요? 식당이름으로 아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미국인들이 ‘Thank God It's Friday(하나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금요일부터는 주말이어서 일하지 않고 노는 시간이 되었다는 사인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을 감사할 것이 아니라 ‘TGIM’ 즉 ‘Thank God It's Monday(하나님, 감사합니다. 월요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7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노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결론

  미국의 세계적인 인생 상담가인 나폴레옹 힐은 “You can if you think you can” 즉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자기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일은 사랑이 가시화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일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일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일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일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순간까지 사랑으로 일하는 이 시대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부지런히 일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한 시간까지 일하므로 칭찬받고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성공자들이 다 되고 2007년도 희망과 기대감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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