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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7) :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렘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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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7 (2006. 12. 31)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렘 33:6)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의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은 남 유다가 망하기 전 약 140년 전에 역사상 앗수르(Assyria)라 불리는 나라에 의해서 파멸되었고, 유다 홀로 남은 단독 시대가 이어져왔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유다백성들을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죄하며 주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앗수르가 점점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 왕국 유다가 잠시 그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그 시기에 신흥세력이 융성하고 있었으니 바벨론(Babylonia)이라고 하는 나라였습니다. 이 바벨론은 점점 강성해져서 애굽(Egypt)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과거의 강대국인 애굽과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외교적으로 줄타기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행보가 하나님의 마음에 슬픔이 되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애굽의 모든 거민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그들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마치 갈대를 지팡이로 의지하는 것과 같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후일에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군을 형성해 바벨론과 전쟁을 하였지만, 크게 패배합니다. 그리하여 얏수르는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애굽은 쇠약한 나라로 남겨 지게 되는데, 이 전쟁이 역사 속에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의 전투입니다. 이는 이미 선지자에 의하여 예고된 바였습니다.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라도 북에서부터 멸망에 이르렀고 이르렀느니라”(렘 46:20).

I. 본문의 배경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들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지 않은 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배교적인 왕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가증한 배교의 정권과 시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의 선교를 위하여 이스라엘에 들어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여 자행되었던 여호와 신앙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바알 종교의 번영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철저한 배교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셨으니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백성들에게 밝은 빛과 같은 말씀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주시어 언제나 당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그 어두운 역사의 밤에 믿고 기도하고 살아가야 할 바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적용됩니다. 우리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또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날 때조차도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배 중에 설교를 통해서 가장 잘 말씀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중에, 혹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통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다가오시지만, 우리의 영혼이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영적인 단절감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택한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데서 비롯되는 결과입니다. 영혼의 어두움(spiritual darkness)은 스스로 택한 어두움과 어찌할 수 없이 처하게 되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주관적인 어두움과 객관적인 어두움이라고 부릅니다. 첫째, 주관적인 어두움은 죄의 속이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어두움으로서 죄를 품고 사랑하는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darkness in him)입니다.(사 44:18). 둘째,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는 무지로 말미암아 생겨난 어두움으로서 ‘자기 위에 있는 어두움’(darkness on him)입니다.(시 119:18).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그들의 지성을 향하여 말씀을 건네시며, 그들에 의하여 당신 자신이 이해되시는 곳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그들을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죄에 대한 사랑이나 지성에 대한 태만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언제나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는 들음에서 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난관을 만나든, 어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든 두 가지 사실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으신 선하신 분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 속에는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때로는 그 선의 기준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에게 고통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순종하면 결국은 우리들도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뜻에 합일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에 당신 자신의 정서를 나누어 갖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마음을 보이시며, 그 마음의 영향으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 죄악이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마음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실한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기대를 겁니다. 마치 노예가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고 그 긍휼을 기대하는 것처럼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고 기대합니다.


II.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범죄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시지 않고는 그들은 선택하신 목적을 성취하실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A. 심판하시는 하나님

오늘 여기 나타나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로 그런 어두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같이 출중한 말씀의 종을 보내셔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애굽을 의지해서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세속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소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애굽을 의지하고 오히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크게 책망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의 선포를 싫어했고, 급기야 그를 시위대 뜰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예레미야는 그 시위대 뜰에서 다시는 선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 선지자의 선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고된 고난을 봅니다. 그들이 곧 경험하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으로 끌려감에 따르게 될 살육과 고통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예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 대목에서 혼란을 느낍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이렇게 포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게 하실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언약을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들에게 복주시고 그들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하면 그들을 심판하실 것도 경고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죄를 미워하고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을 몸소 경험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참으로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언약 백성들과 인연을 끊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심으로 정결하게 하시고, 그루터기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실제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애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 137:1-3). 아마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고단한 노예의 하루 삶을 끝낸 후,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을 기억하고서는 눈물로써 주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며 선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 심판은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엄중하다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보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안에,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더러움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시는 쇄신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크신 능력으로 건져내시고, 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토벌하고 그 땅을 저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그들에게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포도열매를 거두게 하시며, 짓지 않은 집에서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강력한 군대와 훌륭한 군왕들을 주셔서 그 땅을 통치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알리는 이 세상의 깃발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아니하고는 이 세상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는 일 없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도리를 알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 자원을 은혜를 통해 공급해주셨습니다. 그 은혜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수많은 구원의 능력들이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진정한 행복과 그 영원한 기업이 무엇인지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으니,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통치가 그분의 손에 붙들려진 연필이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그 손에 붙들려진 연필이 쓰고 지나간 한 편지지였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를 품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현란한 필체로 적어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더 이상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번영을 추구하고 이 세상 왕국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었고 불 꺼진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라 심판의 칼을 통해 썩어있는 껍질들을 모두 벗겨내시고,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쇄신의 방법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타락한 그들이 누렸던 번영은 누가 준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했던 부자유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넘치는 물질, 수많은 영광들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공교롭게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수많은 자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는데 사용되어졌습니다.

사십여 년 전 조국교회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 전역에 요즘과 같이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예배당은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 가마니를 깐 예배당 바닥 위에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앉아 톱밥이나 장작 난로에 몸을 녹이며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번 돌아보십시오. 온 땅에 예수의 복음을 잘 전하라고, 사랑하는 주님과 이 땅의 백성들을 잘 섬기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많은 자원들 때문에 우리 스스로 부패하고 뒤로 물러가는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몇 해 전부터 우리는 ‘웰빙(well-being)’이라는 바람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웰빙’보다 중요한 것은 ‘웰다잉(well-dying)’입니다. 잘 죽는 것이 없이는 잘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고백한 사도 바울도 웰빙의 사람이 아니라 웰다잉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혼돈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부패한 욕망과 이 세상의 안일과 안전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불타는 용기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시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군사와 같은 함성 대신에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나태한 희망들이 넓게 번져가고 있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멸의 꿈을 따라 산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기록되어져 나갔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바로 그런 꿈을 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 했고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번영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그 많은 포도주와 곡식들은 오히려 우상들에게 바쳐졌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베풀어주신 수많은 안락한 여건들은 세상 것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졌습니다. 결국 나라는 부패해져 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이 없는 족속이 되어갔으며, 어떻게 해도 주님의 향취를 드러낼 수 없는 맛 잃은 소금과 같은 존재, 누룩 없는 가루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깎아내시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혁시키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과 괴로움들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겪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난과 위기를 맞이하게 될 때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눈을 떠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죄에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B. 치료하시는 하나님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학교에 가면 성한 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피부에 온통 하얀 버짐이 난 아이들, 기계충이 걸려서 머리털이 동그랗게 뽑혀진 아이들. 참으로 다양한 질병을 가진 아이들이 모였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병중에 하나는 ‘종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밖에 곪지 않았는데 실은 그 염증의 뿌리가 살 깊이 박혀서 웬만큼 약을 발라도 잘 낫지 않는다는 것이 이 종기가 지니고 있었던 심각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게 되면 아주 확실하게 치료를 해줍니다. 우선 겉에 있는 딱지를 인정사정없이 확 벗겨낸 후, 맺혀 있는 고름을 맑은 피가 나올 때까지 짜냅니다. 그리고 독한 과산화수소로 소독을 하고 그 위에 반창고를 붙이면 치료가 끝이 나게 됩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통증과 구역질을 수반하는 치료 과정들입니다. 그러나 한 일주일만 지나고 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새 살이 오르고 상처 딱지가 떨어지면서 아물어 버립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 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동일합니다. 심한 통증으로 처절하게 신음할지라도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우리의 병든 부분들을 도려내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이는 우리가 얼마나 죄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고쳐지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자기의 책 속에서 모든 존재의 본질은 ‘힘’과 ‘경향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일 경우에는 은혜의 힘이 그에게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착한 경향성이 그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의 궤적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는 악한 힘과 그분을 거스르려고 하는 악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의 인생과는 그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보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서 진실로 행복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고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심히 아프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의 환부를 도려내고 싸매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너무나 지독한 방법으로 자기를 취급하신다고 불평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방법이었으며, 그렇게 치료하시는 그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걸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매우 소중한 존재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주신 분입니다. 그 피로써 값 주고 사신 여러분들을 차마 버리실 수 없으시기에 죄와 불순종으로 잠시 망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고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망가진 자신을 고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아니면 누구도 치료될 수 없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팔이 아니면 누구도 고쳐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는 분이시고, 죄에 의해 망가진 우리의 영혼의 섬유질을 가장 잘 파악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주 숙련된 의사와 같이 말씀의 칼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 속에 다가오셔서 우리의 힘줄과 뼈, 우리의 조직 사이에 갈피갈피 배어있는 죄의 염증들을 잘라 내시고, 말씀의 은혜로 새롭게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고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III. 고난 가운데 보이신 하나님의 성품

오늘 본문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 가운데 두심으로써 징계하시고, 또한 말씀으로써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그분의 두 가지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A. 평강의 하나님

첫째로 그분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강은 평화를 뜻하는 것인데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느끼게 되는 전쟁이 없는 상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상태, 모든 것이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평강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죄인들의 마음에는 이런 평강이 있을 수가 없으며, 주님을 거슬러 사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짓밟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전진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을 누릴 수 없는 전진일 뿐입니다. 야망이 조정하는 충동질로 자기의 길을 걸어 갈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요 나의 도움이 되시기에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내게 응답하시리라는 진정한 확신이 그들의 인생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은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거룩한 구속이 없는 곳에는 신령한 평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자유는 이 평강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은 바로 이 평강의 분량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과 화평한 자,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단순히 삶의 양태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삶의 질에 두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자, 그래서 공부를 해도 주님 때문에 공부하고, 직장에 다녀도 주님 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시집 장가를 가도 예수님 때문에 시집장가를 가는 그런 사람,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주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저들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큰 고난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길을 걸어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평안함보다도 훨씬 더 값집니다. 주님이 정해주신 길을 걸어가면서 당하는 시련과 아픔은 주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서 얻게 되는 수많은 번영과 유명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번영해도 그들은 행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그들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삶의 양태와 질을 너무 많이 혼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부요해지며, 뛰어난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태일 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마당이나 쓸었을 때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의 삶의 양태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한 집안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에는 죽어가는 수많은 세계의 만민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삶의 양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양태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노예로서 마당을 쓸던 요셉의 삶의 양태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만민을 살리던 요셉의 삶의 양태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삶의 질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그것입니다. 노예로 있었을 때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나, 옥에서 풀려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그는 항상 동일한 삶의 질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로 인해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질을 통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온 삶은 하나님과의 평강으로 가득했습니다.

다니엘은 또 어떠하였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왕의 신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을 때나, 바벨론의 총리가 되어 천하를 다스릴 때나 그의 삶의 질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고액의 연봉을 받던 총리 시절이나 포로로 끌려온 그 처량한 시절이나 동일한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 땅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간신배의 모략으로 사자 굴에 갇혔을 때에 그를 사랑하던 다리오 왕이 그에게 했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비록 다니엘이 자기의 신하이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왕을 섬기는 자라고 다리오왕도 인정한 것입니다. 그는 변함없이 여호와를 섬겼으며, 평강 속에서 고난의 때를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것은 사소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죽고 사는 일도 주님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것입니다. 신자에게서는 죽음도 또 다른 삶의 양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놀라운 평강, 그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그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앞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십시오.

B. 성실하신 하나님

둘째로 그분은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볼 때 이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나타내 보이시는 그분의 성품인데, 특별히 당신이 맺으신 언약관계에 대해서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보이신다는 견고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괴하고 죄악 된 길로 달음질쳤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언약관계를 파괴하고 도망가는 음란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약속한 곳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언제가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들은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마다 거기에 그대로 계신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에 더욱 더 가슴 아파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신실하신 사랑, 변함없는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해보십시오. 우리가 행한 대로 주님이 갚으시고 응답하셨다면 우리는 아마도 오래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던 호세아처럼 주님의 품을 떠났던 우리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회개하는 마음과 용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고치시며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다시 살게 해주셨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섬기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그 위대한 일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완고함과 고집, 두 마음을 품은 불결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제공받았고, 시시로 마음을 녹이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떠밀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신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당신이 세우신 그 아름다운 계획을 따라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성실하심을 기만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성실하심을 핑계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거나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죄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제까지 참고 기다려 주신 그분의 깊은 뜻을 깨달아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성실하심을 본받아 주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IV. 결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죄를 고치시기 위해 잠시 어두움 가운데 두시지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빛이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어두움과 단절감 속에서 훈련하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인지를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길에 모든 불평을 떨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그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을 가장 큰 가치와 보람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를 부르신 그 구원의 뜻에 대해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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