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년] 영성있는 성도(롬 8:1~11)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나는 지난 두 주간여 동안 북미주 여행을 하면서 오늘 여러 성도님들께 말씀드릴 §영성있는 성도§란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많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성도 여러분께 내가 설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의 이 말씀은 바로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설교이었음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내가 영성 있는 성도가 되고 싶은, 아니 영성있는 목사가 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이고 동시에 창훈대 뜰에 모여드는 모든 성도들이 모두가 영성있는 성도가 되어 정말 창훈대교회야 말로 영성있는 교회로서 정체성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영성있는 성도란, 영성있는 교회란 어떤 성도와 교회를 의미합니까?
  밤 새어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 목이 터져라 외치며 부르는 찬양,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집회, 중보기도와 영성치유를 강조하는 모임, 천국에 다녀왔다는 주관적 경험의 간증, 긍정적 사고로 하나님께 다가간다는 오늘의 신비주의, 이상의모든 것들이 한국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시적 교회성장을 이룩해 냈다할지라도 그것이 영성의 본질은 아님을 우리들의 이러한 영적 눈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반세기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해왔습니다.  목회자들의 열심있는 전도와 프로그램에 따른 평신도양육과 훈련, 성도들의 희생적 봉사와 교회를 섬기는 충성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세계교회 앞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만든 동력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을 넘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마이나스 성장을 기록하는 위험 앞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이 있을 수 있겠으나 우선우리가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영성이 시들어간다는 것과 그간 한국교회가 영성을 기초로 세워 지지 않은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 개인에 경우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영성이 있어야 그가 깨어있는 성도일 것이고 시험과 유혹에 맞설 수 있을 것이고 승리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나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육신을 입고 있는 유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본문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아니라 이 육신은 하나님의 굴복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육신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것(송장)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을 이용 안한다 할지라도 구약 신명기 19장 21절에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라고 해서 지금도 중동의 아랍문화권에는 도적질한 사람은 형벌로 손을 자르고 음행한 사람은 눈을 뽑는 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법을 집행하는 저들부터 이런 법을 적용받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군이라고 일컫는 다윗왕이 자신의 심복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을 뿐아니라 더 나아가 이렇게 충성했던 우리아장군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다음 다윗은 그의 침상을 적실만큼 통곡하며 회개하였다고 하지만 아니 만일 다윗이 육신의 두 눈을 다 뽑아 회개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을 이처럼 추악하고 눈까지 뽑을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나약한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 9절에서 10절에 보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가장 뼈아픈 경험을 통해서 다윗은 가장 귀중한 교훈을 얻음으로 진리를 터득하는 길로 한 걸음 나가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편기자도 51편 11절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경험을 했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기도했으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는 육신을 입고 있는 자들이기에 피할 수 없는 유혹과 마음 가득 찬 탐심의 우상 앞에 굴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과 같이 유약한 우리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여야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 결과 시편 32편 1절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천만번 애를 쓴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역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임을 처절하게 인식하여야겠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정죄함이 없노니’라고 한 본문말씀에 주목하여야겠습니다.

  여기 ‘정죄함이 없나니’란 헬라원어는 ‘카타크리마’란 법정용어로서 피고인 우리 인간의 죄가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했으니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무죄를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영성은 바로 이같은 십자가의 속죄신앙, 부활을 믿는 유일한 생명신앙에 있는 것이지 육신도 잘되고 사업도 잘 되고 영혼도 잘 된다는 삼박자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요 열린 예배라고 하여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깊이 묵상함보다는 자신의 감흥과 열기에 취하여 부르는 찬양축제에 있는 것도 아님을 깊이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일부 잘못된 부흥사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그리스도인의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며 뼈 아픈 회개와 통회대신 치유사역을 앞세우며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주시는 중보자인데 이 고유한 주님의 중보사역을 도매로 떠다가 소매하듯 마구잡이로 여기저기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은 사이비 신앙에 속아서는 안 될 것이며 여러 형태의 모방신앙에 기웃거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 사이비란 단어는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말로써 우리의 주의를 요한 대목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대신 긍정적 사고를,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나는 설교대신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들,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아닌 잘 사는 법칙만을, 성령의 임재가 아닌 감흥만을 앞세우는 일체의 것들은 현대판 이단의 새로운 모습일 것 같습니다.
  육신이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며 교회가 부흥되고 성도들이 유족하게 사는 것도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된 성도는 육신적으로 잘 살면서 영적으로 죽어 사는 사람보다는 육신적으로 좀 못살아도 영성 있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좋은 한 예가 계시록 2장에 나와 있는 서머나 교회가 라오디게야 교회가 아닙니까?  주님은 서머나 교회보고 뭐라고 칭찬했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으며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계시록 3장 17절에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어느편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하나 속화된 교회보다는 서머나 교회처럼 궁핍할지언정 영성 있는 부요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미래학자 앨빈토플러는 부의미래라는 책자에서 미래사회는 보이는 재산보다는 보이지 않는 재산이 더 크고 가치 있다고 했는데 그의 예언자적 미래관찰은 우리 성도들도 깊이 음미해 볼만 합니다.
  오늘의 교회도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수많이 모여드는 성도, 풍성한 헌금과 재산 보다는 영성있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 신령한 말씀이 전달되는 교회, 소외된 장애인과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교회가 오늘 우리 모두가 바라는 교회상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또 다른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 2010’에서 지적하기를 미래 사회는 영성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미래에는 영성 있는 기업만이 성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잘 나가던 미국의 40대 기업이 갑자기 추락한 것은 기업 마인드 영성(정신)이 없어서 그 같은 결과에 도달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전술한 바 있는 미래학자의 말은 기업의 장래를 예견하는 말이지만 교회의 앞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마다 성장을 외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다른 교회보다 앞서려고 몸부림쳐도 성도들의 참된 영성이 없으면 결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세계를 지배했던 교회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때에도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나가서 적은 무리였지만 영성을 지켜 천 년 후에 개혁의 빛으로 새 시대를 밝혔듯이 이 분쟁과 대결, 경쟁과 향락의 세기말적 와중에서도 깨어있는 영성으로 나를 지키고 창훈대교회를 지키고 한국교회를 깨우는 시대정신과 파수꾼으로 2006년을 마감하고 2007년의 새아침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성 있는 성도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