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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문 밖에서 일어난 기적 (눅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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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서 일어난 기적 / 누가 2:3-12

1) 관심이 있어야 문이 열립니다.

이스라엘은 예전의 우리나라처럼 가옥구조처럼 집 안에 외양간이 들어와 있었답니다. 혹은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랑 외양간이 그리 멀지가 않아서 집안에서도 외양간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답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때 나신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서 온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여러 일행들이 몰려들어서 굉장히 부산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 그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아왔다는 말이나, 혹은 아기 예수를 그리도 맞아들였다는 말들이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적에 산모의 고통이나, 아기의 울음소리라는 것이 분명 있었을 법한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나몰라라만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도 이스라엘의 집안 구조가 밖에서 나는 소리를 방안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다는데, 무슨 까닭에 모른체 외면하고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문이 닫힌 연고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니까? 결코 문밖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만 있으면 제 아무리 굳은 문일지라도 열수 있었을 법한데 말입니다. 또한 아무리 먼거리일지라도 마음만 있었다면 한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었을 것인데도, 그들은 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갈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이 깊을 수록 만남의 기쁨이 큰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즉 마음의 준비가 없다면 그 만남이 그리 달갑지가 않을 것입니다.
성탄의 날의 찬양은 바로, 여기, 지금, 이날에라는 구절이 주요 단어로 사용되어집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수 있게 하는 동기는 다름 아니라 기다림, 마음의 준비가 충분하느냐는 조건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이 제일 많이쓰는 말을 조사해 보니 "Who cares?"(알게 뭐야)와 "I don't know"(몰라요)랍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널리 알려졌었던 책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얼핏 듣기에는 멋진 말같습니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완숙함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체념 섞인, 혹은 무책임한 무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앞에 나열한 알게 뭐야랑 나도 몰라랑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가 많이 이와같은 방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주류인 사회, 체념이 멋처럼 느껴지는 환경...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문 앞에 서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바라다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문 앞에 서 계시는데, 우리가 그 문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문을 열는 것과 함께 남에 대한 배려, 사랑, 보살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오로지 모든 관심이 나에게서만 머문다면 결코 주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문을 열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뭔가가 보일 것입니다. 아니 문을 열면서 이미 그곳에서 아이를 낳는 한 산모가 있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당연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야밤에 문을 열고, 산모를 위해서 혹은 아이와 엄마를 위해 방에 들어오라고 하면 나는 그 방에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포기와 베품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문을 열지 못한 이유는 사실 무엇보다고 관심도 관심이지만, 나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코 문을 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는 분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무의식 중에 간구하는 기도 중에 내용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라는 물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뭐가 잘못인가 싶지만, 사실 오로지 모든 기도가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그치고 만다면 결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살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적군에게 쫓기는 소년이 숨어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도망자을 친절히 대해 주었고, 숨을 곳까지 제공하였습니다. 이내 도망자를 찾는 군인들도 마을로 왔습니다. 그리고 도망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자, 군인들은 동트기 전까지 도망자를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겁에 질린 마을사람들은 동네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의논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가 성서을 읽으며, 묵상에 잠겼습니다. 꽤 시간이 흘러 새벽녘이 되었을 무렵, 목사님은 성서말씀 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낫다 (요한 11:5)”. 이에 그 목사님은 “그래 맞다 이거다” 하고는 병사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숨어 있는 곳을 일러 주었습니다. 병사들은 그 소년을 끌고 가 죽였습니다. 마을에서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마을사람들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모두! 들 고마워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자기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천사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그 도망자를 적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네가 메시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가 메시야인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3) 누가 이 기적을 만나겠습니까?

10-12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2:10-12)

‘천사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명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아마도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음성은 단지 우는 아기의 소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음성을 주의 음성으로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젊은 날들을 다 보낸 어느날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중에 뜰로 나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침 그곳에서 줄넘기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입술을 통해서 “펼치라, 펼치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후에 어거스틴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성경말씀을 펼치게 되었고, 그 펼쳐진 말씀을 통해서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고, 회심의 중요한 분수령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듣고자 소망하는 자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준비되어 있는 자들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일마다, 혹은 날마다 주의 전을 찾아 나아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찬송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교회에 그냥 왔다 가면만 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지는 지도 모릅니다.
지금 문밖에서 주님이 문을 두르리시면서 기다리시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며 모른척 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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