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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증거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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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교회는 ‘증거가 나타나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에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하십니다. 하늘의 해 달 별 구름 천둥 번개를 통해서 자기를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기를 증거하십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이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이런 자연과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게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의심없이 믿고 경외합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서의 분명한 증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린교회가 그 하나님과 함깨 하는 자로서 분명한 증거를 갖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속에는 하나님을 가장한 거짓 그리스도인들 미혹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삶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속에는 알곡도 있지만 가라지도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를 갖고 살아간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하며 하나님의 나라의일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측복의 증거 그 감사의 증거 그 생명의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감사한 것이 2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젊었을 때 부름받아 헌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그냥 순탄하게 코스를 밟아가는 목회자에 해당이 됩니다.종종 보면 젊은날 시간과 몸을 헛된 것에 바치는 경우의 분들이 많습니다.그리고 나중에 깨닫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보통 이런 분들의 특징을 보면 똑똑하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다른 길을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사실 하나님의 일도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 하나님이 인도하시어서 함께 하여주시는 사역은 힘이 들기보다는 기쁘고 행복합니다.이런 상황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은사와 소원에 따라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마련하여 주셔야합니다.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부족한데 비해서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할 때 감사드립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부름받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분명한 증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그 하나님의 증거를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받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1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성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우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한해동안 먼저 주님과의 관계에서 은혜받기를 먼저 구하시고 사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먼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하여 권면하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것입니다.그 뜻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이 권면은 바울의 개인적 층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 는 것입니다.우린 여기서 설교듣는 사람들이 지녀야 될 태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순종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본문 l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그 뜻은 은혜의 가치를 알고 소증하게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금은보석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잘못 받으면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갱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은혜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도 거저 하나님이 주셔서 은혜로 받았습니다.엡2:8에 “너희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은사와 직분들 받았습니다. 엡4:7에 “우기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직분과 은사를 받은 은혜의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은혜를 헛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까?
지금 은혜를 받지 않고 살아가면 은혜를 지킬 수 없고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그래서 요구하는 것이 지금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과거의 한번 받은 은혜로 은혜가 누려지고 승리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2절 끝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보라'는 것은 은혜의 공개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지금이란 숨쉬는 그 순간, 살아있는 이 찰라를 의미합니다. 즉 이 시간을 귀하게 여길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는 시간 은혜를 먼저 체험하여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지금은 다분히 종말적 긴박성이 강조되는 시간인 것입니다.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이 한해를 살아갈 때 먼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전도서 3장 1-8절에 보면 시간 속에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소개합니다.
날때와 죽을때,심을때와 뽑을때,죽일때와 치료시킬때,헐때와 세울 때 울때와 웃을때,슬플때와 춤출때,버릴때와 거둘때,안을때와 멀리할때,찢을때와 꿰맬때,잠잠할때와 말할 때 사랑할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때와 평화할 때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긍정적인 시간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간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긍정의 시간이든 부정의 시간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삶에 일어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슬퍼할때에는 최선으로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그 슬픔이 안슬픈척 감출필요가 없습니다.또 기쁠때에는 최선으로 기뻐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기쁨을 안으로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주어진 현재의 삶에서 때에 맞는 사람으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줄로 믿습니다.

저는 바라기는 한해동안 우리의 삶에서 먼저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재에 승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은혜받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위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승리합니다. 하루를 승리하려면 먼저 은혜받고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일주일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일에 은혜를 받아야 일주일을 승리합니다. 은혜받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이 결국은 세상을 이깁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영유아기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시절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공하는 10대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매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실 때에 우리의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의 나이 속에 승리의 증거 기회증거가 나타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은혜 받는 기회를 갖으시고 그 자리를 갖으시는 증거가 있으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지금 여기에서 먼저 은혜의 자리를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합니다. 여러분 은혜받아야 행복하고 은혜받아야 사명감당합니다. 은혜받아야 지금을 승리하고 은혜받아야 사역에 승리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은혜받는 현재의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덕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3절,  여기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훼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직분을 맡은 자로서 무엇에든지 꺼림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거리끼지 않으려고 조심했습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가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최고의 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입니다. 이 “자기”란 옛사람의 나입니다. 자기는 바로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육신의 소욕입니다. 자기는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의 자기입니다. 자기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자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주님을 좇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려놓았습니다.

특히 고전9장에 보면 바울이 어떻게 자신을 내려놓습니까?
마땅히 사도로고 누릴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먹고 마실 권리조차 내려놓고 자비량으로 천막을 기우면서 희생하면서 교회를 섬깁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삯을 받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라고 말을 합니다. 즉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도 밭을 갈 때에는 먹을 것을 소망할 것이고 곡식을 떠는 자도 함께 나눌 것을 소망을 갖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그 복음으로 인하여 오는 삯을 받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육신의 것을 거둘 수 잇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범사에 모든 사람들에게 장애가 없기 위해서 낮아져서 섬겼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있지 않지만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없는 자가 아니요 율법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앞에서 바울은 여러사람들같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삶의 증거를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삶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긍정적으로 자기를 인정하고 높이는 건강한 자긍심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헛된 자존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를 높이고 나타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자존심이 강하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본질인 주님보다 비본질인 사소한 문제의 명분에 매달려 실패의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주문제가 무엇입니까? 명분 때문에 싸웁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의 명분에 해가 되면 싸웁니다.부부싸움을 왜 합니까? 왜 나를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나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 싸움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목사인 나를 높여주지 않느야 하는 것입니다. 왜 장로인 나를 대우하여 주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앞에 세우고 높이기를 원하는 사람 그렇게 가는 교회 속에 주님의 증거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본질을 위해 삽니다. 진리를 위해서 삽니다 . 복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나가 되지 않도록 본질에 비추어서 나를 포기하고 양보하고 희생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가 주님의 덕을 나타내는 사람은 내가 먼저 양보합니다. 내가 먼저 포기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나타내고 한영혼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복음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자는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에 대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입니다.
요사이 시중에 유통하는 책 중에 김남준 목사님의 ‘자기 깨어짐’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모든 죄의 뿌리가 그릇된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깨어지고 나면 옛사람에 대하여 죽고 새사람에 대하여 살아난다고 지적합니다.무엇이 엣사람인가 ?죄에 대하여 살고 의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무엇이 새사람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지만 주의 의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 옥토와 같습니다. 밭은 부드러운 밭 옥토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헨리 나우엔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는 중세기 어떤 수도사의 얘기를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노련하고 존경받는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의 교육을 막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는 흙을 만지면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아주 견고하고 딱딱한 흙을 만지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흙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흙이라서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노련한 수도사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네”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을 응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것을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라고 말하지.”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란 내가 깨어지고 내가 부서질 때 하나님은 거기서 기뻐하는 꽃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위하여 때로 하나님이 나를 깨부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망하기보다 ‘하나님, 깨뜨리세요. 깨뜨리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나는 죽고 주님이 살고 나는 죽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 주님을 증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고난의 승리의 증거가 있습니다.

여기 4-10절 사이에는 바울이 고난당하는 모습이 소개됩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같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삶의 증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삶의 증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면서도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볼 때 이름 없는 자요, 죽은 자요, 벌받은 자요, 슬픔을 당한 자요, 가난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유명한 자요, 살아 있는 자요, 기뻐하는 자요, 부요하게 하는 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부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고 멋있는 승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들을 육체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자기들이 당한 모든 환난에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인내와 친절과 사랑과 능력과 성령으로 영적인 세계를 개발하여 나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해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고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 대신 인내로써 그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곤경에서도 변함없이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당할 때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며 그 불행을 되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더욱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주님의 증거를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카알라일 이라고 하는 유명한 문학인이 있습니다.그가 쓴 책 중에 [불란서 혁명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칼라일이 그 책 원고를 다 써서 친구 가운데 유명한 철학자인 존 스튜아트 밀 이라는 사람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칼라일은 천신만고 끝에 쓴 원고였지만 우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선뜻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밀은 고맙게 여기고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읽었는데 어느날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그 원고 뭉치가 보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알아보니 하녀가 방을 치우면서 못쓰는 종이 뭉치인줄 알고 모두 불쏘시개로 써 버렸다는 것입니다. 밀은 그 말에 정신이 아뜩하여 졌습니다. 큰일이 난 것입니다. 그는 한 걸음에 칼라일에게 달려가 백배 사죄하며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칼라일은 "여보게 밀! 너무 걱정 말게 이왕 그래 버린 것 할수있나?"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는 다시 입밖에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다시 붓을 들어 갖은 신고 끝에 써낸 원고가 곧 오늘날 전해지는 [불란서 혁명사]인 것입니다. 그의 친구 밀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체 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그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고난을 당할 때 불평과 원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합니다. 대신에 인내로 그것을 극복하여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한해를 살아갑니다. 먼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을 나타내고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현실 속에서 고난이 있을지라도 복음과 함께 주님과 함께 고난을 이기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하나님과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나는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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